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길을 잃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정희승 ‘랄프 깁슨 어워드’ 기념 사진전
3년 만의 신작 ‘멀리서 너무 가깝게’ 공개
8월 31일까지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사유를 유도하는 매체’로서 사진 작업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2025-07-31 09:00:00

정희승의 ‘멀리서 너무 가깝게’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멀리서 너무 가깝게’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윌더'(Wilder) 중 '무제'(Untitled, a set of 2 panels).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윌더'(Wilder) 중 '무제'(Untitled, a set of 2 panels).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우연히 제주 어느 숲으로 들어갔고, 일 년에 걸쳐서 숲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시간이 회복의 기간이기도 했고, 사진이라는 매체 의미에 대해서도 많이 성찰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번아웃’은 작가에게 고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사진가 정희승이 3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면서 털어놓은 속내이다.

2023년 제1회 랄프 깁슨 어워드 공동 수상자였던 정희승은 어워드 발표 후 1년 7개월 만에 수상 기념 사진전을 열고 있다. 지난 6월 26일 개막해 오는 8월 31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해운대구 중동1로 37번길 10)에서 선보이는 ‘멀리서 너무 가깝게’ 전시이다. 영상 1점, 대형 설치작 4점 등 총 21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2022년 개관한 고은 깁슨 사진관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한국 작가 개인전이다. 고은문화재단은 전시와 사진집 <멀리서 너무 가깝게> 출간 기회 등을 제공했다.

“2020~2021년으로 이어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상 2020’ 전시 이후 번아웃이 찾아왔어요. 금세 회복할 줄 알았는데, 1년, 2년, 3년까지 간 겁니다. 그러다 지난해 2월 등 떠밀리다시피 제주에 간 뒤 거기서 새로운 계기를 맞이한 거죠. 숲은 길을 잃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습니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길을 잃어버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다행히도 저에겐 카메라가 있었고요.”

‘멀리서 너무 가깝게’ 전시를 열고 있는 부산 해운대구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포즈를 취한 정희승 사진가. 김은영 기자 key66@ ‘멀리서 너무 가깝게’ 전시를 열고 있는 부산 해운대구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포즈를 취한 정희승 사진가. 김은영 기자 key66@

지금은 담담하게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작가로선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낸 듯했다. 이날의 생경한 경험은, 그동안 스튜디오 베이스로 작업해 온 그를 숲으로 불러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전만 해도 저는 풍경이라는 장르 또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피사체로 삼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저한테는 굉장히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계속 같은 숲을 보고, 촬영했어요. 공간의 밀도, 이런 것들이 되게 실체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밀도를 이미지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었고, 하나의 작업 형태를 갖추기까지 1년이 걸렸습니다.”

정희승은 시선, 거리, 배열과 배치의 감각을 통해 사진이 지닌 지각의 구조와 상징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탐구해 왔다. 사진을 재현이나 의미 전달의 도구보다는, 사유를 유도하는 매체로 다뤘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빔 벤더스의 동명 영화에서 착안한 전시 제목 ‘멀리서 너무 가깝게’도 그렇게 나왔다.

정희승의 ‘멀리서 너무 가깝게’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멀리서 너무 가깝게’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풀밭 위의 구두'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풀밭 위의 구두'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풀밭 위의 구두'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풀밭 위의 구두' 중 '무제'(Untitled).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전시는 3개 층 전체를 사용한다. 2층 사진을 먼저 보는 게 좋다. ‘멀리서 너무 가깝게’ 12점과 ‘풀밭 위의 구두’ 4점이 전시된다. ‘멀리서 너무 가깝게’는 전시 제목에서 유추되는 게 있지만, ‘풀밭 위의 구두’는 오히려 낯설었다. “구두가 가진 상징성보다는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두 주인은 이 구두를 신고 어디를 갔을까, 혹은 벗어 놓고 어디로 갔을까, 왜 여기에 구두가 있을까 등 상상의 여지가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해서 찍어 봤어요. 롤랑 바르트가 한 말 중에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라고 한 것처럼요.” 1층에는 제주 체류 중 매일 마주한 해변의 일출과 일몰을 기록한 영상 작업 ‘해변에서’(8분 6초)를 선보인다. 한 곳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원테이크로 찍은 이 영상은 아름다움의 기록이 아니라, 색조와 시간, 인식과 재현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한 작가 경험이 녹아 있다.

정희승의 '윌더'(Wilder) 중 '무제'(Untitled, a set of 2 panels).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정희승의 '윌더'(Wilder) 중 '무제'(Untitled, a set of 2 panels). 고은 깁슨 사진미술관 제공

지하에선 높이 220㎝의 대형 패널로 구성된 ‘윌더’ 4점이 전시된다. ‘윌더’(길을 잃어버리다는 의미의 고어 Wild는 와일드가 아니라 월더라고 작가는 거듭 강조했다)라는 작품 제목을 붙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숲 사진을 찍으면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테마가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었는데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서 찾은 게 ‘윌더’입니다.” 복잡한 숲 구조를 고해상도로 촬영한 이 작업은, 압도적인 스케일을 통해 이번 신작의 출발점이기도 한 ‘길을 잃는 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의뢰한 백현진의 사운드는 이러한 감각을 더욱 풍부하게 전달한다.

고은문화재단 관계자는 “동시대 사진의 감각적 사유와 조형적 탐구가 응축된 이번 작업은 정희승 작가가 지난 작업에서 일관되게 구축해 온 태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촬영 환경과 대상을 새롭게 확장하며, 사진 매체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평가했다. 정희승은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런던 컬리지 오브 커뮤니케이션대학에서 사진학과 학사와 석사를 전공했으며,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업한다. 관람 시간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문의 051-747-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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