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치는 피아노… 온몸으로 말하는 희망

이훈 ‘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 출간
마흔 살에 뇌졸중으로 신체 오른쪽 마비
고된 재활·불굴의 투지로 건반 위 기적 만들어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2025-10-09 16:08:52

피아니스트 이훈. 툴뮤직 제공 피아니스트 이훈. 툴뮤직 제공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부상을 당해 오른팔을 절단했다. 그는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에 구금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무상자를 피아노 삼아 상상 속의 연습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을 완성했다.

전쟁으로 친구를 잃고 참혹함에 눈물을 흘렸던 ‘볼레로’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왼손 연주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적 성취를 상징하는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부산시립교향악단과 재미교포 피아니스트 벤 킴이 지난달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무직페스트 베를린 2025’ 폐막공연에서 이 곡을 협연해 주목받았다.

새 책 <나는 왼손 피아니스트입니다>는 한국의 비트겐슈타인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 박사 이훈이 쓴 자신의 이야기다. 아홉 살에 피아노를 시작한 저자는 선화예고 재학 중 유학을 떠나 독일·네덜란드 국립음대를 마쳤다. 2008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2012년 뇌졸중으로 온몸이 마비돼 학업을 중단했다. 불굴의 의지로 좌반신 재활에 성공해 2016년 7월 서울 가톨릭성모병원에서 독주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무대에서 왼손 피아니스트로서 제2의 음악인생을 펼쳐가고 있다.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 학위(DMA)도 받았다.

이 책은 한 인간의 단순한 병상일지가 아니다. 믿음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보여주는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이훈은 피아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학창시절, 창창했던 삶에 도둑처럼 찾아온 질병, 몸의 절반이 마비되면서 겪은 상실의 시간, 힘들었던 재활과 극복의 여정, 역경을 딛고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나머지 절반을 채워준 주변 사람들에 대해 꾸밈 없이 기록했다.

이훈을 ‘한국의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비트겐슈타인 보다 훨씬 더 신체 조건이 열악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른손만 없었지만 이훈은 신체 오른쪽이 모두 마비돼 오른발로는 피아노 페달을 밟을 수 없다. 그래서 왼손과 왼발을 동시에 사용하다 보면 연주 중 몸이 한쪽으로 틀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책은 가족과 스승, 지인 등 주변 인물들이 삶과 재활을 함께 하는 과정도 남겼다. 부산출신 작곡가 김보현은 독주회에서 연주할 곡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작곡가는 ‘오른손으로 단 한 음이라도 연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이훈도 망설임 없이 해보겠다고 했다. 3악장으로 이뤄진 솔로곡 ‘파묵’(破默)은 이렇게 탄생했다.

2024년 11월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에서 이훈은 감각 없는 오른손으로 한 음을 연주하는 기적을 만들어냈고, 객석에서는 감격과 경이로움 속에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른손 음을 더한 것은 꺾이지 않는 의지와 열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김보현은 말한다. “하나의 음은 하나이자 전부다. 이훈 선생의 의지가 발현되는 순간과 그것이 주는 여운은 단 하나의 음이면 충분하다.”

이훈 지음/오늘산책/176쪽/1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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