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들이 왜 ‘건담’에 빠지는 걸까

건담 연간 매출 1조 3500억
마치 명상 같은 건담 조립에
연예인 중에도 마니아 많아

프라모델 국내 독보적인 1위
‘반도의 중년’ 닉네임 박진 씨
혼을 다해 10년간 ‘덕업일치’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2026-03-13 09:00:00

지난해 여름 후쿠오카에 갔다가 실물 크기의 ‘건담’을 처음 만났다. 밤에는 건담에 불도 들어오고 머리와 손도 움직인다고 했다. 이처럼 쇼핑몰 ‘라라포트 후쿠오카’에는 건담 파크가 만들어져 후쿠오카 여행하는 재미를 더해줬다. 건담의 인기는 후쿠오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물 크기 건담이 오다이바·요코하마 등 일본에만 3개, 중국 상하이에도 있었다.

우리나라 남자 연예인 중에는 취미가 프라모델 조립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발라드 황태자 테이는 “건담 조립은 나에게 명상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지드래곤, 데프콘, 장우혁, 지진희 등도 유명한 프라모델 마니아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애들 장난감 같은 건담에 빠지는 것일까. 건담으로 대표되는 프라모델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수채화 느낌을 비롯한 다양한 스타일의 건담이 전시되어 있다. 수채화 느낌을 비롯한 다양한 스타일의 건담이 전시되어 있다.

■‘흑역사’와 ‘나무위키’까지 건담의 힘

일단 건담과 프라모델(모형)의 합성어인 ‘건프라’부터 알아야 이 세계 입문이 가능하다. 건프라는 건담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봇을 조립식 모델로 만든 제품을 말한다. 건담은 1979년 일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47년이나 새로운 작품이 제작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세월이 흐르며 청소년기를 건담과 함께 보낸 어른 세대가 늘어나며 건프라 소비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1980년 첫 출시된 건프라는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무려 7억 개가 넘는다.


애니도색으로 3D 제품이 평면의 만화처럼 보인다. 본인 제공 애니도색으로 3D 제품이 평면의 만화처럼 보인다. 본인 제공

건담은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서 수집형 취미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고가의 하이엔드 라인업은 성인들의 구매력 덕분에 출시와 동시에 품절 대란을 일으키고 있다. 2022년에는 건담 시리즈 최초의 여성 주인공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가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화한 건담이 여성과 Z세대를 공략하며 외연을 더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건담 시리즈의 연간 매출은 1조 3500억 원을 넘었다. 일본 열도의 건담이 전 세계적인 IP(지식재산권)로 성장한 것이다. 특히 건프라 수출 물량 중 30%는 한국에서 소비한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로, 한국에서 건프라는 인기가 많다.

비록 건프라 같은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어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건담의 영향권 속에 들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역사나 과거를 ‘흑역사’라고 부른다. 흑역사는 1999년 건담에서 처음 사용된 뒤 현재까지 한일 양쪽에서 널리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다. 중압감을 나타내는 ‘프레셔’도 건담 파일럿이 강한 적에게 느끼는 압박감을 뜻하던 말이었다. 심지어 궁금하면 제일 먼저 찾아보는 ‘나무위키’조차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가 건담 시리즈 팬 사이트였던 서브컬처 사이트 ‘NTX’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박진 씨는 거의 매일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작업한다. 박진 씨는 거의 매일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작업한다.

■주 6.5일 일해 성덕한 ‘반도의 중년’

부산에는 국내에서 프라모델을 가장 잘 만드는 모델러가 있다. ‘반도의 중년’이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진 박진 씨다. 박 씨는 2019년 GBWC(Gunpla Builders World Cup) 한국 예선에서 통합 1위를 차지했다. 16개국 예산 통과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그해

GBWC 결승전에서도 상위 입상했다. 지금도 국내 프라모델 콘테스트에서 매년 1위를 도맡아 한다. 해외에서도 주문 의뢰가 많아 2년 치 작업 물량이 쌓여 있는 국가대표 모델러이다.

부산대 근처 박 씨의 작업실 겸 개인 갤러리로 찾아가기로 약속한 날 마음이 많이 설렜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각종 건담부터 시작해서 드래곤볼, 슈퍼맨, 배트맨 등 영웅들이 모여사는 별세계였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스 베이더는 홍콩의 독보적인 피규어 회사 핫토이와의 콜라보 작품이었다. 진열대 위의 건담은 종류가 많고 수채화 느낌을 비롯해 스타일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애니도색’한 건담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만화를 찢고 나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3D 입체물이 평면의 만화처럼 보일까.

앗! 그녀다. 공각기동대의 여주인공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공각기동대는 영화 매트릭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애니메이션이다. 뇌를 제외하고 모두 기계로 바꾼 그녀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분명 모형인데 너무나도 사람 같은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천차만별인 사람 피부처럼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한다. 원래는 석고 모형 같은 백색의 레진 상태였다. 이걸 깎고, 다듬고, 사포질을 거쳐 도색해서 만들었다니 혼을 갈아 넣은 셈이었다.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아트 토이나 팝아트 작품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말이 맞았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투어 사는 이유가 있었다.

박 씨는 미대를 나왔지만, 프라모델 도색을 독학으로 공부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 남에게 배우면 가르친 사람의 스타일이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독학으로 일정 경지에 오르면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따로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단다. 게임 캐릭터 피규어의 눈 하나 그리는 데 3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덕업일치, 성덕(성공한 덕후)한 전업 작가 모델러 박 씨의 근무시간은 놀랍게도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다. 주 6일 이상 일해 한 달에 보통 4개를 만든다. 이런 생활을 10년을 했다니…. “재능이 있어서 잘하는 게 아니고 많이 해서 실력이 붙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건담은 1979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작품이 제작되고 있다. 본인 제공 건담은 1979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작품이 제작되고 있다. 본인 제공

박 씨는 프라모델이 오타쿠들의 서브컬처에서 양지로 나온 계기를 연예인 관찰 프로그램에서 찾았다. 연예인은 얼굴이 알려져 밖에 나가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 연예인 중에는 프라모델 조립이나 피규어를 수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를 통해 외부로 드러나며 프라모델이 괜찮은 취미라는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모형으로 만들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모형으로 만들었다.

그는 “프라모델 조립은 1만~2만 원만 주고 사서 혼자 할 수 있는 좋은 취미다. 특히나 우울감이 몰려올 때 해 보라”라고 추천했다. 우울감은 원래 지속성이 그렇게 길지가 않지만, 그 시간을 못 넘겨서 큰 문제가 되곤 한다. 프라모델 조립은 집중해야 하기에 힘이 들고 시간도 잘 간다. 끝나고 나면 피곤해서 잠을 잘 자게 되어서 힘든 시간을 넘기기 좋다는 설명이었다. 이전에 심리치료사로 일했다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갔다. 박 씨는 아마도 혼자 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부인과 아이도 있었다. 오타쿠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 업을 부인에게 어떻게 허락받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내가 굶기지는 않을 테니까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거 한 번만 해볼게”라고 호소했단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GBWC 월드 그랑프리 세계 1등이다. 그는 “이 대회가 15년이 되어 가는데 세계 1등은 아직 국내에서 한 번도 안 나온 게 아쉽다. 꼭 1등을 해 보고 싶다. 내가 언제 다른 걸로 세계 1등을 해보겠는가”라고 말했다. 궁금해서 대회를 찾아 보니 세계 1등을 해도 상금이 없고 오로지 명예뿐이다. 사실 모형 제작이 너무 좋아 헤어지기 싫다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공각기동대 그녀가 잘 있는지는 지금까지 내내 궁금하다.


핫토이와 콜라보로 만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다. 본인 제공 핫토이와 콜라보로 만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다. 본인 제공

■건담, 그 다음 타자를 기다리며

건담(건프라)의 고향은 어딜까. 일본 전체 프라모델 출하액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모형의 수도’로 불리는 시즈오카다. 시즈오카는 역 앞 포토 존부터 시작해 우체통, 자판기 등을 프라모델 부품 모습의 조형물로 꾸미고 있다. 프라모델을 시즈오카의 상징이자 관광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매년 5월이면 시즈오카 하비 스퀘어에서는 전 세계 모형 제작자들과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 최대 규모 모형 박람회 ‘시즈오카 하비쇼(Hobby Show)’가 열린다. 여기서 그해의 신제품이 발표되고, 일본 국내외 일반인 모델러들의 합동 전시회도 열린다. 예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은 이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별 볼거리가 없는 도시 시즈오카로 몰려온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건담이 부럽지만, 꼭 부러워만 할 일도 아니다. 한류는 이미 세계적인 인기 몰이 중이고 우리에게도 다양한 웹툰과 핑크퐁(아기상어), 뽀로로, 오징어 게임 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단순히 하나의 콘텐츠에 머물지 않고 게임, 드라마, 굿즈 등으로 확장되는 '슈퍼 IP' 전략이 대세라고 한다. ‘원 소스 멀티 유즈’, 사방으로 치고나가는 것이다. 건담의 성공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담의 뒤를 이을 한국의 다음 타자를 기대한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일본이 만든 건담은 전 세계적인 IP(지식재산권)로 성장했다. 일본이 만든 건담은 전 세계적인 IP(지식재산권)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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