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6-05-22 09:00:00
불화(佛畵)는 불교사상을 알리고 포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화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이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 시대부터 사찰 건물에 불화를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화는 절이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오래전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불화를 그리고 있었다. 불화는 살아 있었다.
화공의 후예들은 지금도 열심히 불화를 그리고 있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자주 가던 통도사 대웅전을 유심히 보다 그림의 색이 아주 많이 바래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래된 소중한 국가유산의 복원과 보존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다가 ‘국가유산수리기능자 화공’이라는 단청 관련한 국가 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하며 무릎·어깨·손목 통증으로 정형외과를 드나들었지만, 현장에서 단청을 그리는 시간이 꼭 한번 왔으면 좋겠습니다.” “단청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 이토록 가까이서 그 유산과 명맥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단청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이승규 대표와 노해 작가 부부.
예전에 화가를 이르던 말이 ‘화공(畫工)’이다. 요즘 세상에도 화공이 되기 위해 몸을 갈아 넣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유산수리기능자 화공은 전통 건축물에 단청을 입히거나 벽화, 모사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역량을 갖춘 사람에게 국가유산청에서 부여하는 국가전문자격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만난 한 블로그에는 이 같은 내용의 합격자 수기가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뜻밖에도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원여동양미술연구소였다.
노해 작가.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이곳에서 이승규 대표와 노해 책임연구원 부부를 만났다. 알고 보니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노해 작가는 2018년 부산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별화(別畵)’로 화제가 되었다. 별화는 사찰 건물에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그림 또는 장식화다. 용, 거북, 봉황, 기린, 사자, 학, 오리, 사군자 등이 주 대상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별화를 대중에 알리고 싶은 마음에 건축물에서 떼서 종이로 옮겼다고 했다. 별화 작가는 예술가이자 역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힘든 직업이다. 그래서 요즘엔 별화 작가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노 작가가 별화에 관심을 가진 건 불교 전문 사진가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린 시절 주말에 눈 떠 보면 이미 산사로 가는 차 안에 실려 있었다. 다시 눈 떠보면 절이나 탑 앞이었다. 아버지를 좇았지만, 아버지의 눈은 단청이나 탑에 가 있었다. 도대체 저기에 뭐가 있어 저렇게 오래 보고 있나 궁금해졌다. 그곳에는 부처님 외에도 꽃이나 동물 등 별화가 그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불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대학에 가서는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봤던 것들을 그리게 되었다.
대학을 마치고는 동양화 기법을 적용한 현대미술을 할 생각이었다.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전통 회화의 색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佛畵匠) 이수자 이승규 씨에게 불화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제지간인 두 사람이 연애해서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부가 된 지는 7년이 되어 간다.
이승규 대표가 현장에서 벽화를 점검하고 있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이승규 작가는 지난해 9월 서울 인사동에서 제자 38명과 함께 ‘괘불-부처의 법을 펼치다’ 전시를 열었다. 조선 시대에 탄생한 괘불은 큰 행사 때 야외에 불단을 차리고 두 기둥에 거는 야외 행사용 대형 불화이다. 괘불은 큰 것은 높이가 15m에 달해 건물 몇 개 층 크기라 한 공간에 여러 점을 걸기가 불가능하다. 이 전시는 원본을 축소하거나 현대적으로 구현해 만든 여러 형태의 괘불을 갤러리 안에서 한눈에 감상하도록 만든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 시대 괘불 120여 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하동 와룡사 비로자나불에 눈과 머리카락을 그려 넣는 개안모발(開眼毛髮)을 하고 있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이 작가의 어머니는 신심 깊은 불자였다. 그는 이 시대의 불모(佛母)로 꼽혔던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기능보유자 석정 스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금강공원 식물원 북쪽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선주산방에서 불화를 그렸다. 이 작가는 20대 후반에 제자로 들어가 10년 넘게 스님을 모셨다. ‘원여(圓如)’라는 법명도 스님이 지어줬다. 둥글 원(圓), 같을 여(如)자.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2012년 스님이 입적한 뒤 독립해서 화실을 차렸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 노해 씨를 만났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의 슬로건은 ‘예술이 기술이 된다’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단어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작가는 옛날 것으로부터 현대에 쓸 수 있는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했다.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자꾸 발전시켜 시대에 맞는 걸 만들고 싶어 한다. 불화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선조들의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체계화해 특허 실용신안을 2개나 취득했고, 원여동양미술연구소는 NICE 기술평가에서 우수기술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기도 용인 연화암 신중탱화에는 대자제천천왕이 갤럭시 폰을 들고 있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신중탱화(神衆幀畵)는 불교를 수호하는 다양한 신들을 묘사한 불화다. 그가 지난해에 만들어 경기도 용인 연화암에 모신 신중탱화는 뭔가가 달라 보였다. 신 중의 한 분이 뜻밖에도 스마트 폰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연화암 주지 성혜 스님이 “우리 절 신중탱화는 다른 절하고 뭔가 달랐으면 좋겠다. 현대적인 것을 넣어도 되지 않겠냐”라고 먼저 제안한 게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 작가가 “스마트폰이 좋겠는데 기왕이면 아이폰보다 갤럭시를 넣자”라고 호응했다. 그렇게 불기 2570년 사상 처음으로 갤럭시 폰을 든 대자제천천왕이 탄생했다.
감로탱화(甘露幀畵)는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화다. 아귀(餓鬼)에게 감로(甘露)를 베푼다는 뜻이다. 아귀는 좁게는 돌아가신 조상, 넓게는 중생의 고통을 집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부산 기장 묘관음사 주지 서강 스님은 감로탱화를 의뢰하며 “옛날 거 말고 요즘 세태를 반영해서 그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로 지금 묘관음사에는 고기 굽고 와인 마시고, 자동차 사고가 나고, 총을 쏘며 전쟁하는 감로탱화가 그려져 있다. 또 지난해에는 아이패드를 이용해 단청 문양부터 전통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온라인 수업을 열고, 굿즈를 만들기도 했다. 너무 멀리 있는 줄 알았던 불화에 이처럼 시대상이 반영되니 더욱 공감이 된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이승규 대표와 노해 작가. 원여동양미술연구소 제공
이 작가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이번에 약사여래삼존도, 관음보살도, 아미타여래삼존도, 달마·혜가단비도 등 범어사 대웅전 벽화 4점이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되는 매우 기쁜 일이 생겼다. 벽화는 보존에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훼손이 되어 버린다. 불화를 그리는 사람으로서 시민들이 보물들을 꼭 친견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노 작가도 “불화를 처음 배울 때 먹으로 선 긋는 연습을 6개월 동안 했다. 선 하나하나가 시간이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까지 왔다. 엎드려서 몇 달씩 뼈를 깎는 고통과 몸을 희생해 가면서 불화 한 점이 탄생하고, 부처님이 나투시게 되니 정성스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바닥에 꿇어앉아 불화를 그리는 모습이 마치 고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불화를 그리고 있던 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김소라(부산 해운대구 중동) 씨는 “대학원에서 불교 미술사를 공부했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 내가 좋아했던 불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지 2년쯤 되었다. 한 땀 한 땀 새겨 나간다는 느낌으로 그리니 몸은 조금 힘들지만 정신 건강에는 좋다. 더 배우고 싶어서 모사공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모사공(模寫工)은 전통 회화나 서적 등의 문화재를 원래의 모습과 똑같이 그려서 복원하거나 보존하는 문화재 모사 전문가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보니 힘들게 불화 그리는 분들이 구도(求道)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글·그림=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