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KRX 지주사 전환, 코스닥 분리 추진
NXT에 자본시장 떼 주고 또 유턴 우려
야금야금 빼앗긴 기회, 내려앉은 자산 가치
거주지가 계급이 된 사회, 수도권행 부추겨
균형발전, 지방뿐 아니라 서울 사람도 살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2026-02-25 18:11:24

한국에서 지방민으로 산다는 건, 머릿속에 항시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두고, 밤낮 할 것 없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누군가 야금야금 빼내가는 건 없는지를 감시하고, 도둑이 들면 지키기 위해 악을 써야 하는 일인 것 같다. 참으로 피곤하다.

최근 정부와 여당이 한국거래소의 지주회사 전환과 코스닥 자회사 분리를 추진하면서 지역 내 반발이 커지고 있다. ‘서울거래소 출범’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생겨난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NXT)가 이미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 중인데, NXT에 자본시장의 3분의 1을 떼어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국거래소마저 배를 갈라 서울에 떼어주려 하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전례 없는 강한 어조로 항의 표시를 하고, 국회 정무위원장을 긴급 방문한 이유다. 특히 부산 금융 생태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거래소가 지주회사로 전환이 되면, 본점 소재지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희박해지면서 코스피, 코스닥 등 핵심 자회사들이 서울로 ‘유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자본시장의 핵심축 중 하나인 코스닥이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로 회귀하는 순간, 부산 금융중심지는 글자 그대로 ‘빈 껍데기’가 된다. 달라는 산업은행은 안 주더니, 있는 것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는 스위치를 켜고 보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허울 좋은 약탈’들이 눈에 보인다. 2005년 증권과 선물을 통합한 한국거래소가 부산에 출범한다고 좋아했지만, 이후 주요 기능과 전산은 서울로 다 옮겨가면서 부산에 있던 선물회사들은 자취를 감췄다.

에너지 정책은 더 가혹하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 곳들에만 원자력발전소를 지어 놓고, 고압 송전탑을 곳곳에 박아 싼값에 전기를 서울로 쏘아 올린다. 사고 위험과 불안은 지방민이 짊어지고, 그 혜택은 서울의 마천루들이 오롯이 누린다. 한국예탁결제원이 금 보관소마저 본사가 있는 부산이 아닌 수도권에 지으려다 부산에서 기를 쓰고 반대하자 겨우 방향을 튼 사건은, 지방민이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티도 안 나게, 서서히 야금야금 빼앗긴 것들은 더 많다. 사람뿐 아니라 돈도 서서히 서울에 집중되면서 지역에서는 대출해 줄 돈이 모자라 서울에서 돈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 부산은행의 수신액(예금성) 중 부산에서 조달한 비율은 66.9% 수준으로 최근 6년 사이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2020년 12월 말 기준 72.46%에 비하면 5년 만에 확연히 줄어든 수치다. 부산 기업, 개인에 대한 대출 비중은 전체의 74.16%인데 부산에서는 빌려줄 돈이 없으니 서울까지 가 높은 비용을 들여 조달해 오고 있다. 부산에서 힘겹게 벌어 들인 돈은 서울로 쉽게 흘러가고, 부산 기업은 다시 그 돈을 비싸게 끌어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야금야금 빼앗겨버린 기회와 야금야금 내려앉은 자산의 가치는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더 밀어올리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공간의 위계가 곧 계급의 위계가 되어버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사회 인식은 지방민들의 자존감을 앗아간 무서운 약탈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공간에 새겨진 계급 차이도 문제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이 그 차이를 정당화하는 인식의 구조화라고 경고했다. 서울은 ‘세련되고 효율적인 곳’, 지방은 ‘낙후되고 보조금을 축 내는 곳’이라는 낙인은 지방민을 위축시킨다.

부산 시민들은 단순히 경제적 자산만 잃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회와 존엄을 박탈 당하고 있다. ‘인서울’ ‘대기업’ 우위의 사회에서 지방민은 거주지, 출신학교가 지방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배경을 낮게 평가하도록 길들여짐으로써 폭력적 방식으로 계급에서 밀려나게 된다.

한국거래소를 지키는 것은 단순히 ‘공공기관’ 하나를 부산에 묶어두는 일이 아니다. 이는 자본의 상징을 지역에 두고, 부산의 청년들에게 서울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강력한 제동 장치다. 부산의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당당히 ‘자본의 주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지키는 일이며, 거주지가 곧 계급이 되어버린 설계도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지방민만 살리는 게 아니다. 숨도 못 쉬도록 빽빽한 곳에서 살인적인 경쟁에 내몰려 있는 서울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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