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아트컨시어지 대표. 부산일보DB
유럽의 여름은 음악축제의 계절이다. 베로나, 브레겐츠처럼 오페라 중심의 야외축제는 많지만,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야외에서 만나는 관현악 축제는 흔치 않다. 오스트리아의 그라페네크 페스티벌(Grafenegg Festival)은 음악뿐 아니라 건축과 자연까지 하나의 무대로 끌어들인 독특한 여름 음악축제다.
빈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작은 마을 그라페네크. 넓은 정원 한가운데 동화 속 같은 그라페네크 성(Schloss Grafenegg)이 자리한다. 중세에 기원을 둔 성은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19세기에 지금의 낭만적인 역사주의 건축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여름이면 시선은 고성 옆 현대 건축물로 향한다. 독일어로 ‘구름탑’을 뜻하는 야외공연장 볼켄투름(Wolkenturm)이다. 볼켄투름은 공연장보다 거대한 현대 조각 작품에 가깝다. 여러 방향으로 접히고 솟아오르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대를 감싸고 그 사이로 하늘과 숲이 들어온다. 건축물이 자연을 차단하는 대신 자연 자체를 공연장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객석 뒤 넓은 잔디밭에서도 관객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즐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라페네크 성과의 관계다. 19세기의 고성과 21세기의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은 형태도 재료도 전혀 다르다. 서로 닮으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오래된 건축을 현대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건축을 나란히 배치해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2007년 국제 음악축제로 본격 출범한 그라페네크 페스티벌은 빠르게 성장했다. 톤퀸스틀러 오케스트라가 상주 오케스트라로 활동하고,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루돌프 부흐빈더가 오랫동안 예술적 방향을 이끌었다. 매년 여름 세계적인 음악가와 오케스트라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는다.
20주년을 맞은 올해 라인업은 더욱 화려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리카르도 무티, 유자 왕을 비롯해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등이 그라페네크를 찾았다. 내가 찾은 날의 주인공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이었다.
해가 지면서 고성의 실루엣이 짙어지고, 콘크리트 ‘구름탑’ 사이로 음악이 퍼져나갔다. 건축은 자연을 담고, 자연은 음악의 배경이 된다. 좋은 문화공간은 반드시 거대한 건물일 필요가 없다. 장소가 가진 시간과 풍경을 어떻게 새로운 문화적 경험으로 바꾸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라페네크가 보여주는 시그니처는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