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1-22 11:16:23
개척자 정신, 프런티어는 문화 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있어 도시가 더욱 빛난다. 미술·문학·음악·영화·무용 등 각 장르에서 활약하는 부산의 프런티어를 만나본다. 그들로 인해 부산의 문화적 역량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
2002년 25살의 젊은 작가, 정혜련은 ‘생명의 껍질:그녀에게 말 걸기’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부산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첫 개인전부터 색다른 재료와 방식의 작품을 보여줘 관심을 받았다. “친숙하기도 하지만 다른 생명체의 껍질이라는 거부감도 있는 재료가 가죽이다. 가죽 조각을 이어 붙여 두상을 만들거나 부조 형태로 가죽 조각을 벽에 붙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과연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나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했다.”
상업적인 미술 시장이 활발해지고, 비엔날레와 국제적인 대형 미술 행사가 많아지며 작가들이 자신을 어떻게 프로모션해야 할지 갈등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정혜련은 작가로서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2003년 부산시립미술관 신인작가전(‘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과 2004년 대안공간 반디 기획 공모에 당선되며 작품들이 좀 더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기존 가죽 작업에서 나무, 고무 등 재료를 더해 로봇 태권V, 피터 팬, 장화홍련, 피노키오같이 동화와 만화 주인공, 유명 스타를 만들었다. 늠름한 태권V가 혀를 길게 내밀고 있다거나 유명 가수를 광대처럼 표현했다. 내면에 자리 잡은 이데올로기, 우상을 해체하고 인간 본연의 성찰에 대해 생각하자는 의도였다.
2004년 정혜련은 전국 미술계의 관심을 받는 ‘라이징 스타’가 된다. 미술 재단의 공모 사업에 집중한 결과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에 당선된 것이다. 서울대와 홍대 미대가 주름잡던 판에 부산대 출신 정혜련의 수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했다. 2005년 부산청년미술상, 2007년 봉생청년문화상, Seo갤러리 영아티스트, 2008 하정웅청년작가상을 받았다. 이 무렵 정 작가의 가죽 작업은 변화한다. 권위의 상징인 청와대나 국회의사당과 같은 건축물을 가죽 소재의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시리즈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호평받았지만, 과감히 중단한다.
그 이후 정혜련은 놀이공원이라는 주제와 만나게 된다. 정 작가는 “위험한 것들을 돈까지 내고 타게 하는 공간이 기괴하게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가죽 작업에서 벗어나 자작나무를 변형시켜 놀이기구의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을 시작한다. 2010년 부산 비엔날레 메인 작가로 선정돼 부산시립미술관 로비에 작품을 설치했다. 공간과 대화하는 듯한 그 느낌이 짜릿했다. 이때부터 조각보다 공간을 바꾸는 설치 작업에 빠지게 된다.
베니스 비엔날레(2024)를 비롯해 나폴리 비엔날레(2024)로 작가를 이끈 ‘공간 드로잉’이 이때 시작된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드로잉들을 모듈(module)화했고, 공간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했다. 나무와 발광하는 플라스틱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해 빛과 움직임이 공존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한다. 롤러코스터의 레일을 보는 듯, 휘어지고 둥글게 말린 선들이 자유롭게 공간을 유영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정 작가는 공간 드로잉 작업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프랑스에서도 개인전을 잇따라 연다. 송암문화재단 신진작가상, 김종영 미술관 올해의 젊은 조각가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레지던스 작가 선정,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선정, 수림문화재단 미술상, 부산젊은예술가상 등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정 작가의 공간 드로잉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환경 오염에 대한 데이터를 LED 조명과 연동해 드로잉 작품에 심었다. 변화무쌍한 빛과 뒤엉킨 듯 유려한 선을 보며 관람객은 공간 속에 스며든다. 2025년이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정 작가는 여러 곳에서 전시 요청을 받고 있다. 서울 한 식물원과의 프로젝트 전시를 비롯해 미국 뉴욕과 스페인 미술관과도 협의 중이다. 정 작가의 고민은 다시 깊어졌다. “어떤 새로운 걸 보여줄지 늘 고민한다. 작업만 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지역 설치 조각가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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