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빠진 한복? 오 마이~갓!

‘골동골동한 나날’ 책 낸 부산 출신 박영빈 씨
일상복으로 한복 입고 다니며 한복 열공 중
최근 오초량서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 강좌

조선 시대 선비들 한복의 완성은 갓과 갓끈
지름 60cm 넘는 큰 갓이 유행하던 시절도
바다거북 등껍질로 된 갓끈은 최고 사치품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2026-07-03 09:00:00

결혼할 때 맞춘 한복은 그 뒤 입은 기억이 별로 없다. 버릴지 고민하다, 장롱 어디 깊숙한 곳에 넣어 둔 것 같다. 다들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다가, 부산 감천문화마을과 서울 경복궁에 가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향에서 괄시받던 한복이 세계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전에는 화려한 여성 한복만 많이 찾았지만, 요즘엔 검은 두루마기와 갓으로 구성된 저승사자 복장이 인기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적인 흥행 이후 한복 패션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높아진 덕분이다.


우리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총 갓에 철릭 복장을 하고 한옥에 모여 ‘대모계’를 하고 있다. 김정준 제공 우리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총 갓에 철릭 복장을 하고 한옥에 모여 ‘대모계’를 하고 있다. 김정준 제공

SNS에 한복을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골동 오타쿠’ 로 2024년 <골동골동한 나날>을 펴낸 박영빈 씨였다. 유유상종이라고 취향 비슷한 사람끼리 한복 입고 한옥에 모여, 사진을 찍고 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박 씨는 부산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한복을 즐겨 입은 싹수 있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너는 사복이 없니?”라고 묻자 “한복도 사복인데…”라고 대답했다니 짐작이 된다. 지난달 24일 부산 동구 ‘오초량’에서 한복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요즘 보기 드문 이 청년이 나타났다. 이날도 어김없이 영화 ‘음란서생’에 나옴 직한 조선의 멋쟁이 선비 차림이었다. 한복, 우리 옷을 그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후회가 몰려들었다. 이날 이야기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에서 만난 조상들은 패션 감각이 요즘 사람은 저리 가라할 정도였다. 그를 따라 조선의 선비들을 만나러 떠났다.


박영빈 씨가 갓을 착용하고 있다. 박영빈 씨가 갓을 착용하고 있다.

한복은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오늘날 흔히 보는 현대 한복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형태여서 그렇다. 이전에는 소매 넓은 광수의(廣袖衣)가 일반적인 남성 예복이었다. 고종 때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으로 그 옷을 싹 갈아엎었다. 광수의는 폐지하고 양반 상민 가릴 것 없이 검은색 두루마기를 예복으로 정했다. 지금 보는 조끼와 마고자도 조선 말에 도입된 것이다. 조끼는 양복의 영향을 받았고, 마고자는 청나라 때 옷인 마과에서 유래했다. 마고자는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 주동자로 지목되어 청나라에 끌려간 뒤 귀국할 때 입고 온 후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현대 한복이 정립되었다. 한복 즐겨 입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천편일률적인 재미없는 한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 시대는 남성의 옷 종류가 여성보다 많았다. 주로 남성들만 밖으로 나다니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의복에 따라서 신분과 직책이 구분되었다. 대감(大監)과 영감(令監)은 당상관(정3품 이상) 이상에게만 붙이는 호칭이었고, 그들만 일상 업무복으로 분홍색 시복(時服)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아래 품계는 나리로 불렸고, 시복으로 청색과 녹색을 입다가 청색으로 통일되었다. 즉, 남자의 핑크는 내가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였다.


지난달 24일 오초량에서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이라는 주제로 박영빈 씨의 토크가 열리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초량에서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이라는 주제로 박영빈 씨의 토크가 열리고 있다.

한복은 겹겹이 껴입는 옷이었다. 겉옷인 포(袍) 안에 받침옷인 중의(中衣)를 입었다. 중의 없이 포만 입으면 옷 입는 태가 안 살았다. 중의가 양복의 어깨뽕처럼 옷의 각을 세워주기 때문이었다. 사대부들의 가장 일반적인 포가 도포였다. 도포(道袍)는 한자 대로 읽으면 도 닦는 옷이다. 이 도포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여, ‘한복은 바람의 옷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한복은 내의인 속바지(하의)와 속적삼(상의) 먼저 입고 바지와 저고리, 조끼 격인 배자, 버선과 발토시 같은 행전을 한 뒤 포까지 해야 완성되었다. 한여름에 이렇게 차려입기는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북촌한옥의 날에 모인 한량들. 본인 제공 북촌한옥의 날에 모인 한량들. 본인 제공

현대에 와서 가장 주목받는 도포는 철릭이다. 무관들이 주로 철릭을 입었다. 철릭은 고려 중후기 원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았다. 유목 민족의 옷에서 유래한 철릭은 저고리와 치마가 합쳐진 형태다. 철릭은 무관들의 받침옷이자 의례용 복식인 융복(戎服)으로 사용됐다. 요즘 철릭으로 원피스나 드레스를 많이 만들다 보니 여성복이라고 착각하지만, 원래가 남성복이다. 철릭에도 색깔을 구분하게 된 ‘웃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대신들은 모두 붉은색 화려한 철릭을 입고 피란길에 나섰다. 이 모습을 본 명나라 사신과 장수들이 조선은 위아래 질서가 없다고 비웃자, 그때부터 철릭의 색상을 엄격히 구분하기 시작했다. 왕만 붉은색을 입게 된 것이다. 철릭은 활이나 칼을 쓸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소매를 끊어 단추나 끈으로 연결한 실용적인 옷이었다.

옷을 다 입고 나면 머리를 꾸밀 차례다.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고, 남성 한복의 완성은 갓과 갓끈이었다. 갓은 눌러쓰지 않고, 가볍게 올려 쓴다. 사대부들은 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망건을 먼저 머리에 둘렀다. 그 뒤에 탕건과 갓의 순서로 머리에 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감투 썼다고 할 때 감투가 탕건이다. 탕건은 중국 당나라 사람들이 쓰던 모자인 당건(唐巾)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벼슬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모자였지만, 17~18세기부터는 갓을 쓸 때 그냥 같이 착용하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또 풍잠(風簪)이라는 비녀를 달아 바람이 불어도 갓이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했다. 사실 한복 착용은 ‘망건 쓰자 파장’이라는 속담이 나올 정도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오초량에서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이라는 주제로 박영빈 씨의 토크가 열리고 있다. 오초량에서 ‘조선 양반의 멋과 꾸밈’이라는 주제로 박영빈 씨의 토크가 열리고 있다.

갓은 말총과 대나무로 만든다. 조선은 중국에서 유행하는 모자를 죄다 말총으로 만들 정도로 말총을 잘 다뤘다. 갓은 클수록 품이 많이 들어 비쌌지만, 크기는 신분이 아니라 유행에 따라 달라졌다. 갓은 얼마나 촘촘하게 짜는가에 따라서 등급이 달라진다. 지름이 60cm가 넘는 큰 갓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갓이 걸려서 문을 넘어가지 못해 시종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정조는 허례허식이 지나치다고 판단해 갓의 크기를 대폭 줄이도록 규제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꾸미려는 욕구를 막기는 쉽지 않았다. 대한제국 때는 서양 복식이 들어오며 중절모처럼 작은 갓이 유행했다.

갓에서 나온 ‘트집 잡다’라는 말의 어원도 흥미롭다. 갓의 테두리를 둥글고 단단하게 다듬거나 접어서 고정하는 틈새가 트집이다. 이 트집이 틀어지면 갓이 예쁘지 않았다. 귀한 갓이 찢어지면 수선해서 썼는데, 수선 장인들이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갓의 미세한 틈이나 흠집을 크게 문제 삼았던 데서 유래가 되었다.


북촌한옥의 날에 한량들이 모였다. 본인 제공 북촌한옥의 날에 한량들이 모였다. 본인 제공

끈 없이 갓을 쓰면 바람에 날아가니 갓끈이 필수였다. 신분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갓끈을 사용했는데, 갓끈은 남성 사치품의 최고 끝판왕이었다. 비단 등 천으로 만든 갓끈을 포백영(布帛纓), 구슬로 만들면 주영(珠纓)이라고 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가공해 만든 대모(玳瑁)갓끈은 사치품으로 여겨져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대원군이 사치풍조를 막고 절약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며 대나무를 쪼개 만든 죽영(竹瓔)이 유행하기도 했다. 고종의 갓끈은 전체가 호박(琥珀)이었다. 그러니 조정 관리들의 뇌물 사건에는 어김없이 구슬갓끈이 등장했다. 최근 갓의 인기와 함께 가격이 너무 많이 올랐다. 몸통과 챙 모두 대나무 살에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입힌 최상급 진사립(眞絲笠) 갓은 현재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양반의 멋은 옷으로 끝나지 않았고, 장신구로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녔을까. 글이나 그림을 볼 때 침이 튀지 말도록 얼굴을 부채로 가리는 게 당시 예절이었다. 일반적으로 부채는 대나무 껍질을 얇게 켜서 붙인 합죽선(合竹扇)을 사용했다. 차면선(遮面扇)은 얼굴을 가리는 부채다. 기사환국 이후 대숙청이 일어나자, 사대부들이 서로를 꺼려 집에서 길을 나설 때 얼굴을 가렸다. 길에서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보이면 슬그머니 차면선을 꺼내 든 것이다. 남녀 내외할 때도 사용했다.

선추(扇錘)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부채의 고리나 자루에 달아 늘어뜨리던 매듭 장식이다. 관직에 올라야만 할 수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선추 소지 자격 또한 사라졌다. 화각선(華角扇)은 쇠뿔을 얇게 편 뒤 그림을 그려 만든 최고급 부채로 왕실에서 사용했다. 누가 봐도 명품이니 이런 부채는 뇌물로도 사용됐다.


박영빈 씨가 소장한 부채, 노리개, 안경 등 유물. 박영빈 씨가 소장한 부채, 노리개, 안경 등 유물.

돈 많이 드는 골동 취미가 뭐가 그리 좋을까. 박 씨는 골동 취미가 옛것을 이어서 사용하는 매력,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는 삶으로 이어진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아름다움을 곁에 두는 삶은 꽤 어렸을 때 시작된 모양이었다. 외국 무역선 선장까지 지낸 외할아버지, 역시 배를 탔던 아버지는 세계 각국에서 모은 기념품이나 소품을 유리문이 달린 찬장에 진열해 뒀단다. 그는 주로 중국 도자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도 차 도구와 향 관련 기물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고, 다음으로는 불교 유물이나 한복과 관련된 복식 및 생활 민속품을 모으고 있다.

한복 공부는 어떻게 할까. 전통 복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패션잡지나 다름없는 조선 시대 풍속화를 많이 참고한다고 했다. 이렇게 한복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니 사극 속 한복까지 새롭게 보인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인다는 그 말이 맞았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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