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유행했던 신조어인 ‘헬조선’,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N포 세대’ ‘흙수저’ 등 취업난과 과도한 경쟁에 내몰린 암울한 청년들을 대변하는 용어도 이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죠. 그런데 10년이 더 지난 지금, 청년 세대는 한층 더 우울합니다. 구직자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취업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구직을 아예 포기한 사람이 역대 최대라고 합니다. 겨우 취직을 해도 문제입니다. 천정부지로 치솟아버린 집값 탓에 내 집 마련은 요원합니다. 일생일대의 목표가 아파트 마련이 된 나라는 확실히 비정상입니다. 전례 없는 저출생 통계는 한국이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진 나라가 됐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런 시기에 개봉한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부터 눈길을 확 끕니다. 지난해 열린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인 이 작품이 지난 28일 개봉했습니다. 청년 세대의 일원으로서 영화를 감상한 후기를 전해드립니다.
장건재 감독이 연출한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에 출간돼 인기를 끌었던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주인공은 20대 후반의 사회 초년생 계나(고아성)입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집에서 태어난 계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우울합니다. 인천에서 서울 강남까지 출근하는 데만 2시간씩 걸리고, 회사에서 하는 일들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스스로를 ‘한국에서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는 계나는 행복을 찾아 직장과 가족, 남자친구를 뒤로 하고 이민을 택합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다고 곧바로 낙원이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습니다. 영주권을 얻으려면 영어에 능통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 위해 새로운 학위도 필요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해야 합니다.
영화는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가며 계나의 삶을 비선형적으로 보여줍니다. 계나의 시선과 생각은 한국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청년을 대변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방황하고, 바꿀 수 없는 환경과 현실에 분노하거나 좌절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고, 새로운 출발을 상상합니다. 끝없는 경쟁을 종용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청춘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주제입니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기자의 또래가 모인 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울분 섞인 메시지가 올라옵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은 회사에서의 부당한 대우에 지쳐 수년간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영화 속 계나의 고민은 2030 세대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화는 한국의 부조리를 하나 하나 짚어내는 사회 고발 장르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국이 싫어서 이민까지 시도하는 청춘의 시선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합니다. 특별하게 극적인 갈등도, 대단한 성공 스토리도 없지만 공감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합니다. 계나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도 청년들이 마주하는 현실과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극 중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는 생각해 볼 만한 화두를 던집니다. 출신 배경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하고 계급화하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 특히나 따끔합니다. 또 행복이나 성공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는 대목 역시 생각을 자극합니다. 늘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고 버텨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자연스레 꼬집습니다.
다만 기승전결 구조가 뚜렷하지 않은 점은 호불호를 가를 요소입니다.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흐름이 지루하게 느껴질 관객도 있겠습니다. 뚜렷한 메시지가 없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는 의문을 표하는 관객도 적지 않습니다.
연출에서 일부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우선 담배를 피우면서 대화하는 장면이 너무 많습니다. 흡연 신이 꼭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 반복되니 관객 입장에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또 과거와 현재를 자주 넘나드는 편집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때때로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의 감정선에 깊이 이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고아성의 연기는 일품입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 속 자영처럼 주체적이고 자유 의지가 강한 캐릭터가 배우 고유의 개성과도 맞아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죠. 적어도 청년 세대의 현실과 고민을 선명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지난해 BIFF 당시 장건재 감독은 “무엇이 그녀(계나)를 계속해서 한국 사회에서 탈출하게 만드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과연 한국 사회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기반을 만들고 있는지, 기회는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질문하려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비수도권에 사는 시민에게 장 감독의 질문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계나가 ‘탈조선’을 시도하는 것처럼,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들의 ‘탈지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 감독의 질문에서 ‘한국 사회’를 ‘지방’으로 바꿔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계나처럼 막막한 심정이 드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