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로버트는 얼마나 좋았을까?”
전설적인 MBC 예능 ‘무한도전’에는 역시 없는게 없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올해 개봉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인터넷에선 무한도전 방송에서 큰 웃음을 낳았던 오펜하이머 평전 독후감 내용이 화제가 됐습니다. 당시 무한도전 멤버 하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읽은 뒤 오펜하이머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것 등을 두고 “얼마나 좋았을까?”를 연발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독후감 분량을 채우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이름을 반복해 적은 덕에 시청자들은 오펜하이머의 ‘풀네임’을 외우게 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 ‘오펜하이머’는 지난 15일 개봉 직후 흥행 중입니다.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데, 직접 관람한 기자가 후기를 전해드립니다.
오펜하이머와 같은 날 개봉한 ‘보호자’는 정우성 주연의 액션 영화입니다. 정우성이 직접 연출까지 맡아 화제가 됐는데, 관객 평가는 냉정합니다.
영화의 신 놀란이 재현한 죽음의 신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제목 그대로 천재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진행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1943년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대규모 연구단지를 짓고 미국과 영국의 유능한 과학자들을 모아 진행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1945년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폭발 시험인 ‘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했고, 이후 원폭이 각각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일본군의 투항을 이끌어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일약 세계적인 영웅이 됐지만,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참상을 빚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원폭보다 위력이 강한 수소폭탄 개발에는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오던 세력이 오펜하이머를 소련과 내통한 스파이로 몰아갑니다. 영화는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오펜하이머의 삶을 180분의 러닝타임에 압축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인셉션’(2010)이나 ‘인터스텔라’(2014) 등 놀란 감독의 전작들처럼 장엄한 분위기의 영상미를 보여주진 않습니다. 전기 영화인 만큼, 오펜하이머라는 천재가 짊어져야 했던 중압감과 책임감 등 심리 묘사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의 오펜하이머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바탕으로 고증도 철저히 했습니다.
영화는 놀란 감독 작품답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고, 오펜하이머와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 두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에 그를 시기하고 끌어내리려 했던 미국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의장 스토로스의 입장에서 바라본 오펜하이머의 과거가 더해집니다. 오펜하이머의 기억은 컬러로, 스트로스의 기억은 흑백 영상으로 구분했습니다. 두 사람의 기억 모두 각자의 청문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템포가 빠르고,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를 중심으로 시점이 왔다 갔다 하는 탓에 집중하고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특히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데다 각 인물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수준이라 관객 입장에선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세세한 장면이나 인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전체 스토리를 파악하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핵분열과 핵융합 등 과학적 지식이 없어도 됩니다. 전작인 ‘테넷’(2020)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영화입니다.
문과 출신인 기자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잘 알려진 천문학박사 유튜버 ‘궤도’의 설명이 담긴 영상을 미리 보고 간 것이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예컨대 오페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진 태트록은 실제로 숨졌을 당시 사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었는데, 영화에선 특정한 설에 힘을 주는 장면이 잠깐 스쳐 지나갑니다. 궤도의 유튜브 영상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그냥 놓치고 지나쳤을 장면입니다. 또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과학자 중 주요한 인물에 대한 설명을 본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김상욱 물리학 교수 등이 놀란 감독과 직접 대담한 tvN예능 ‘알쓸별잡’을 미리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영상을 볼 시간이 없을 독자를 위해 사전 지식 겸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유태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하버드와 케임브리지 등 명문대를 거쳐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됩니다. 오펜하이머는 ‘수학’에는 약하면서도 천문학, 화학,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까지 여러 분야의 과학에 통달한 천재의 면모를 보입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2차 대전 직전 발발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에 기부금을 보내는가 하면, 공산주의자나 좌익 사상가들과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그러다 1936년 심리학자이자 공산당원인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을 만나 두 차례나 청혼했지만 거절당했고, 식물학을 공부하던 캐서린 퓨닝(에밀리 블런트)과 결혼합니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크게 달라집니다. 당시 과학계는 이미 핵분열을 통한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치가 독일 내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동원하면 원자폭탄이 개발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해달라는 군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프로젝트 도중 보안을 이유로 여러 제약을 가하는 군 당국이나 의견이 다른 일부 과학자들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리더십을 발휘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합니다. 나치는 이미 투항한 뒤였지만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에 원폭을 투하해 전쟁이 끝납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일약 스타가 된 오펜하이머는 1947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습니다. 그러나 원폭보다 위력이 강한 수소폭탄을 비롯한 핵 개발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그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늘어납니다. 오펜하이머에게 수모를 당했던 원자력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그중 한 명입니다.
오펜하이머 개봉일인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며 대뜸 ‘반공’을 강조했는데요. 오펜하이머도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로 내몰립니다. 1954년엔 비공개 졸속 청문회가 열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부 과학자까지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진 태트록과 내연 관계가 까발려지는 등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심한 굴욕을 당합니다. 원자력위원회는 오펜하이머가 스파이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의 보안 인가는 박탈했습니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그야말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입니다. 그리스어로 ‘선지자’라는 뜻의 신화 속 인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몰래 전해줬다가 끔찍한 형벌을 받습니다.
오펜하이머도 2차 세계대전 종식과 전쟁 억제력을 갖춘 원자폭탄을 인류에 안겨주고 명성을 얻었지만, 그로 인해 죄책감과 스파이 혐의 등에 시달리며 삶이 망가졌습니다.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2017) 핵심 메시지가 ‘조국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였다면, ‘오펜하이머’는 조국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과학자의 이야기입니다.
만일 ‘인터스텔라’처럼 눈을 황홀하게 하는 볼거리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오펜하이머’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영상이나 컴퓨터 그래픽(CG)보다는 천재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감정 표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내면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표정 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킬리언 머피는 감정을 극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다면적인 감정 연기를 보여줍니다. 놀란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은 감정 연기를 극대화시킵니다. “미국을 위해 희생했는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라든지, “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와 같은 촌스러운 대사는 당연히 없습니다. 오펜하이머가 고뇌하는 모습과 핵이 분열하는 듯한 장면이 교차되고,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초점을 잃은 얼굴을 클로즈업해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특히 사운드를 활용한 연출이 두드러집니다. 트리니티 테스트 성공 후 오펜하이머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청중이 발을 구르는 소리와 정적의 대비를 통해 ‘죽음의 신’이 된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에선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CG 없이 재현해냈다는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이 고글을 쓴 뒤 사막 한 가운데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새하얘질 정도로 엄청난 광량이 뿜어져 나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이내 충격파가 도달해 일대가 소란해집니다. 핵실험이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을 나지막이 내뱉습니다.
기자는 아이맥스(IMAX) 포맷으로 관람했는데, 확실히 몰입감이 대단했습니다. IMAX가 아니라면 사운드 특화관에서라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놀란 감독과 제작진은 이번 작품을 위해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65mm ‘흑백 IMAX 필름’을 직접 제작해 촬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화려한 배우진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확실합니다. 미 육군 장교이자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 역의 에밀리 블런트,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웬만한 영화 주연급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집니다. 여러모로 ‘오펜하이머’는 N차 관람하기 좋은 영화입니다. 배경지식이 늘어날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장면이 많을 겁니다. 옥에 티가 있다면, 자막의 맞춤법 오류입니다. ‘간(間)’은 ‘동안’의 뜻을 나타낼 때는 ‘이틀간’처럼 접미사로 붙여 써야 하는데, 영화에는 ‘이틀 간’처럼 띄어 쓴 자막이 여러 차례 나왔습니다.
관객의 평가가 갈릴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상업영화의 간결한 기승전결 구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심리 묘사와 고증을 중심으로 한 서사와 연출이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일부 관객은 기대와 달리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선정성은 확실히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합니다. 여성의 상체 등이 그대로 노출된 정사 장면이 그동안 적용했던 ‘15세 관람가’ 기준에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영화 초반 오펜하이머와 진 태트록의 정사 장면에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이 낭독된 것을 두고 인도 현지에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다만, 노골적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 흐름상 필요했던 장면들로 보인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삶과 그의 이야기를 보면 그의 성적인 면모, 여성과의 관계는 그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고, 킬리언 머피 역시 “의도적이며 불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라고 밝혔습니다.
기자는 ‘오펜하이머’의 플롯 자체가 핵폭탄 같다는 일부 관객의 평가에 공감이 갑니다. 영화 초반부는 핵분열을 하는 듯 불안하고 긴장되며, 맨해튼 프로젝트 끝에 트리니티 테스트를 성공했을 때는 핵이 폭발하는 듯 감정이 분출되지만, 핵폭발 이후 닥치는 후폭풍처럼 오펜하이머는 뼈아픈 괴로움을 겪습니다.
정우성 연출·주연작 ‘보호자’…액션 돋보이지만 아쉬움도
“약간 ‘아저씨’ 느낌도 난다.”
영화 ‘보호자’를 보고 난 뒤 극장을 나서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관객 두 명이 서로 나누는 후기가 들립니다. 기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호자’는 살인죄로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폭력조직원 수혁(정우성)이 납치된 딸을 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출소 직후 옛 연인을 찾아간 수혁은 자신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직의 두목 응국(박성웅)을 찾아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수혁은 복역한 대가로 응국이 건넨 거액의 돈도 마다하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이에 응국은 2인자인 성준(김준한)에게 수혁을 감시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준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세탁기’라 불리는 살인청부업자 우진(김남길)과 진아(박유나)에게 수혁을 살해하라고 지시합니다. 세탁기 2인조는 수혁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수혁의 딸을 납치하고, 수혁은 딸을 구하기 위해 홀로 조직을 상대합니다.
영화는 성인 남성이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범죄조직을 상대한다는 설정부터 원빈 주연의 영화 ‘아저씨’(2010)를 닮았습니다. 납치된 딸을 구하러 나선 아빠 이야기, 조직폭력배가 조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고 발버둥친다는 이야기도 무수히 양산된 것으로 새로울 게 없습니다. 정우성은 지난 10일 온라인 간담회에서 익숙한 설정과 스토리의 영화를 만든 것과 관련해 “‘클리셰’(상투적인 것)인 스토리를 가지고 연출을 한다는 건 큰 도전이었다”며 “제가 저다운 시선으로, 저다운 고민으로 완성한다면 이 도전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의 차별점은 화려한 액션씬에 있습니다. 수혁이 불 꺼진 밀실에서 손전등과 칼 한 자루로 조직원들을 상대하는 극 초반의 액션은 긴박감이 넘치고 화려합니다.
수혁이 BMW 세단과 늘 함께한다는 콘셉트도 흥미롭습니다. 조직이 세운 빌딩을 깨부수고 추격씬을 벌이는 등 다수의 액션에 자동차가 동원됩니다. 물론 이 콘셉트 역시 ‘분노의 질주’나 ‘트랜스포터’ 시리즈 등으로 이미 인기를 끌었던 겁니다.
‘보호자’의 서사 구조는 여타 팝콘 무비들처럼 단순하고 익숙해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의 설정들도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합니다. ‘카이저 그룹’이라는 기업으로 성장한 폭력조직은 영화 ‘신세계’(2013) 속 ‘골드문’을 연상시키는데, 하필 신세계에서 ‘이중구’ 역을 맡았던 박성웅이 보스로 등장하니 더욱 기시감이 듭니다.
2인조 킬러인 ‘세탁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쏟아내는 망나니 우진은 ‘다크나이트’ 속 빌런인 ‘조커’를 연상케 합니다. 사제 폭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맨몸 액션에선 그리 강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조커와 비슷합니다. 우진은 조커처럼 나름의 아픈 과거도 있는데, 그 사연을 제거 대상인 수혁에게 뜬금없이 털어놓기도 합니다. 영상으로 보여줘도 이입이 될까 말까 한 이야기인데, 대사로만 늘어놓으니 감정이입이 쉽게 되진 않습니다. 우진이 조커처럼 보여서인지, 함께 다니는 여성 킬러 진아 역시 조커의 여자친구인 ‘할리퀸’ 캐릭터 같습니다. 이들이 폭발물을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경찰에 검거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사실 비현실적입니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캐릭터는 ‘세탁기’뿐만이 아닙니다. 수혁과 옛 연인의 스토리를 포함한 핵심 서사가 과감하게 생략돼 캐릭터에 좀처럼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옛 연인이 출소한 뒤 찾아온 정우성에게 10년간 숨겨온 딸의 존재를 알리는 것부터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정우성은 딸을 보고 갑자기 눈물을 훔칩니다. 배우들의 표정은 너무 심각한데 관객은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니 감정을 이입할 틈이 없습니다.
일부 액션 장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수혁이 몰던 BMW 세단은 고속으로 달리다가 SUV 차량에 측면을 치이는데, 충격이 아주 커 보이는데도 측면 문짝이 약간 찌그러지고 창문이 깨지는 수준에 그칩니다. 운전대를 잡은 수혁도, 차량 내부도 멀쩡합니다. 이 장면 외에도 SUV 차량이 적재적소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상대의 차를 들이받는 씬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수혁과 세탁기 2인조가 벌이는 자동차 추격씬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역주행을 하는 등 제법 아찔합니다. 다만 얼마 전 ‘미션임파서블7’에서 격렬한 카체이싱을 본 관객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속도감이 떨어져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관객의 평가도 냉정합니다. 18일 현재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는 72%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도 감독으로서 정우성의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특히 장편 데뷔작인데도 일부 액션 연출은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정우성은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정우성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받은 지적들을 밑거름 삼아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