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기자 songsang@busan.com | 2026-01-18 08:00:00
클립아트코리아
“전기차 외에 다른 차를 사는 것은 경제적으로 미친 짓.” “내연기관차의 잔존 가치는 앞으로 몇 년 안에 급락할 것.”
2019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내놓은 이런 확신은 당시 전기차 시장을 지배하던 낙관론의 정점이었다. 그는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될 것이라며, 가솔린차를 구매하는 순간 해당 자산의 가치는 곧바로 붕괴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골드만삭스와 블룸버그NEF 등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2025년을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의 가격과 효용을 완전히 앞지르는 ‘티핑 포인트’로 지목하며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7년이 흐른 현재 시장의 성적표는 머스크의 예언과는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퇴출당할 것이라던 내연기관차는 하이브리드(HEV)라는 날개를 달고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은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 K배터리 3사 ‘동반 적자’의 충격
이런 위기 국면은 국내 배터리 업계의 실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 배터리 3사는 지난해 4분기 나란히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1년 만에 다시 ‘동반 적자’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맏형인 LG에너지솔루션의 4분기 영업손실은 1220억 원에 달했고, 삼성SDI와 SK온의 적자 규모도 각각 3000억 원에 육박한 것으로 증권가는 추산한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 한때 50%를 넘겼던 국내 3사의 점유율은 지난해 11월 누적 기준 37.2%까지 하락한 상태다.
실적 부진의 배경에는 주요국들의 정책 유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내연기관차를 선호하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전기차 구매 시 지급하던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을 폐지한 것이 직격탄이 됐다. 시장조사업체 콕스오토모티브에 따르면 보조금 중단 직후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전월 대비 48.9% 급락했다. 유럽연합(EU) 또한 2035년부터 적용하려던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규제를 사실상 철회하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연간 실적으로 봐도 LG에너지솔루션만 1조 4285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체면치레했을 뿐, 삼성SDI와 SK온은 연간 영업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포드, 미국 배터리팩 제조사 FBPS 등과의 계약이 잇따라 파기되며 약 13조 5000억 원 규모의 예정 매출이 사라졌다.
■ 109%에서 12%로 성장률 뚝
전기차 시장의 성장률 지표는 이번 위기가 단순한 일시적 조정을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률은 2021년 전년 대비 100%라는 폭발적 수치를 기록한 뒤 2022년 60%, 2023년 35%, 2024년 25%로 가파르게 둔화했다.
BNEF는 지난해 전기차 시장은 외형상 23% 성장을 기록했지만, 이는 중국의 독주가 만들어낸 착시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올해 글로벌 전기차 성장률은 전년의 절반 수준인 12%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북미 시장은 보조금 폐지 영향으로 연간 15~16%의 역성장이 예상되는데, 이는 전기차 시장 개화 이후 첫 마이너스 지표다.
■ 전기차 캐즘은 왜 깊어졌나
업계는 이 같은 수요 급랭을 ‘전기차 캐즘’으로 규정한다. 캐즘은 혁신 제품이 초기 수용자에서 대중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수요가 일시적으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현상을 뜻한다.
전기차 시장은 2021년 얼리어답터를 중심으로 급성장했지만, 이제는 실용성과 경제성을 중시하는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문제는 여건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보조금 축소로 미국에서 전기차 실구매가는 내연기관차보다 1000만 원 이상 비싸졌고, 충전 인프라 부족과 잦은 고장에 대한 불만도 여전하다. 잇따른 화재 사고로 안전성에 근본적인 의문도 제기된 상태다. 여기에 전기차 중고차 가치가 내연기관차의 50~60% 수준으로 급락하면서 자산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대중은 더 이상 ‘친환경’이라는 명분만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기술적 신뢰가 축적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수요 부진에 자동차업계 내연기관 전략 유턴
수요 정체가 장기화하자, 전기차로의 ‘올인’을 선언했던 글로벌 완성차 업체(OEM)들은 생존을 위해 과거 약속을 파기하고 있다.
특히 포드는 간판 차종인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생산을 중단하고 차세대 전기 트럭인 ‘T3’ 개발도 취소했다. GM은 최근 전기차 투자 축소를 발표했고 일부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생산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폭스바겐그룹은 유럽 내 전기차 수요 둔화와 비용 부담 심화를 이유로 독일 드레스덴 공장의 전기차 생산을 종료하고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이 공장에서는 폭스바겐 대표 전기차인 ID.4를 생산해 왔다.
이 같은 완성차 업체들의 ‘내연기관 유턴’은 국내 배터리 업계에 직격탄이 됐다. 북미와 유럽에 공격적으로 건설한 배터리 합작공장(JV)의 가동률은 지난해 50% 수준으로 떨어졌고, 일부 라인은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
■ ESS 전환으로 생존 전략 세웠지만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전기차 수요 회복 시점이 늦어지자, 사실상 성장보단 버티기에 들어간 상태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폭증으로 인한 전력 수요는 전기차 수요 정체를 방어할 강력한 수익원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관세 장벽을 높인 것도 기회 요인이다. 미국은 현재 중국산 ESS 배터리에 40.9%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올해부터 58.4%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미시간 홀랜드 단독 공장과 캐나다 스텔란티스 합작 공장에서 ESS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양산에 돌입했으며 미시간 랜싱 공장도 올해 ESS 양산을 준비 중이다. 삼성SDI는 올해 안에 미국 내 ESS용 배터리 생산 능력을 연간 30기가와트시(GWh)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SK온도 올해 하반기부터 ESS 전용 LFP 배터리 양산에 돌입한다.
ESS 시장에서는 저렴하고 화재 위험이 적은 LFP 배터리의 채택 비율이 압도적이다. 블룸버그NEF는 2027년 글로벌 ESS 시장에서 LFP 채택 비율이 94%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이 시장을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글로벌 ESS 시장 점유율은 CATL(37%), EVE(13%), BYD(9%) 등 중국 업체들이 독식하고 있다. 2020년까지만 해도 50%를 상회했던 국내 배터리 3사의 글로벌 ESS 점유율은 2024~2025년을 거치며 6%대로 추락했다.
2025년 기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 규모는 ESS 시장의 약 10배에 달한다. ESS 시장에서 아무리 선전하더라도 전기차 수요 절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십조 원 단위의 매출 구멍을 채우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수요가 받쳐 주지 않는 이상 실적 모멘텀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