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온천 로드] 한국 대표 온천 다시 부활이다!

'우리 민족의 목욕탕' 동래온천을 빼고 온천을 말하지 마라

2016-01-13 18:57:45

동래온천은 수온이 높고 신경통,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어르신들에게 특히 인기다. 사진은 금천파크온천의 욕탕 모습.

흔한 부산관광안내도. 그런데 동래온천을 소개한 게 드물다. 해운대온천에 대한 정보는 있어도 동래온천은 빠져 있다. 동래온천은 잊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걸까? 지난해 10월 '근대의 목욕탕, 동래온천' 특별전을 열었던 부산근대역사관 하인수 관장은 "동래온천은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은 채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온 '우리 민족의 목욕탕'이었다"고 했다. 뜨끈한 온천이 그리워지는 계절, 하 관장의 그 말을 확인해 봄이 어떨까.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발길
일제 강점기에 본격 개발
1970년대 초까지 화려했던 명성
자타 공인 온천관광 1번지

풍부한 수량·뛰어난 수질·접근성
무료 족욕온천에 스파윤슬길까지
도심 힐링 이만한 곳 있나요
소중한 유산 '옛 명성' 되살려야죠

■목욕물로만 쓰기엔 아까운 온천수

부산마저 영하권으로 떨어진 한겨울의 아침. 부산 동래구 금강로 140-1, 금천파크온천의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싸한 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콧속으로 훅 들어온다. 후끈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물에 찰기가 있다고나 할까. 손으로 비벼보면 매끈매끈하다.

탕이 제법 널찍한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한창 그 기운을 즐기고 있다. 부인과 함께 거의 매일 금천탕을 찾는다는 한 70대 노인은 "동래온천에서 한 번 목욕하고 나면 다른 데선 못 해. 몸이 개운치 못해. 여기 온천은 보약이야. 그래서 수십 년째 단골로 여길 이용하고 있어"라고 했다.

동래온천의 수질은 아직까지 최상급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동래의 옛 모습 사진과 생활 자료를 수집해 온 동래구청 문화공보과 이상길 씨는 "얼마 전 한 대학에서 동래온천의 수질을 조사했는데, 당시 책임 교수가 '목욕물로만 쓰고 버리기는 아깝다. 약수로 먹을 수 있는데'라며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동래의 온천수는 약알칼리성 식염천이다. 마실 수 있는 온천수인 것이다. 위장병, 치질, 부인병, 피부병은 물론 특히 신경통에 효험이 좋아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다.

무엇보다 수온이 섭씨 70도에 육박해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다. 다른 곳은 대부분 30도 안팎(25도만 넘으면 온천으로 법적 인정을 받는다)이고, 높아야 50도를 넘기지 못하는데 동래온천은 특이한 경우다. 너무 뜨거워 오히려 식혀서 공급해야 할 정도다.
온천여관인 봉래관(현 농심호텔)의 1930년대 인공 호수 모습. 배를 띄우고 낚시도 할 수 있는 규모였다.
■개울에 비친 달빛이 청아했던 온천길

동래온천의 온천수가 나오는 용출지역 범위는 동래구 온천1동 95-10, 부산시 소유인 4호 온천공을 중심으로 반경 70m 안에 밀집돼 있다. 대부분의 온천수는 시영 양탕장(揚湯場)에서 뽑아 올려 파이프라인으로 관광호텔이나 공중탕 등의 업소에 공급한다. 시영 양탕장의 경우 5개 천공에서 하루 1천200t 정도의 물을 뽑아 올린다.

자체적으로 온천공을 개발해 사용하는 업소는 현대탕, 중앙온천, 천일탕, 금천파크온천, 만수탕, 녹천호텔, 녹천탕, 허심청, 온천한증막 등 9곳이 있어 각자 취향에 맞게 골라서 갈 수 있다.

농심호텔 옆에 동래온천 노천 족탕이 있다. 2005년 11월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 노천 족탕이다. 원래 새마을금고가 있던 자리인데, 동래구청이 지역 유지로부터 지원을 받아 사들여 운영하고 있다. 아쉽게도 지금은 휴장 중이다. 해마다 1월 1일부터 한 달간과,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휴장한다.

노천 족탕 바로 옆에 스파윤슬길이 조성돼 있다. 녹나무가 100m쯤 심어져 있는, 호젓한 길이다. '스파윤슬'이라는 이름이 예쁘다. '스파'는 온천을 총칭하는 말로 동래가 온천지역임을 의미하고, '윤슬'은 순수 우리말로서 윤이 나고 이슬처럼 청아하다는 뜻. 사실 이 길은 옛날에는 실개천이었다고 한다. 해와 달의 빛이 비쳐 실개천의 물결에 반짝이는 모습. 상상으로도 즐겁다. 동래구청은 스파윤슬길을 부산 중구의 '또따또가 문화의 거리'처럼 예술의 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동래온천 용각.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온천수로 용왕제를 올린다.
동래온천에선 농심호텔 후문 쪽 용각(龍閣)을 꼭 찾을 일이다. 여기에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가 있기 때문이다. 1766년 동래부사 강필리가 동래온정을 대대적으로 고쳐 지은 것을 기념해 세웠다. 용각에는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맞아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은 바다의 신이자 물의 신. 온천에서 나오는 물 역시 용왕이 관장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용왕제에는 술 대신 깨끗한 온천수를 올린다. 온정개건비 앞에는 당시에 쓰던 욕조가 있다.

온천 후엔 곰장어가 제격이다. 온천으로 땀 뺀 몸을 곰장어로 보해 주면 그 기운이 충천한다. 농심호텔 주위로 곰장어집이 10여 곳 성업 중이다. 이전에는 더욱 흥성했으나 IMF 경제위기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1930년대 일본인 전용 욕장.
■일본인이 더 갈망했던 동래온천

동래온천에 전설이 없을 리 없다. 1천500년 전 절룩거리는 학이 땅속에서 솟은 따뜻한 샘터에서 멀쩡해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아픈 다리를 고쳤다는 백학 전설, 눈 내리던 겨울 사슴이 밤마다 잠자고 가는 것이 신기해 가 보니 사방은 눈으로 덮였는데 새싹이 자라고 웅덩이에서 뜨거운 물이 솟았다는 백록 전설이 있다.

신라 때부터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던 동래온천의 가치는 일본 사람도 주목했다. 조선시대에는 쓰시마 사람도 동래온천에서 목욕하기를 원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인의 동래온천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지고, 마침내 1898년 동래온천 최초의 근대식 일본 여관인 야토지여관 건립으로 이어진다.
 
1910년대 봉래관 모습.
이를 계기로 1903년 일본인 전용 여관인 광월루가 세워지고, 또 무역업자 도요타 후쿠타로가 자신의 별장을 짓고 1907년 온천을 직접 굴착해 봉래관(현 농심호텔)을 건립하게 된다. 1917년 동래온천에는 봉래관, 경판정여관, 오이케여관, 나루토여관, 시즈노야 등의 여관이 운영됐다.

동래온천이 빠르게 발달하자 만주철도주식회사가 1922년 동래온천에 50여 만 원을 투자해 대규모 공중욕탕을 개장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인들은 한 달 뒤 동래면이 운영하는 공중욕탕을 개장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경영하는 대규모 공중욕탕, 동래면이 경영하는 공중욕탕, 자체 욕탕을 갖춘 여관이 서로 경쟁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1933년에는 일본식 여관으로는 봉래관, 아라이여관(현 금호호텔), 나루토여관, 횡정관, 동래호텔, 와끼야, 송엽, 시즈노야, 야마구치야 등 9개,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으로 계산관, 금천관, 일신관, 명월관 등 4개가 있었다.
1960년대 초 동래온천 입구.
1930년에 이미 10만 4천253명이 이용한 걸로 기록됐다. 당시 부산부의 인구가 13만 명이 채 못됐음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래온천을 찾았는지 짐작된다.

1945년 광복 무렵에는 기존 여관 외에도 조선인 경영의 동일여관(현 동래온천관광호텔), 내성관, 이향원, 벽초관, 산해관 등과 일본인의 오이케여관, 침천관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후 동래온천은 1964년 금강공원, 1965년 동물원, 1969년 식물원이 개장하면서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온천 관광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래온천을 스스로 잊는 건 아닌지
금천파크온천을 운영하는 김성국 한국온천협회 부회장은 2018년에 대한민국 온천대축제를 동래온천에서 열려고 한다. 온천협회의 온천대축제는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올해는 충남 예산, 내년엔 마금산온천에서 열린다. 김 부회장은 "동래온천의 옛 명성을 되살리고 싶다"고 했다.

동래온천은 1970년대 이후 쇠락해 왔다. 김 부회장처럼 동래온천을 기억하고 부활시키자는 목소리가 높다. 김정달 농심호텔 부총지배인은 "선대가 동래온천을 지킨 것처럼 소중한 온천자원을 아끼고 잘 관리하는 일은 우리 후손의 의무다. 후대도 동래온천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오래전부터 동래온천을 온천문화특구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고, 또 상당 부분 진척이 된 상황인데, 갑자기 온천문화특구는 사라지고 교육문화특구로 지정됐다. 왜 갑자기 그리 됐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승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인문한국교수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1940년 전국에는 21개의 온천이 관광지로 개발됐다. 이들 온천 중에서 조선인이 온천의 배탕권을 갖고 있었던 곳은 동래온천이 유일했다. 동래온천을 지키기 위한 동래 주민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지켜온 동래온천을 스스로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사진=강원태 기자 wkang@

흑백사진=동래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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