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부 이전한 동구 수정동 '낭만 맛집'이 반짝인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2026-02-13 07:00:00

부산 동구 수정동(水晶洞)은 조선 시대에 두모포였다. 두모포에 설치되었던 왜관이 이전하면서 고관 또는 구관(舊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관이라는 이름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수정동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에 처음 사용되었다. 맑은 샘이 솟아나는 곳, 혹은 수정산 일대에서 수정이 나와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며 수정동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설날을 앞두고 수정동을 오랫동안 지켜온 맛집들을 찾아가 그동안 쌓아둔 이야기를 들었다. 수정동 터줏대감들은 한결같이 잘 익어서 나는 향기가 흘러넘쳤다.


‘88수육’ 김석순 대표가 머릿고기 수육을 썰고 있다. ‘88수육’ 김석순 대표가 머릿고기 수육을 썰고 있다.

수정동에 자리 잡은 유일한 시장인 수정전통시장의 역사는 19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진역을 통해 전국 각지의 보따리상들이 모이면서 상권을 형성했다. 2005년 부산진역이 문을 닫으며 활력이 위축되었지만, 시장 곳곳에 다양한 음식점들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수정시장은 우선 머릿고기 수육을 파는 돼지국밥집 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저렴한 활어횟집도 많다는 특색이 있다. 숙이수육, 종합식육점, 거창수육, 88수육, 하동수육, 진주수육, 욱이수육, 수정수육, 손가네수육 등 수육집이 9곳이나 된다.

머릿고기는 돼지의 머리 부위에서 얻은 살코기다. 보통 돼지국밥, 순대국밥과 곁들여 먹거나 수육 형태로 즐긴다. 머릿고기는 부위별로 식감이 다양해서 마니아층이 두껍다. 돼지머리 하나에서도 여러 세부 부위가 나온다. 볼살은 쫄깃 담백하고, 항정살(뒷덜미)은 기름지고 고소하다. 콧살과 귀 살에는 연골이 포함되어 씹는 재미가 있다. 식감이 부드러운 혀에서는 독특한 풍미가 난다.


돼지 머릿고기와 뼈를 같이 삶아 돼지국밥 국물이 고소하다. 돼지 머릿고기와 뼈를 같이 삶아 돼지국밥 국물이 고소하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가게가 수육 배달만 하고 이제는 돼지국밥 식당 장사를 접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식당을 이어가고 있는 ‘88수육’에 들어가 봤다. 마침 노부부 손님이 식사 중인데 꼭꼭 씹어먹으라며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머릿고기 돼지국밥을 찾아 송도에서 ‘역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단다. 8000원짜리 돼지국밥에 든 고기양이 엄청나다. 예전 시골 장터에서 이같은 투박한 스타일의 돼지국밥을 먹었을 것 같다. 허름하고 테이블도 3개뿐이지만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명인들도 많이 다녀갔다. 1989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37년째다. 김석순 대표는 “돼지 머릿고기하고 뼈하고 같이 삶아서 내는 국물 자체가 고소하다. 우리 집과 비교하면 뼈만 삶는 일반 돼지국밥 국물은 싱겁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해풍횟집’의 박성태 대표는 요리 경력이 45년에 달한다. ‘해풍횟집’의 박성태 대표는 요리 경력이 45년에 달한다.

수정시장에는 천일횟집, 틈새횟집, 동해횟집, 해풍횟집, 물금횟집, 큰바다횟집 등 횟집이 6곳이나 된다. 한결같이 가성비와 푸짐한 양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 수정동에 자리 잡은 지 25년째의 ‘해풍횟집’은 여름에는 물회, 겨울에는 우럭탕으로도 이름이 났다. 박성태 대표는 고등학교 때 일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시작한 요리 경력이 45년에 달한다. 언양에서 태어났지만 20년 넘게 장사한 수정동이 고향보다 더 친숙한 곳이 되었다고 했다.


별미인 겨울 물회는 지리탕과 잘 어울린다. 별미인 겨울 물회는 지리탕과 잘 어울린다.

물회는 여름에만 먹는다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따뜻한 실내에서 먹는 겨울 물회는 별미였다. 곁들여 나온 지리탕은 얼마나 진하고 감칠맛이 좋은지 모른다. 고춧가루 푼 매운탕은 텁텁한 맛이 나서 물회와는 덜 어울린다. 박 대표의 칼솜씨가 좋은 건 일찍부터 알았지만, 손님을 대하는 마음은 이날 처음 듣게 됐다. 그는 어느 날 “그동안 손님 덕분에 먹고 살았다. 비록 허름하고 가게도 작지만 찾아오는 우리 손님들에게 최고로 맛있게 대접하자”라고 각성했단다. 또 박 대표는 자신의 흰머리를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고 했다. 요리사가 깨끗해야 손님들도 기분 좋다는 배려의 마음이었다.

요즘 부산을 대표하는 양대 음식이 돼지국밥과 함께 밀면이다. 수정동 일대에서는 가장 전통이 있었던 수정밀면이 폐업하고, 장수밀면도 업주가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 그 사이에 막내 격이었던 ‘진역밀면’이 수정동의 밀면 대표 주자로 올라섰다. 진역밀면이 수정동에 자리 잡은 지는 만 6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호텔 요리사 출신의 김희관 대표는 횟집과 이자카야 경력까지 포함하면 수정동에서 16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횟집은 장사가 잘되었는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며 박살이 나버렸단다. 그 뒤에 시작한 이자카야도 괜찮았는데 김 대표 아들의 요리 고등학교 진학이 업종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진역밀면’의 김희관 대표는 단무지만 빼고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 ‘진역밀면’의 김희관 대표는 단무지만 빼고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

자식에게 술집을 물려줄 수 없다는 고집으로 찾은 아이템이 밀면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겨울이 짧아지니 밀면으로 정면 승부를 걸어도 앞으로는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진역밀면이라는 상호의 영향인지 몰라도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칼국수보다 밀면이 더 많이 나간다. 김 대표는 “만두피, 만두소, 칼국수면, 밀면 등 단무지만 빼고 여기서 직접 다 만든다는 게 장점이다”라고 말했다. 잠깐 둘러본 주방은 호텔 요리사 출신이 일하는 공간답게 넓고 깨끗했다. 진역밀면은 쫄깃한 면발과 감칠맛 나는 육수, 매콤달콤한 양념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평가가 많다.

수정동에는 만두 마니아라면 반드시 찾아가야 하는 만두의 성지가 있다. 33년 전통의 ‘명당만두’다. 경남여중·경남여고에 다니며 만두를 즐겨 먹던 소녀 단골들은 성인이 되어 명절에 고향에 왔다가 지금도 명당만두가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단다. 남편 백형진 대표는 만두피만 빚고, 아내 김귀심 씨는 만두소만 만든다. 대한민국 어디 가도 만두피에 대해서만큼은 자부심을 가진다는 백 대표의 손바닥에는 두터운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혀있다. 아내 김 씨가 몸이 아프기라도 하면 아예 가게 문을 닫는다.


‘명당만두’ 백형진 대표는 매일 아침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명당만두’ 백형진 대표는 매일 아침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백 대표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가게 초창기에 부부는 많이 싸웠다고 했다. 반죽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날에는 백 대표는 쓰레기통에 반죽을 갖다 버리고 장사를 쉬었다. 어느 날 김 씨가 아깝다고 반죽을 다시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성격이 유별나다는 백 대표가 반죽에 연탄째를 섞어서 다시 갖다 버렸단다. 백 대표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6시에 가게에 나와 정화수 떠 놓고 촛불 켜서 기도를 드린다. “어제 하루도 잘 살았고 오늘 하루도 고맙게 잘 살겠다고….” 명당만두의 만두를 집어 먹다, ‘음식은 정성’이란 말을 실감했다. 백 대표는 13년째 수정전통시장 상인회 회장도 맡고 있다.


4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할매곱창’. 4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할매곱창’.

‘SINCE 1983.’ 수정동에는 동구청이 인정한 4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할매곱창’이 있다. 경남여고 밑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다 지난해에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깔끔해져서 보기는 좋은데 노포 감성이 사라져 살짝 아쉽다. 오랜 단골 중에는 옛날의 안방이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겨울에 온돌방에 앉아 뜨끈한 곱창전골과 소주 한잔하는 맛이 있었다. 특히 부산일보 기자들이 애용하는 식당으로 한 중앙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오래 가는 비결은 역시나 재료에 있는 것 같다. 곱창은 국내산을 쓰고, 집에서 직접 짠 참기름으로 음식을 만든다. 전골이지만 짜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다. 가게에는 여러 연예인의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다. 영화배우 허성태가 이 집 사위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문이다. 할매곱창에서 20년 넘게 도와준 이수일 대표의 친구 딸이 허성태의 부인이다.


‘북경’의 탕수육은 ‘겉바속촉’ 그 자체였다. ‘북경’의 탕수육은 ‘겉바속촉’ 그 자체였다.

수정동에는 올해로 40년이 되어가는 중국집 ‘북경’도 빼놓을 수 없다. 오랜만에 북경에 들러 탕수육과 이과두주를 시켰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탕수육은 ‘겉바속촉’ 그 자체였다. 이과두주는 도수가 높으면서도 저렴해 중국에서는 서민의 술로 불린다. 이과두주를 처음 배운 곳이 수정동 ‘북경’이었다. 화교였던 이전 사장님은 해마를 넣은 해마주도 담가 맛을 보여주곤 했다. 90년대에 서빙하던 청년이 지금의 왕극량 대표다. 어느새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2층 방에 죽치고 앉아 카드 돌리던 선배 중에는 이제 세상에 없는 분도 계신다. 오랜만에 찾은 북경에서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부산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부산의 중국집에서는 간짜장에 계란 후라이도 올려준다. 새로 개발한 2만 5000원 실속 코스가 반응이 좋다고 한다.


2대째 가업을 이은 ‘북경’의 왕극량 대표. 2대째 가업을 이은 ‘북경’의 왕극량 대표.

소개는 맨 뒤로 밀렸지만, 수정동의 손맛 하면 남해 출신의 ‘수미식당’ 이순자 대표를 첫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점심에는 미역국 순두부 시락국 등을 파는 밥집이다. 조물조물 무쳐낸 반찬이 하나같이 맛깔나다. 저녁에는 생선회를 비롯한 해산물 위주의 안주로 부담 없이 한잔하기에 좋은 선술집으로 변신한다.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이자, 부산이 아직 낯선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집이다. 일전에 언론인 출신 소설가 선배가 수미식당을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모신 적이 있었다. 흥이 돋은 이 선배가 갑자기 노래를 시작했는데 노래도 잘 불렀지만, 사장님의 젓가락 장단이 아주 일품이었다. 부산의 축소판, 수정동은 부산의 낭만이 강처럼 흐르는 곳이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수미식당’ 이순자 대표는 수정동 최고의 손맛을 자랑한다. ‘수미식당’ 이순자 대표는 수정동 최고의 손맛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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