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9-07 15:05:25
“내 인생 첫 책이라 의미가 깊다. 하지만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과 ‘롯데 자이언츠 우승’을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원하며 그게 더 좋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의 재판장으로서 명확한 논리와 법적인 해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그가 최근 첫 책 <호의에 대하여: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를 출간하며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골수 자이언츠 팬으로 알려진 사람다운 대답이다. 그런데 어쩌나. 그의 희망과 다르게 책은 출간 10일 만에 5만 부 이상이 판매돼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주요 인터넷 서점들 판매 1위를 기록 중이며, 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는 현재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이 책을 만든 김영사는 “책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를 표하며 긴급하게 5만 부를 추가로 제작한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인터넷 서점의 후기에는 책에 관한 감동을 적은 독자 글이 쏟아지고 있다.
“판사라는 직업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또한 삶의 주체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신 당신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회에서 등불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감사했습니다.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단단함과 올곧음을 마음 깊이 새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고 평범한 저 또한 노력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10부 더 구매했습니다.” 등 대부분 저자에 대한 감사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들이다.
문 재판관은 책 제목과 관련해 “사회로부터 내가 받은 호의를 다시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법은 정의를 말하지만, 삶은 호의를 요구한다”라고 덧붙였다. 가난 때문에 진학을 고민했고 김장하 선생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그가 사회에 이 호의를 갚겠다고 결심한 것과 같은 맥락인 듯 싶다. 그래서 재판관으로서 부패와 비리에 단호하게 맞서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분쟁을 협상과 조정으로 풀 수 있다면 그것이 모두가 이기는 길”이라는 그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으로 지친 한국 사회에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이다.
책은 짧고 유쾌한 글로 구성돼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재미가 있다. 문 재판관은 1998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2006년부터 지금까지 개인 블로그에 일기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했다. 시와 소설에 대한 감상, 법에 대한 철학, 법관으로서의 일상과 생활인으로서의 취미 등 그의 생각과 삶이 담겨 있다. 그렇게 쓴 1500여 편의 글 중 120편을 가려 모은 것이 <호의에 대하여: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이다.
독서광으로도 유명한 그답게 글쓰기와 문학에 관한 애정도 드러냈다. 그는 “판사는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는 직업이라 두렵다”면서 재판정에 선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므로 문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정의했다.
피고인에게 책을 종종 선물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07년 2월 7일 창원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자살하기 위해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가 붙잡혀 법정에 서게 된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만 연이어 외쳐보라는 이색적인 권고를 했다. 영문도 모른 피고인이 “자살, 자살, 자살…”하며 열 번을 외치자, 문형배 재판관은 그제야 “피고가 외친 ‘자살’이 우리에겐 ‘살자’로 들린다"라고 말했다. 이어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엄하게 꾸짖으면서, “‘자살’이 ‘살자’가 되는 것처럼, 때로는 죽으려고 하는 이유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라며 삶의 이유를 찾으라고 권했다. 이어 피고인에게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을 선물한 뒤, “그 책을 읽어 보고 난 뒤에나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출판 관계자는 “법정에서의 근엄한 인상과는 달리, 야구 이야기를 할 때 흥분하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좋아하며 유머를 즐기는 의외의 모습이 책 곳곳에서 느껴져 책의 매력을 더해준다”라는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