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인 욕심 때문에 앨범 발매가 미뤄졌어요. 나만의 생각에 갇혀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 같아요" 2012년 7월 정규 4집 'Supersonic' 이후 5년 5개월이 흘렀다. 그때는 가수 윤하(30)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을 만나기까지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성대결절, 우울증이 겹치면서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을 해온 윤하. 그래서 지난달 27일 발표한 정규 5집 'RescuE'는 그에게 다른 어떤 앨범보다 남다른 애착과 의미가 있다.
2007년 '비밀번호 486'을 부르던 열아홉 살의 소녀는 음악적,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채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윤하를 만나 그가 꿈꾸는 삶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여곡절 끝에 나온 정규 5집, "성과보다는 자아 찾기가 목표"
윤하는 이번 정규 5집 앨범의 작업을 3년 전부터 시작했다. 이후 수정과 재작업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며 예민한 작업을 이어왔다. 힘든 과정을 거쳐 나온 앨범인 만큼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창작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던 그에게는 새 앨범을 발매하고 활동을 재개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윤하는 "음악적 욕심 때문에 앨범 발매일이 자꾸 미뤄졌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모곡들을 다시 들어보니까 그렇게 나쁘지도 않더라"며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여러 가지 생각에 갇혀있었다. 우울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음악이 좋게 들리지 않았던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내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앨범이고, 애착도 많이 간다. 대성공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며 "다시 돌아가더라도 지금보다 더 잘하지는 못할 것 같다. 원래 작업하면서 내 음악을 들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많이 듣고 공감하려고 했다. 꽤 괜찮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정규 5집이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건 작업 과정들을 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수치적인 성과를 내고 궤도에 오르는 것보다 자아를 찾는 게 목표였거든요. 제가 원래 음원 차트에서 1위를 하는 가수도 아니고... 앞으로 음악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막혀있던 단계를 한번 배출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봤어요. 벌써부터 다음 앨범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만 그때그때 좋다고 느끼는 감정을 풀어내려고요"
■ 타이틀곡 'Parade', '대세 프로듀서' 그루비룸 손 거치다
싱어송라이터인 그가 선택한 타이틀곡 'Parade'는 공교롭게도 남성 2인조 프로듀싱 팀 그루비룸이 만들었다. 편안하고 트렌디한 멜로디의 이 곡은 사랑에 빠진 후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을 윤하 특유의 맑은 음색으로 표현해냈다. 앨범 발매에 앞서 공개된 '종이비행기'와 타이틀곡 후보로 경합을 펼치기도 했다. 총 열한 곡이 실린 앨범은 전체적으로 힙합 사운드에 기반을 뒀다.
"그루비룸은 한 트랙마다 색깔을 명확하게 정해놓고 거기에 맞춰서 가는 스타일이에요. 무채색에서 색감이 짙은 쪽으로 넘어오는 느낌과 밝은 분위기를 나타내고 싶었어요. '종이비행기'와 타이틀곡으로 경합을 벌였는데, 애초에 우리가 정해놓은 의미에는 'Parade'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봤어요"
윤하는 "곡의 배치나 선정은 대부분 그루비룸이 해줬다"며 "그들이 트랙 메이킹을 하면 내가 직접 가사와 주제, 전체적인 스케치를 입혔다. 요즘에는 그렇게들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생소한 작업이었다"고 떠올렸다.
또 "타이틀 곡 뿐만 아니라 모든 곡에 손이 많이 가서 그런지 전부 내 자식처럼 느껴진다. '종이비행기'는 멜로디만 열개 정도의 다른 버전으로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지겨워서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며 웃었다.
"전체적인 베이스는 흑인 음악이에요. 그루비룸이 아무래도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맞춰갔어요. 그 친구들이 생각하는 힙합과 내가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래도 트렌디한 장르를 계속 듣다보니 음악적으로 좀 더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너무 달라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만의 음색이 있으니까 중심만 잡아주면 어떤 방식으로 가도 크게 상관은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록 장르의 곡을 원하시는 팬들도 있는데, 밴드 음악은 사실 한국에서 하기에 가성비가 썩 좋지는 않아요. 저번에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을 갔을 때도 느꼈던 점이고요. 록 음악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계속 고민 하고 있어요. 어쨌든 록은 나의 뿌리가 되는 장르니까 완전히 놓을 수는 없죠"
■ 앨범 타이틀 'RescuE', "내가 구조 받는 과정 담아…혼자선 극복 못했을 것"
앨범 타이틀 'RescuE'는 '구조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윤하는 단어의 의미처럼 '내가 구조를 받는 과정을 담은 앨범'이라고 'RescuE'가 주는 메시지를 설명했다. 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우울하고 좋지 않았던 생각들을 떨쳐낸 '치유의 순간'이기도 하다.
"일기를 쓴다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표현했어요. 내가 어디까지 부정적이고 어두울 수 있는지 시험해 본 면도 있는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써내려가면서 나쁜 기억이나 우울한 생각들을 훌훌 떨쳐버리는 계기가 됐어요. 그러면서 내가 구조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죠. 삶에 힘이 필요한 분들은 이 앨범을 들으면서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그는 "그동안 어떻게든 혼자서 해보려고 하는 고집 같은 게 있었다.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 그런 루틴이 반복되면서 나를 옭아매고 지치게 했다"며 "이번에 내가 좀 할 줄 안다고, 똑똑하다고 해서 뭐든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공익광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 자주 생각났다"고 웃음을 보였다.
■ 성대결절-우울증, 여전히 극복하는 과정 "더 좋아지려고 노력"
정규 앨범은 오랜만에 냈지만, 윤하는 그동안 OST, 다른 가수와의 듀엣 작업, 라디오 DJ, 뮤지컬 등 빡빡하게 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던 도중 목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코막힘, 부비동염 등의 기능적 장애를 유발하는 비중격 만곡증을 앓으며 컨디션 난조에 빠졌다.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겹쳤다. 약에 의존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함께 어울리며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2013년쯤부터 4년 넘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었어요. 우울증, 공황장애 때문에 약을 복용했는데 성대 결절이 왔더라고요. 약을 끊고 수술 받은 후 재활을 6개월 넘게 하다 보니까 예전보다 좋아진 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 불안정한 기분이 드는 건 다들 비슷하다고 봐요. 사람들하고 지내면서 극복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는 "선배들한테도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타블로 오빠의 '일단 그냥 쉬어. 너는 너무 전전긍긍하면서 해'라는 피드백이 기억에 남았다"며 "그래서 쉬었더니 어느 날 TV를 보니까 오빠는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더라(웃음). 그 조언으로 인해 정말 많은 도움이 됐고,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찾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또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에 대해서도 "주변에 보니까 그런 친구들이 정말 많다"며 "책임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 어느덧 데뷔 14년차 "기적 같은 일, 이제 쉬지 않고 활동할 것"
2004년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윤하는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혜성','비밀번호 486','우리 헤어졌어요','기다리다','1,2,3' 등의 곡으로 사랑을 받았다. 가수 외에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의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지금까지 활동했던 날들을 '기적'이라고 칭하며 자신을 찾아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윤하는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어떤 기분이 드냐'는 질문에 감회가 젖은 듯 잠시 생각하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불안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린 적도 있었는데 어쨌든 무언가를 하면 반응이 오지 않냐"며 "누군가를 계속 찾아 준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이제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내 노력으로 돌려드리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음악 방송이나 별도의 프로모션 계획은 아직 없지만, 정규 5집을 기점으로 쉬지 않고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다른 일이나 취미 생활도 꾸려나가면서 건강하게 음악 하고 싶어요. 라디오나 연기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도전하고 싶고, 오디션도 적극적으로 보러 다닐 거에요. 대중에게 '저 조그만 친구가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네, 쟤도 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또 새 앨범을 들려드리려고 작업중이니 기대해주세요"
윤하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 인터뷰 초반 앨범이 이토록 오래 만에 나오게 된 이유를 묻자 다소 긴장한 듯 테이블만 바라보며 대답을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자연스럽고 차분하게 질문에 응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기자들을 향해서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한 것 같아서 걱정인데, 잘 써주실 거라 믿는다"고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나온 윤하의 삼십대는 어떤 음악으로 채워질지 궁금해진다.
사진=C9 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상록 기자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