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6-02-22 09:00:00
<월인천강지곡>은한글을 대자로 인쇄하고 각 글자 아래 오른쪽에 한자를 병기한 드문 책이다. 미래엔교과서박물관 소장
원고지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국시대에 이미 구획을 나누고 한 칸에 한자만 쓰는 원고지 형태의 글쓰기가 있었다. 사택지적비와 탁본 모습.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그림과 글이 좌우로 나란히 보기 좋게 인쇄돼 있다. 편집의 발전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근대 출판사의 선구자로 불리는 알도 마누치오가 인쇄한 헬로도토스의 <역사>. 흰색 가죽 표지로 제본했고 앞뒤 표지에 돌고래가 닻을 히감고 있는 출판사 문양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소장
박물관 전시 기획자도, 관람객도 접근하기 어렵다는 전시 분야가 있다. 옛 서적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대부분 한자로 적힌 책의 내용을 읽을 수도 없고, 거의 비슷해 보이는 책들을 결국 휙 한 번 스치듯 보고 전시실을 나가는 경우가 정말 많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 중 도자기, 그림은 관리가 잘 되지만, 옛 책은 변색된 채 먼지만 쌓여 버려지는 사례가 꽤 있다. 실제로 학계에서조차 옛 책을 제대로 해석하고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연구자가 아주 드문 게 요즘 현실이기도 하다.
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고,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국내 주요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한 저자. 박물관에 전시된 멋진 고서를 관람하는 관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고서 보는 방법을 알면 그 매력에 빠질 것 같은데 다들 진입 문턱이 높다고 말했다. 그 진입 문턱을 조금이나 낮추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지금까지 옛 책을 소재로 한 도서가 대부분 내용을 해석하고 글을 쓴 저자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옛 책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면, 사람들이 좀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저자는 옛 책의 내용이 아니라 표지, 제목, 본문과 주석의 배치, 글자 크기, 문단 나누기, 띄어쓰기, 본문 밖 여백, 소장자의 흔적에 주목했다.
오늘날 책 편집자와 디자이너들이 읽기 편하고 보기에도 좋고 편집이 뛰어난 책을 만들기 위해 정성과 아이디어를 쏟는 것처럼, 옛 책 편집자와 제작자도 똑같은 고생을 했다. 오늘날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어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화엄경> <월인천강지곡> <조선왕조실록> 등 한 번쯤 제목을 들어봤음 직한 15종류의 옛 책을 골랐고 각 고서의 물성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지면 배치, 디자인 감각 등을 분석한 후 쉽게 설명해 준다.
원고지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지만, 한국은 이미 삼국시대에 원고지처럼 정확하게 구획을 나누고 글자 한 개를 그 구획에 둔 정간이라는 방식이 있었다. 본문 아래 작은 글자를 두 개 넣는 표기 방식, 책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볕이 좋은 날 책을 서고에서 꺼내 바람에 말리는 행사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심지어 우리가 아는 종이책 이전 대나무, 돌, 금속으로 만들어진 책은 물론이고 선장본, 두루마리, 절첩본 등 책으로 엮는 방식까지 설명해 준다. 책의 편집이 바뀌게 되는 역사적 배경지식은 덤이다. 세종이 지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먼저 쓰고 뒤에 한자를 쓴 거의 유일한 책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은 한자 대신 한글을 주 언어로 선택했고, 한자를 보조 설명으로 함께 쓴 것이다.
한글 창제 후 한글은 한문으로 된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에 주로 쓰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언해본을 보면 이제 정말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는가 싶다. 예를 들어 논어의 유명한 첫 구절 ‘공자왈학이시습지불역열호’는 한글로 번역하자면 ‘공자가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당시 간행한 언해본에는 ‘자이 가라사대 학하고 시로 습하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로 번역돼 있다. 조사와 형용사 빼고 기본적으로 ‘학’ ‘시’ ‘습’같은 한자를 알아야 번역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왕에 따라 한자를 전혀 모르고 한글만 익힌 백성도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만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역병이 돌자 전염병 치료와 대처 방법을 담은 책이 그렇다. <무예도보통지> 같은 병법서 역시 한문에 능통하지 않은 무인들이 봐야 할 책이기에 한글을 제대로 번역했다.
책의 후반부에는 3권의 서양 고서의 특징도 소개한다. 서양 최초 인쇄본 성서인 구텐베르크 성서 1부를 인쇄하는 데 송아지 160마리의 가죽이 필요했고 근대 출판사의 선구자로 불리는 알도 마누치오가 인쇄한 <역사>라는 책에 드러난 최초의 현대식 책 편집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이재정 지음/푸른역사/416쪽/2만 7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