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6-10-14 13:40:43
김유경 작가의 '주름진 밤' 파트를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 궁 3층 전경. '주름진 밤'은 식민과 냉전의 영향 아래 끊임없이 변모해 온 땅을 탐색한 시리즈이다. 김은영 기자
갤러리 궁 2층 '곶' 파트에 전시 중인 '곶'(2026)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유경 작가. ‘곶’은 장소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 시리즈이다. 김은영 기자
지난달 10일 오후 경남 창원상공회의소 ‘멀티비즈니스랩’. 제11회 메디치상 작품 선정식에서 김유경은 2014년부터 2026년까지 이어온 작업을 약 20분간 발표했다. 총 18명의 출품작 가운데 최종 심사를 받는 세 명의 자리였고, 발표와 투표, 집계를 거쳐 결과는 현장에서 공개됐다.
“심장이 쫄깃쫄깃하긴 했어요.”
김유경은 제11회 메디치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부산·울산·경남에서 활동하는 전업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이 상은 상금 1000만 원과 전시 기회를 준다. 지역에서 작업하며 느꼈던 조급함 속에서, 이번 수상은 작업을 지속할 힘이 됐다.
“지역에 있으면 뭔가 조급하잖아요. 내가 안 알려지는 것 같고 기회도 많이 없는 것 같고요. 오히려 상도 받고, 두 달 동안 제가 좋아하는 전시 공간에서 길게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운이 좋은 거죠.”
이 소식은 현재 부산 해운대구 갤러리 궁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과 자연스럽게 잇닿아 있다. 오는 25일까지 열리는 ‘가물 玄(Unseen)’이 메디치 심사에 출품됐던 ‘주름진 밤’과 ‘곶’을 중심으로 회화와 설치, 드로잉, 영상을 아울러 보이지 않는 시간과 존재의 층위를 조명하기 때문이다.
갤러리 궁 3층 '주름진 밤' 파트에 전시 중인 김유경의 '주름진 밤'(2025-2026) 가변설치 작품. 김은영 기자
■검은색 너머의 풍경
‘현’(玄)이 검은색을 뜻한다고 알려졌지만, 작가는 그렇게 단순히 읽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실 동양에서는 ‘현’ 자가 단순히 검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고, 여러 색을 함축하는, 하늘에서 더 나가면 우주잖아요. 그래서 우주를 뜻하는 ‘현’ 자가 됩니다.”
이번 전시에서 ‘玄’은 깊고 멀어 검게 보이는 상태이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맞닿는 경계와 문턱으로 풀이된다. 작가는 이 단어를 ‘가물가물하다’는 말의 감각과 연결하며, 선명한 형상보다 시간 속에 스며든 기운과 흔적에 주목한다.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존재다. 영어 제목 ‘언신’(Unseen)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풍경 구상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 너머에 어떤 걸 얘기하고 싶어서 이렇게 붙였어요.”
갤러리 궁 2층 '곶' 파트에 전시 중인 김유경의 '곶'(2026) 작품. 김은영 기자
갤러리 궁 3층 '주름진 밤' 파트에 전시 중인 김유경의 '나의 타히티는 버닝한다'(2025-2026) 작품. 김은영 기자
■2층과 3층, 낮과 밤
전시장 동선이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열쇠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2층에는 ‘곶’, 어두운 3층에는 검은 회화와 신작 영상이 놓였다.
“이번에는 아예 콘셉트에 맞게 어두운 데서 한 번 보여주자 해서 이렇게 됐어요.”
‘곶’은 고향 부산의 개인적 기억에서 출발했다. 어린 시절의 해안은 매립되어 땅이 됐고, 낯설게 변한 곳에서 오래된 숲을 마주하며 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생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 골자다. 답사의 흔적은 황령산, 다대포, 가덕도까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제목에 지명을 넣지 않는다.
“다른 차원으로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장소로 열어두고 싶어서. 저는 이 장소에 제목을 넣지는 않아요.”
작업 방식도 재료에 대한 물음과 함께 흘러왔다. 한지 대신 펠트 천을 택하고, 먹이 스며들어 짙은 검정이 나오지 않자 콩테와 오일 파스텔 같은 건식 재료를 겹겹이 쌓는다. 색을 쓰지 않는 것도, 색이 없어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3층에는 김진국 감독과 함께 만든 신작 영상(티저 1분, 본편 5분)이 검은 회화와 나란히 놓였다. 회화와 영상을 한 방에 둔 이유는 시간에 대한 생각에서 나왔다. 작가는 과거·현재·미래가 딱딱 나뉜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셋이 혼재하는 비선형적 시간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같은 나무를 여러 번 그린 형상이 반복되며 나타난다. ‘주름진 밤’은 식민과 냉전의 흔적이 중첩된 땅을 오래 답사하며 형성한 시선에서 비롯됐고, 이 제목에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시간의 의미도 담았다고 설명한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 뭘 그렸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구성 자체를 조금 중요하게 생각해요.”
갤러리 궁 2층 '곶' 파트에 전시 중인 '표류하는 입과 암초'(2026)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유경 작가. 김은영 기자
갤러리 궁 2층 '곶' 파트에 전시 중인 김유경의 '표류하는 입과 암초'(2026) 작품. 갤러리 궁 제공
■부산으로 돌아오기
김유경은 부산에서 태어나 이과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미술은 몰래 학원에서 익혔다. 반수를 거쳐 홍익대 동양화과에 진학해 석·박사까지 마쳤고, 서울과 울산을 거쳐 2024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해 감만창의문화촌에 입주해 3년간 쓸 작업 공간을 확보했고, 이번 전시의 작업 대부분은 감만동에서 나왔다.
“작업실을 계속 옮기면 이런 작업이 안 나왔을 건데, 긴 시간 동안 있으니까요.”
감만창의문화촌 주변의 재개발로 풍경이 지워지는 걸 보는 것도 오히려 좋았다고 했다. 소멸돼 사라지는 것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개인 작업과 더불어 지역 예술가들과의 협업, 지역에 관련된 이야기로 작업을 만드는 일을 함께 이어간다. 그것이 다시 개인 작업의 원동력이 된다.
‘가물 玄(Unseen)’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일방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너무 깊고 오래돼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세계 앞에 가만히 머물게 하는 전시다. 작가는 작품 안의 여백만큼 작품 밖의 빈 공간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가 사라지는 풍경에서 찾는 것은 소멸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생명의 흔적이다. 메디치상 수상은 이 탐색을 이어갈 동력이 됐다. 11월에는 서울 학고재에서 수상 기념전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