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세상을 바꾼 한 여성의 고백

■노바디스 걸/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희대의 아동성폭력범 엡스타인 사건
피해 생존자가 쓴 회복과 투쟁 기록
세계적 유명 인물들 가해자로 연루
처벌을 위해 고통스러운 과거 증언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6-03-15 09:00:00

미국 뉴욕 맨해튼의 연방법원 앞에서 엡스타인의 얼굴 팻말을 높이 들고 시위하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연방법원 앞에서 엡스타인의 얼굴 팻말을 높이 들고 시위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라는 광고가 실렸다. 연합뉴스 지난해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라는 광고가 실렸다.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성년자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자료를 모두 공개하라며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성년자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자료를 모두 공개하라며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한국에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이 책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미국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전 세계 100만 부가 판매되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책이 드디어 수십 권의 신간들과 함께 신문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출판면 톱기사로 이걸 쓸 수 있을지 꽤 망설였다. 656쪽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운 건 절대 아니다. 이 아픈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이 책이 가진 중요성과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엡스타인 사건’ ‘엡스타인 파일’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빌 게이츠, 앤드루 왕자, 도널드 트럼프, 일론 머스크, 노엄 촘스키 등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권력자들이 희대의 아동성폭력범 제프리 엡스타인의 성 접대를 받았고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언론과 사람들은 억만장자인 앱스타인의 소아성애 취향과 얼마나 엽기적인 성행위가 있었는지 초점을 맞추었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명단에 집중하고 있다. 잔혹한 아동성폭력 범죄가 여전히 권력자들의 스캔들로 치부되고, 회복과 정의를 염원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뒷전으로 밀린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엡스타인과 그의 조력자 맥스웰을 심판하는 데 앞장섰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피해를 적나라하게 밝힌 장본인이다. 철저하게 생존자의 시점으로 쓴 이 책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에게 성폭력 당한 이야기부터 그런 집에서 탈출했지만, 거리에서 만난 어른에게 다시 몸과 마음을 유린당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리조트에 취직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거기서 엡스타인의 범죄 조력자 맥스웰을 만난다.

맥스웰은 소녀들이 원하는 걸 돕겠다며 접근한다. 저자는 리조트에서 일하며 틈틈이 해부학책을 읽으며 마사지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운다. 그런 저자에게 맥스웰이 일을 조금 도와주면 마사지 배우는 걸 지원하겠다고 접근했고, 이후 3년간 앱스타인을 비롯해 그의 지인, 손님들에게 성폭력과 착취를 당한다.

저자가 책에 기록한 엡스타인과 공범들의 범죄 실상은 읽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피해 상황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무참한 폭력을 응시해야 피해자들에게 회복의 가능성이 열리고 가해자들을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년 만에 엡스타인에게서 탈출했지만, 이후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공황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약물 중독에 시달리며 삶을 누릴 능력을 상실하고 되돌릴 수 없는 영구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걸 알게 된다. 수년이 흘러도 엡스타인과 가해자들의 망령이 떠올랐고, 언제든 앱스타인이 자신을 찾아내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엡스타인을 단죄하기 위해 증언하고 얼굴을 공개하며 언론 인터뷰를 한 건 딸을 출산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절대 겪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나아가 지금도 고통을 당하고 있을 소녀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1년 엡스타인과 맥스웰을 고발했고, 유명인을 가해자로 공개하며 저자는 ‘거짓말쟁이’ ‘꽃뱀’ ‘창녀’ ‘관종’이라는 모욕에 시달린다. 심지어 가해자로 지목한 유명인의 팬으로부터 살해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쏟아지는 모욕을 받아내며 저자는 증언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다른 피해 여성들도 동참한다.

권력자의 비호 속에 엡스타인은 2019년에야 성매매 혐의로 체포되었고, 성폭력 인신매매에 관한 법안의 개정까지 끌어 낸다. 하지만 저자는 2025년 4월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실 이 죽음 역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제목인 ‘노바디스 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소녀’라는 저자의 외침이다. “약탈자들이 비호받는 대신 죗값을 치르고 상처받은 이들이 수치심 속에 숨는 대신 따뜻한 연민으로 보호받고, 막강한 권력을 쥔 자들도 누구와 다름없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는 세상을 꿈꾼다”라는 저자의 말은 너무 당연하지만, 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다.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지음/김나연 옮김/은행나무/656쪽/2만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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