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 주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 등은 참 넓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목욕탕 주인을 가끔 부러워했다. 어느새 등은 굽고 앙상해진 아버지 모습이 짠하다. 전날 과음한 뒤 회사 근처 목욕탕을 찾았다가 공교롭게도 직장 상사를 만나 민망했던 일도 생각난다. 목욕은 생활의 일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목욕탕에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집에서 매일 샤워를 해서 목욕탕과 멀어진 것일까.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왼쪽)와 안지현 매끈연구소 소장.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왼쪽)와 안지현 매끈연구소 소장.
				
			<집앞목욕탕>을 처음 만난 때는 2023년 10월이었다. 이 ‘신박한’ 잡지는 사라져가는 목욕탕을 앞으로 한 군데씩 알려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첫 순서로 이름에 부산이 들어간 부산 서구의 ‘부산탕’을 소개했다. 누가 봐도 돈이 되지 않을 일인데, 누가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집앞목욕탕>은 지난해 9호까지 낸 뒤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지금은 단행본 출판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이 잡지를 통해 부산에 목욕탕이 많을 때는 1500개, 지금도 500개가량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구 1000만에 육박하는 서울의 목욕탕 숫자가 부산과 비슷한 500여 개다. 목욕에 진심인 일본의 수도 도쿄, 1400만이 사는 도쿄의 목욕탕 숫자도 부산보다 적은 400개 남짓이다. 부산의 목욕탕 숫자는 전성기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지만 지금도 인구 대비하면 세계에서 제일 많다.
 집앞 목욕탕 잡지.
				
				집앞 목욕탕 잡지.
				
			부산에 이처럼 목욕탕이 많은 이유가 뭘까. 우선 지리적인 요인이 가장 크고, 역사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했다. 부산은 옛날부터 동래온천과 해운대온천이라는 물 좋은 온천을 두 곳이나 보유하고 있다.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부산에 많이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일본식 목욕탕이 속속 들어섰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부산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지만, 집에 욕실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중목욕탕은 이들이 집에 가기 전에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시설이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부엌에서 머리만 감고 몸은 어쩌다 한 번씩 목욕탕에 가서 씻었다. 특히 명절 앞두고는 목욕탕에 갔다.
부산에서는 K-목욕 문화를 이끈 전설적인 발명품이 두 개나 나왔다. 첫 번째가 ‘이태리타월(exfoliating glove)’이다. 이태리타월은 1967년 부산진구 초읍동의 한일직물에서 처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인조견 원단이 너무 거칠어서 쓸 수가 없자 시험 삼아 때수건으로 낸 게 시작이었다. 이태리타월이 나온 초기에는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돌멩이로 때를 밀었기 때문에 돈 주고 때수건을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발명품은 자동 등밀이 기계다. 벽에 붙은 기계에 등을 대면 이태리타월이 장착된 둥근 원판이 돌면서 때를 밀어준다. 1980년대 초반에 사상구의 삼성기계공업사가 개발한 이 기계는 부울경에는 없는 목욕탕이 없을 정도로 인기였다. 공중목욕탕 숫자가 줄면서 수요도 줄었지만 가정용 등밀이 기계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때를 밀고 있다.
얼마 전부터 SNS를 통해 더 따끈따끈한 소식이 잇달아 전해지기 시작했다. <집앞목욕탕>을 발행하는 ‘싸이트브랜딩’과 목욕탕 콘텐츠 컴퍼니 ‘매끈연구소’가 봉래탕 5층에 ‘라운지 일렁’이라는 공간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목욕탕 라운지’ 형태였다. 봉래탕은 1986년에 문을 열었고, 국내에서는 드물게 2대째 운영을 이어오고 있다.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서울에서 게임 회사를 운영하던 분이 목욕탕 주인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스무스런’ 행사 뒤 봉래탕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스무스런’ 행사 뒤 봉래탕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스무스런(SMOOTH RUN)’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봉래탕 앞에 모여서 깡깡이마을과 봉래물양장, 남항대교를 잇는 7km 코스를 달린 뒤 함께 목욕하고, 라운지 일렁에서 대화를 나누는 행사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달리고, 알몸으로 목욕하고, 다시 대화를 나눈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장소는 영도구 봉래동 봉래탕 5층 ‘라운지 일렁’이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씻으러 어서 오세요!’ 입간판 문구에 마음이 그만 뜨끔해졌다. ‘몸도 씻어야 하지만 마음도 돌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목욕탕 라운지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섰다. 옛날에 좀 잘사는 친구 집에 놀러 온 느낌이 들었다. 봉래탕 주인이 실제 살던 집을 라운지로 바꿨다. 일렁은 전시-굿즈존, 그림책방, 서재, 청음실, 필사방, 라운지 바 등 7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가 세계 최초의 샤워기형 스피커를 귀에 대고 음악을 듣고 있다.
				
				목지수 싸이트브랜딩 대표가 세계 최초의 샤워기형 스피커를 귀에 대고 음악을 듣고 있다.
				
			CD플레이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샤워기 모양 스피커를 비롯해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바나나우유, 딸기우유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위스키 잔술도 판매했다. 봉래탕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즐긴 뒤 라운지로 올라와 글렌피딕 위스키 한잔 마시면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겠다 싶었다.
서재 공간을 둘러보다 문제의 일본 만화책 <사도>를 만났다. ‘사도’는 사우나와 도(道)의 합성어로, 사우나를 통해 몸과 마음의 평안을 이룬다는 내용의 만화다. 일본에서는 2021년 TV도쿄가 이 만화를 바탕으로 드라마 ‘사도’를 만들면서 사우나가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사우나와 여행을 합친 ‘사타비’, 사우나와 활동을 결합한 ‘사활’이라는 동호회 모임 등 다양한 형태로 사우나 붐이 일어나고 있다. <집앞목욕탕>, 라운지 일렁, 스무스런이 가리키는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운지 일렁’의 서재 공간.
				
				‘라운지 일렁’의 서재 공간.
				
			<집앞목욕탕> 발행인인 ‘싸이트브랜딩’ 목지수 대표와 ‘매끈연구소’ 안지현 소장은 대학교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난 부부였다. 안 소장은 “남편이 본업인 공공 홍보는 제쳐두고 목욕탕에 매달리는 데 처음엔 반대했지만, 일본의 목욕탕을 살펴본 뒤 이 비즈니스는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같이 달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목욕탕 취재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목욕탕에 물건 팔러 온 장사꾼으로 오해받고 쫓겨난 적도 많았단다. 목욕탕에 손님이 있을 때는 사진 촬영이 안 된다. 새벽 3시에 찾아가서 목욕탕 첫 물을 트는 사진을 찍고, 인터뷰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직원들의 불만도 쌓일 수밖에 없었다. 목욕탕 관련 사업은 계속 적자이지만, 언젠가 알아줄 날을 기다리며 버티는 중이라고 했다.
 ‘스무스런’ 행사 뒤 찬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
				
				‘스무스런’ 행사 뒤 찬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
				
			목 대표는 요즘 사람들이 목욕탕에 잘 가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 “목욕탕도 변화해야 하는데, 목욕탕 사장님들이 트렌드 반영을 안 하고 있다”라고 직격했다. 주변에 멋진 카페나 레스토랑 등 좋은 공간이 많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목욕탕은 수십 년간 그대로 머물면서 공간 업그레이드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재개발로 목욕탕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목욕탕을 부순 자리에는 빌라가 올라가기도 한다. 일본에서 공부한 안 소장은 “한국과 일본은 철학이 다른 것 같다. 일본은 가업을 중요하게 생각해 내 대에서 없어지면 안 된다는 자존심이 중요한데, 우리는 내 대에서는 이 일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최근 일본의 목욕탕 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는 오래된 목욕탕에도 손님 절반 정도가 젊은 층이다. 일본의 목욕탕에는 라운지 문화가 있어서 독서 모임이나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센토런(Sento Run)’은 ‘센토(대중목욕탕)’와 ‘러닝(Running)’의 합성어로, 젊은 세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달리기를 마친 뒤 동네 목욕탕에서 땀을 씻고 사우나로 몸을 풀며 일상의 피로를 날려버리는 운동 문화다. 도쿄 전역에 100여 곳이 넘는 목욕탕이 센토런을 운영하고 있다. 목욕탕이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라운지 일렁’에서 열린 몰래탕 팝업 행사.
				
				‘라운지 일렁’에서 열린 몰래탕 팝업 행사.
				
			사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가서도 뛰고 싶어 한다. 부산에는 물 좋은 온천 2개에다 해수탕도 많다. 이태리타월과 자동 등밀이 기계가 탄생한 K-목욕의 메카가 부산이다. 목 대표는 “외국 관광객들이 부산을 함께 달린 뒤 목욕하고 교류하는 문화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자산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스무스런’을 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집앞목욕탕>과 매끈연구소는 동래온천부터 시작해 러닝 코스를 만들어 인근 목욕탕과 엮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볼 계획이다.
 라운지 일렁에서 판매하는 파운드 케이크.
				
				라운지 일렁에서 판매하는 파운드 케이크.
				
			목욕탕 덕후 부부에게 들은 이야기다. 달 목욕하러 매일 오는 어르신이 어느 날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이 된 목욕탕 사장님이 집에까지 찾아갔더니, 어르신이 몸져누워 있어서 병원으로 모셨다고 했다. 목욕탕이 잘 진화하면 복지 플랫폼 같은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목욕탕에 가면 아기부터 노인까지 사람의 몸을 볼 수 있다. 목욕탕은 인간이 나이가 드는 모습을 보면서 ‘몸을 사유하는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한 게 너무 오래 전이었다는 후회가 몰려온다. 이번 주말에는 목욕탕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