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기대를 넘는 ‘소년들’과 기대보다 못한 ‘여도둑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2023-11-03 15:30:49

경찰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을 하고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한 남자.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렸던 윤성여 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1999년 전북 완주군 한 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됐던 소년들 이야기입니다. 수사기관의 조작으로 청춘을 날린 남자는 무려 세 명.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소년들’이 지난 1일 개봉해 관람했습니다.

같은 날 넷플릭스에도 몇몇 영화들이 업로드됐는데, 기자는 하이스트 무비(범죄자들이 모여 무언가를 강탈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영화)인 ‘여도둑들’에 관심이 가 감상해봤습니다.


영화 ‘소년들’과 ‘여도둑들’. CJ ENM·넷플릭스 제공 영화 ‘소년들’과 ‘여도둑들’. CJ ENM·넷플릭스 제공

‘재심’과는 다른 재심 영화 ‘소년들’


“재미없을 것 같다. 재미없으면 나가자.”

1일 오후 ‘소년들’을 보러 갔을 때 기자 옆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나눈 대화입니다. 사실 기자도 이 영화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큰 관심이 없었고, 2017년 개봉한 영화 ‘재심’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옆자리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고, 기자도 깊이 몰입한 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영화는 1999년 2월 6일 새벽 발생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다룹니다. 당시 3인조 강도는 가게 안에 있던 70대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 3명의 눈과 입을 테이프로 막고 금품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이 과정에서 숨이 막힌 할머니가 질식사했습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9일 만에 인근에 살던 19~20세 청년 3명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상고심 끝에 징역 3~6년 형이 선고됐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해 허위자백을 한 것이었고, 만기 출소한 3명은 2015년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영화는 이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관객의 몰입을 돕기 위해 상당 부분 각색을 거쳤습니다. 주인공이자 열혈 경찰인 황준철(설경구)부터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실제로 재심을 주도한 인물은 박 변호사였습니다.

극중 황준철은 ‘미친개’로 불리는 불도저 같은 경찰입니다. 한번 문 나쁜 놈은 절대 놓아주지 않는 그는 완주경찰서 수사반장으로 부임한 뒤 ‘우리슈퍼 사건 진범을 알고 있다’는 제보 전화를 받습니다. ‘우리슈퍼’는 ‘나라슈퍼’의 이름을 바꾼 겁니다.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이미 1년 전 수사가 종결된 사건이지만, 준철은 제보자를 만난 뒤 사건을 캐기 시작하고 이내 이상한 점들을 발견합니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들이 앞뒤가 맞지 않고, 아무리 봐도 소년들은 범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교도소까지 찾아가 소년들을 만난 준철은 경찰이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폭행과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준철은 무고한 소년들을 구해보려 애쓰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한 트라우마에 휩싸인 소년들은 잔뜩 겁을 먹어 위축됐고, 숨진 할머니의 딸도 ‘지긋지긋하다’며 준철의 얼굴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소년들을 잡아넣었던 경찰대 출신 엘리트 최우성(유준상)과 그 똘마니들이 ‘빌런’입니다. 서장의 신임을 받는 우성은 ‘다 지난 사건을 들쑤시지 말라’며 준철을 압박합니다. ‘미친개’ 준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사를 이어가 진범들을 찾아냈지만, 검찰까지 방해공작을 펼치자 좌절합니다.

시간이 흘러 16년이 지났고, 소년들은 재심을 청구합니다. 그러나 이번엔 준철이 소극적입니다. 이 사건으로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준철은 진급이 막혔지만, 우성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무엇보다 소년들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진범의 진술을 받아낼 길이 요원합니다.

영화는 자칫 뻔할 수 있는 재심 영화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1999년과 준철의 수사가 진행된 2000년, 재심이 열린 2016년을 오가는 편집으로 지루함을 덜어냈습니다. 극의 초반에는 등장인물 간 관계를 비롯해 의아한 대목들이 있는데, 중반부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000년 당시 한적한 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장면들은 꽤나 디테일해 향수를 부를 법합니다.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전체적인 플롯(흐름)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소년들과 설경구 측에 이입할 수 있도록 감정선을 끌고 가는 완급조절이 훌륭합니다.

준철과 우성의 대결구도 역시 흥미를 더합니다. 경찰 중에서도 ‘갑’인 우성이 국가권력을 대변한다면, 준철은 그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힘없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합니다. 관객들은 강인해 보이지만 나약한 면도 있는 인간적인 캐릭터인 우성에게 이입하게 되고, 그가 국가권력을 향해 들이받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준철 캐릭터의 매력은 설경구의 열연에서 나옵니다. 사실 기자는 준철의 별명이 ‘미친개’라는 점을 알려주는 극 초반부터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토록 많은 한국영화에서 나온 ‘미친개’ 캐릭터가 또 나오다니, 혹시 클리셰 범벅의 진부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우려였습니다. 압박에 굴하지 않고 상사에게도 대드는 ‘미친개’ 캐릭터는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설경구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쳐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준철은 앞뒤를 재거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무작정 들이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고뇌하고 갈등합니다. 그런 고민을 하고도 결국엔 옳은 길을 고수하는 모습에서 나약한 소시민인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빌런들을 적당히 두들겨 패도록 허용하는 연출이 더해지니 짜릿한 통쾌함도 있습니다. 정지영 감독은 설경구가 ‘꼴통 형사’를 연기했던 영화 ‘강철중’ 시리즈를 떠올리며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설경구를 캐스팅하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설경구는 ‘강철중’ 시리즈 이후 일부러 경찰 역을 피했지만, 정 감독의 진정성에 끌려 출연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영화 ‘소년들’. CJ ENM 제공

준철에게 대드는 부하들을 말리며 품위를 지키는 척하지만 속내는 더럽기 짝이 없는 우성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온갖 똥폼을 잡는 유준상의 연기는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조연들 역시 ‘찰떡’입니다. 부패 검사를 맡은 조진웅, 우성의 똘마니 형사를 맡은 하도권과 이호철의 연기도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범을 연기한 서인국, 무고한 소년들을 연기한 김동영, 유수빈, 김경호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이입을 불렀습니다.

특히 준철을 ‘성’(형의 사투리)이라 부르며 믿고 따르는 형사를 연기한 허성태, 준철의 아내를 맡은 엄혜란도 감초로서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다만 일부 단역의 사투리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등 ‘옥에 티’는 있었습니다.

재심이 진행되는 영화 후반부의 법정영화식 연출도 나쁘지 않았지만, 결말부의 신파적 장면은 호불호를 가르는 대목이 되겠습니다. 한국 영화들은 감정을 끌어올린답시고 음악을 너무 크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상당히 진부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연출은 촘촘해서 지루할 새가 없었습니다. 각 인물들이 갈등 끝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습들도 울림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은 2007년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2012), 금융 비리 영화 '블랙머니'(2019) 등 실화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소년들’ 역시 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언급할 때 길이 회자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소년들’. 넷플릭스 제공 영화 ‘소년들’. 넷플릭스 제공

이것은 코믹인가 하이스트인가…장르 모호한 ‘여도둑들’

다이아몬드를 훔쳐 숲속으로 달아나는 주인공 카롤(멜라니 로랑). 그와 통신으로 대화하던 동료 알렉스(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는 갑자기 크게 놀랍니다. 덩달아 놀란 카롤이 이유를 묻자 ‘지금 문자메시지로 남자친구에게 차였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카롤은 어이가 없어 화를 내다가도 연애 상담을 합니다. 이내 약속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륜오토바이(ATV)로 도주하지만, 드론이 추격하며 총알을 퍼붓습니다.

1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여도둑들’은 배우 멜라니 로랑이 연출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이름은 생소하지만 ‘6언더그라운드’(2019),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등에 출연해 얼굴은 익숙합니다.

영화 예고편은 화끈한 하이스트 무비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감상해본 ‘여도둑들’은 여성 서사가 돋보이는 코믹 성장물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카렌과 알렉스는 10대부터 출가해 친하게 지낸 단짝입니다. ‘대모’(이자벨 아자니) 밑에서 프로 도둑으로 일해왔지만 이젠 둘다 지쳤습니다. 특히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카렌은 알렉스에게 ‘새로운 인생을 찾자’고 제안하고, 알렉스도 “너랑 있으면 뭘 하든 상관없어”라고 화답합니다.

카렌과 알렉스는 대모를 떠나 숲속 은신처로 숨지만, 대모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의 습격으로 은신처가 쑥대밭이 됩니다.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카렌은 다시 대모 밑으로 들어가 임무를 수락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번 임무는 값비싼 명화를 훔치는 겁니다. 카레이서 출신 운전사 ‘삼’(마농 브레슈)이 합류하면서 예고편에 등장하는 ‘트리오’가 결성됩니다.

영화는 여느 하이스트 무비와 비슷한 구성을 갖췄습니다. 저격수지만 운전도 겸했던 알렉스는 신참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알렉스를 달래가며 카렌은 팀워크를 다지려 합니다. 삼은 총 쏘는 법부터 고된 체력 훈련까지 소화하고, 세 사람은 점점 가까워집니다.

우정이 쌓인 세 사람은 드디어 명화를 훔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돌발변수가 생기고, 임무는 꼬여갑니다.

‘여도둑들’은 ‘오션스 일레븐’(2002) 시리즈처럼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치밀한 두뇌 싸움을 내세우는 작품은 아닙니다. 물론 격렬한 맨몸 격투씬과 총격씬 등이 있지만 그 비중이 크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유쾌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돋보이는데, 유머코드의 타율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임무 계획을 영 부실하게 세운 탓에 엉뚱한 상황이 이어지고, 등장인물들은 코믹한 임기응변을 펼치는 식입니다. 범인 잡으려던 경찰들이 치킨집을 차린 ‘극한직업’(2019)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극중 핵심 과제도 도둑질이 아닙니다. 그림을 훔치는 과정은 어물쩍 넘어가고, 이후 대모와 담판을 짓는 대목이 핵심입니다. 카렌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대모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예상합니다. 이에 3인조는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지만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결말을 포함해 스토리가 탄탄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사실 액션이 가미된 프랑스 영화 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드물긴 합니다.

한편 넷플릭스는 요금 인상으로 시끄럽습니다. 지난 2일 넷플릭스는 같은 가구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넷플릭스 계정을 공유하려면 매달 5000원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미 디즈니플러스도 이달부터 구독료를 올렸습니다. 고물가 행진 속 OTT(온라인동영상플랫폼) 구독료가 오르는 ‘스트림플레이션’까지 겹치는 상황인데, 달가울 수 없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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