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12-19 09:00:00
오랜만에 부산 중구 광복로 거리에 나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들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주말의 광복로 거리에는 외국인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2025년 부산을 찾은 누적 외국인 관광객 수가 사상 처음으로 300만 명을 넘어섰고, 이제 500만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내 광복로 건물 서너 곳 걸러 한 곳꼴로 내걸린 공실을 알리는 현수막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외국 관광객 입장에서 한국의 제2 도시 도심이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유령도시처럼 상가가 텅 비어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부산의 원도심, 광복로를 되살릴 묘안을 더 늦기 전에 마련해야 할 때다.
지난달 22일 ‘부산요포럼’이 광복로 청년작당소에서 주최한 ‘청년들을 위한 부산 도자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부산요포럼은 ‘부산요(釜山窯)’의 역사적 가치를 재해석하고, 창조적으로 되살리기 위해 2019년에 설립한 모임이었다. 도공, 도자 연구가, 도예과 학생, 수집가를 비롯해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동안 15회의 정기포럼, 7회의 낙동강 하류 지역 옛 도요지 답사, 찻사발 전시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날 조국영 도예가 겸 도자 연구가의 ‘조선 후기 찻사발 문양의 수용과 전개’를 주제로 한 발표를 들으며, 지금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 부산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산요에서 일본 측 요청으로 제작된 주문다완의 대표적 사례인 고혼다찌쯔루차완(御本立鶴茶碗). 부산박물관 제공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의 찻사발에 열광했다. 조선 도공들이 빚어낸 찻사발은 일본 다도 문화의 정점으로 인정받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류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의 한류였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기도 했다. 일본은 전쟁 중 조선의 도자기를 대량으로 약탈했고, 특히 그중에서 찻사발을 일본 다도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의 찻사발 공급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문화 교류 단절로 끊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선 찻사발에 대한 일본의 구애는 집요했다.
조선 조정과 에도 막부의 관계 호전으로 부산에 왜관이 다시 생기자, 일본은 대마도를 통해 찻사발 주문 제작을 수용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한다. 일본은 기장과 양산 법기, 김해 등지에서도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다. 초기에는 이처럼 왜관 바깥에서 조선의 사기장이 만든 완성품을 수출하는 형식을 취했으나, 이후 왜관 내에서 일본 도공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생산 방식으로 바뀌었다. 막부 정부가 원하는 문양을 넣은 찻사발의 견본을 대마도로 보내고, 대마도는 동래부에 주문서를 보내 제작을 의뢰했다. 동래부는 예조(禮曹)의 허가를 받아 도공을 소집하고 찻사발을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했다.
부산요는 두모포(수정동) 왜관 시절인 1639년에 시작해 초량 왜관(광복동)으로 옮긴 뒤 1743년까지 104년간 찻사발을 비롯한 도자기를 구웠다. 경주·울산·하동·진주·김해·밀양·양산 등에서 태토(胎土)를 조달했다. 가까운 양산이나 기장 등에서 사기장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경상 각 지역에서 생산해 바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던 도자기가 부산을 거점으로 모이며, 부산은 일약 도자기 생산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 부산요는 완제품의 형태와 규격, 색상, 태토의 배합, 문양 등이 기재된 일본의 주문서에 의해 주문 사발인 어본다완(御本茶碗)을 주로 생산했다.
부산요에서 생산한 찻사발의 숫자가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이즈미 초이치가 주문 도자기에 관련된 대마도 문서를 해석한 <부산요의 사적연구>에 의하면 1회 구워 완성한 찻사발 700점에 연 6회로 간주해 일 년에 4200점에 달한다. 부산요가 활발했던 70년 동안만 계산해도 17만 점, 밀수품과 사무역까지 합하면 그 몇 배의 찻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토 공급 부족 등으로 왜관 안에서의 도자기 생산이 막을 내리면서 쓰시마 번은 독자적으로 ‘조선 다완’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부산요에서 수출한 찻사발을 관리하던 대마도의 대주요(對州窯)는 지난해부터 부산의 보혜 스님이 주지인 한국 사찰 황룡사가 되었다.
부산요포럼 회원들이 쓰시마 박물관에서 부산요 시절 만들어진 찻사발을 관찰하고 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조선의 도공이 일본에서 파견된 생산 지휘자, 대마도에서 나온 일꾼들과 협력해서 도자기를 생산하다니…. 당시의 도자기 산업은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에 비유된다. 일본이 주문한 최첨단 반도체를 부산에서 지역 최고의 기술자들과 공동 생산한 것과 다름없다. 조선은 부산요에서 중요한 흙의 생산지부터 흙의 배합이나 성분도 알려주고, 제작 기법 또한 아낌없이 일본인에게 가르치며 협업 체제를 이어갔다. 국가를 초월한 문화의 융합이란 면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지만, 오늘날 경영 마인드로는 달리 생각되는 부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일본은 부산요에서 배운 기술로 유럽에 도자기를 많이 수출했고, 지금도 세계적인 도자기 선진국으로 대접받고 있다. 조선은 뛰어난 도자기 기술을 가지고도 왜 자기 밥그릇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까. 조선 조정이 일본의 도자기 공동 생산 프로젝트를 그렇게 쉽게 허락한 사실도 의아하다. 부산요에서 일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AI번역기도 없던 시절 말도 통하지 않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부산요에서 어떻게 소통하며 도자기를 만들었을까. 위대한 예술의 힘으로 봐야할 것이다.
부산요포럼 회원들이 경남 양산시 법기리 가마터를 답사하고 있다.
아무튼 부산요 덕분에 도자기 산업 불모지 부산은 조선의 도자기 생산과 수출의 메카가 된다. 어쩌면 초량왜관은 처음부터 부산요를 노리고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날 포럼이 끝나고 용두산공원 인근 미타선원 아래 이지주차장을 지날 때였다. 조국영 도자 연구가는 “여기가 부산요가 있던 자리다. 일본인들은 도요지라고 하면 굉장히 신성시하는데, 부산요를 되살리면 구경하러 올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도공 기림비를 세우고 가마를 복원하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부산요를 연구하고 계승해야 우리도 새로운 도자기가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요포럼은 초창기부터 ‘부산요 가마터를 발굴·복원해야 하고, 당시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사람과 교류에 이바지한 사기장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과 문화 축제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용두산공원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해 왔다.
이날 포럼에 참가한 부산과학기술대 생활도예과 장기덕 교수가 지난달 부산요 세미나에서 발표한 ‘양산 법기 창기요 찻사발 연구’도 곰곰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양산 법기리 가마에서 역관들이 일본 다도계의 수요를 파악하고 제작을 의뢰해 품질까지 관리하면서 밀무역과 사무역 형식으로 대량의 찻사발을 생산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달 8일 부산무화회관에서 부산찻사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부산요 제공
부산요포럼 안태호 집행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도자기로 메가시티를 구현해 보자’라고 한 발 더 나갔다. 부산·경남에는 전통 장작 가마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자꾸 없어지고 있다. 김해에는 장작 가마가 30개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12개밖에 남지 않았다. 안 위원장은 “도자기 판매가 잘 안되니 도공들이 먹고살지 못한다. 부산이 도자기 거점 도시가 되면 지역의 장작 가마를 최고의 관광 코스로 만들 수 있다. 김해·양산·밀양 등 가마에 불 때는 날에 부산에서 관광객을 데려가면, 작품 판매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인접 지역 도자기 산업을 연결하고 묶어 지역 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면, 우선 지역의 도공들을 선정해 부산에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왜관가마 판화. 맨 위쪽에 ‘헌상요’라는 중요 주문 다기 제작 가마가 보이고 그 밑에 ‘대요’라는 일반 가마가 보인다. 그 아래에 장인의 거처인 번조두가 보인다. 부산요포럼 제공
부산요 관계자들은 “용두산공원에 뭐 볼 게 있느냐”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도 묻혀 있는 부산요의 유물을 발굴하면서 용두산공원에 부산요 자료관을 만들고, 광복로에 도자기 문화의 거리를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도자기를 매개로 부산을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물론,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도자기 교역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부산요포럼은 내년에는 우선 부산·경남 지역 도공 초청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한편 당시 부산 인근 지역에서 국내에 도자기를 만들어 유통하던 가마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요라고 하면 안 되고, ‘왜관요’나 ‘부산왜관요’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부산요포럼은 호칭 문제는 공동 세미나나 토론회를 통해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부산요 같은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왜 여태까지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도 자기 밥그릇을 못 챙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