[엔비디아 CEO 젠슨 황] 재벌 총수를 삼겹살 불판 앞에 앉힌 남자 [비즈앤피플]

돼지고기 한 점과 ‘소맥’ 한 잔
격식 깬 소탈로 상대 경계 해제
접시닦이로 시작한 커리어 영향
서민 공간서 파트너와 만나도
HBM·AIDC·로봇플랫폼 등
미래 산업 ‘묵직한 의제’ 공유
대중 행보에 가는 곳마다 화제
SK·현대차·LG·네이버와 협력
한국 AI 산업과 동반자로 격상

박동해 기자 eastsea@busan.com 2026-06-14 08:00:00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삼겹살 음식점 ‘형님 저요’에서 열린 이른바 ‘삼소(삼겹살·소주) 회동’이 화제가 됐다. 왼쪽부터 SK그룹 최태원 회장,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 네이버 이해진 의장, LG그룹 구광모 회장. 연합뉴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삼겹살 음식점 ‘형님 저요’에서 열린 이른바 ‘삼소(삼겹살·소주) 회동’이 화제가 됐다. 왼쪽부터 SK그룹 최태원 회장,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 네이버 이해진 의장, LG그룹 구광모 회장. 연합뉴스

1978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 열다섯 소년이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 앞에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손끝은 종일 물에 잠겨 퉁퉁 불어 있었다. 대만에서 건너온 이 이민자 소년은 접시닦이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설거지에서 시작해 서빙을 담당하는 서버까지 승진했다. 고객을 응대하고, 그릇을 치우고, 음식을 나르고, 변기를 닦고. 화려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이었지만, 꿈을 가진 소년에게 겸손함과 근면함 그리고 서비스 정신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

말도 문화도 낯선 땅에 떨어진 이민자 소년에게 녹록한 시절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은 식당 주방에서 묵묵히 몸으로 일을 익히며 단단해졌고, 성인이 된 뒤 다시 데니스를 찾았다. 1993년, 이번엔 실리콘밸리의 데니스에서 동업자들과 커피를 리필해 마시며 사업을 구상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현재 글로벌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다. 2026년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의 수장이 된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63)은 여전히 데니스에서 일했던 과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누구보다 접시를 깨끗이 닦았고, 가장 많은 커피를 나를 수 있는 직원이었다고.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연합뉴스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연합뉴스

■데니스, 깐부치킨 그리고 형님 저요

데니스는 한국으로 치면 백반집에 가까운 미국의 서민 식당이다.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젠슨 황은 대중적인 장소에서 파트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공유하고 협력을 논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을 ‘깐부치킨’으로 불러낸 그는, 이번에도 대기업 회장님들을 삼겹살 불판 앞으로 불렀다. SK그룹 최태원 회장, 네이버 이해진 의장, LG그룹 구광모 회장이 서울 서교동 고깃집 ‘형님 저요’에 나란히 앉아 삼겹살에 소맥을 마셨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의 수장은 1만 4000원짜리 삼겹살과 5000원짜리 계란찜의 맛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맥잔이 채워지자 숟가락으로 잔을 내리쳐 술을 섞은 뒤 “고(Go) 코리아! SK! LG! 네이버! 치어스”라고 외치며 건배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오간 건 가벼운 안부가 아니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로봇 플랫폼 등 한국 산업의 다음 10년이 걸린 묵직한 의제들이다. 이 수십조 원짜리 이야기가, 삼겹살 한 점과 소맥 한 잔 사이에서 오갔다.

■격식 깨는 파격의 효과

젠슨 황은 이번 방한뿐 아니라 해외 출장 때마다 야시장과 노점을 찾아 거리낌 없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 왔다. 한 예로 지난 2024년 대만을 방문했을 때 그는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등 반도체 업계 거물들과 야시장을 찾아 길거리 음식을 즐겼다.

한 팬이 그의 방문 식당을 추적해 만든 ‘젠슨이츠(Jensen Eats)’ 사이트에는 그가 다녀간 수십 곳의 장소가 기록돼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젠슨 황의 방한 동선을 기록한 ‘젠슨 황의 발자취’라는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소탈함은 협상 테이블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격식과 의전에 둘러싸인 거래 자리를, 그는 한 끼 밥상의 친근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다. 권위를 내려놓은 상대 앞에서는 누구라도 경계를 풀었다.

한국 재계에서 그룹 총수란 좀처럼 가까이 잡히지 않는 존재다. 수행원에 둘러싸여 격식 있는 자리에서 짧게 비칠 뿐, 사적인 행동이 카메라에 노출되는 일은 드물다. 그런 이들이 가위를 들고 비계를 자르고, 소맥잔을 부딪치며 ‘형님’ 소리를 듣는 풍경은, 젠슨 황이 아니었다면 보기 어려웠을 장면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대중적 행보를 두고, 개인적 성향이 묻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고도로 의도된 연출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중이 더 뜨겁게 반응한 소통

젠슨 황의 소탈함에는 또 하나의 효과가 있다. 대중을 향한 화제성이다. 일반인에게 AI 반도체 기술은 멀고 어렵다. 그는 그 복잡한 기술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사람들과의 접점을 늘리는 길을 택했다.

누구나 아는 고깃집에서 소맥을 말고 야시장에서 옥수수를 베어 무는 그의 모습은, 첨단 기술의 거리감을 단숨에 좁혀 놓는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으로 먼저 다가가는 방식이다.

이번 방한 내내 젠슨 황은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회의실이 아니라 마포구 홍대의 PC방이었다. e스포츠 구단 T1의 베이스캠프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황제로 불리는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을 비롯한 선수단을 만나, 페이커의 사인이 담긴 기념품을 선물 받았다.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홈경기에서 엔비디아 창립 연도인 1993년을 상징하는 93번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고, TV 토크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대중은 그의 행보에 열광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몰렸고, 뜨거운 반응이 따라붙었다. 언론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동선을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한 외국 기업인의 방한이 며칠간 온 나라의 화제를 빨아들인 진풍경이었다.

■젠슨 황이 남긴 것

젠슨 황은 4박 5일간의 방한 일정에서 보여 준 화제성만큼, 한국에 많은 선물을 두고 갔다. 먼저 반도체 공급처였던 SK와의 관계는 차세대 메모리와 AI 팩토리를 함께 개발하는 ‘풀스택 AI 동맹’으로 격상됐다.

현대차는 올해 9조 원을 단계적으로 투입하는 새만금 ‘AI 밸리’ 구상에 엔비디아의 투자 참여를 제안해 긍정적 답을 받았고, 엔비디아의 차세대 ‘블랙웰’ GPU(그래픽처리장치) 5만 개를 활용한 자율주행·로보틱스용 AI 팩토리 구축에도 속도를 내게 됐다.

LG는 로봇 학습과 센서 개발에 협력하기로 했고, 네이버는 초대형 AI 클라우드를 엔비디아와 함께 만들기로 했다. 야구장 시구로 인연을 맺은 두산은 로보틱스·에너지·첨단소재로 협력의 폭을 넓혔다. 반도체에서 데이터센터, 로봇, 모빌리티까지, 한국 산업 전반으로 협력이 뻗어 나갔다.

젠슨 황은 또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 지난해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당시 약속한 GPU 26만 장 도입과 엔비디아의 최신 AI 컴퓨팅 인프라인 ‘베라 루빈 NVL72’ 기반 AI 팩토리 도입을 연내 추진할 수 있도록 협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협력들은 단순한 GPU 판매를 넘어, 한국 AI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인프라를 엔비디아에 기대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업을 넘어 ‘국가’를 고객으로 삼으려는 엔비디아의 전략 속에서, 한국은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동시에 가장 깊이 엮인 고객이 됐다.

젠슨 황이 차린 밥상은 분명 따뜻하고 풍성했다. 접시를 닦던 소년은 이제 한국에서 가장 권위적인 사람들을 자기 밥상 앞으로 불러 앉히는 사람이 됐다. 그 밥상에서 한국이 손님으로 남을지, 함께 요리를 하는 주인이 될지는 남아 있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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