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이 재조명됐다.
5일 방송된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서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 나혜석의 생애를 다뤘다.
나혜석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인재였다. 그녀는 여자유학생 학우회 기관지인 '여자계' 발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발표했다.
'경희'에는 "아버지가 시집가면 좋은 옷에 생전 배불리 먹다 죽지 않겠니? 하실 때에 경희는 그 무서운 아버지 앞에서 평생 처음으로 벌벌 떨며 대답했다. 남편이 벌어다 준 밥을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집 개나 다를 바 없지요!"란 내용이 적혀 있는 등 페미니스트다운 색채가 가득했다.
또 1918년 귀국해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룬 적도 있다.
이 가운데 나혜석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소신을 뒤로한 채 자신을 6년간 짝사랑했던 변호사의 청혼을 끝내 받아들였다.
그녀는 결혼의 조건으로 "그림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 것,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평생 나만 사랑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혼 뒤 나혜석의 1921년 열린 첫 개인 전시회에서는 5천여명의 관람객이 동원됐으며, 작품 20여점이 고가에 팔리는 등 여성 서양화가로 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녀는 곧 학업에 갈증을 느꼈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자유사상에 흠뻑 젖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나혜석은 최린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혜석은 남편으로부터 결국 이혼을 당했다. 이에 나혜석은 당시 여자들에게만 강요되던 정조에 항의하는 '이혼 고백서'(1934)를 발표했다.
'이혼 고백서'에는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흐트러지기도 하고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의 남성으로 여겨졌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뒤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됐다. 더불어 경제적 어려움과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나혜석은 심신이 병들어 갔다.
그녀는 양로원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갔다. 그녀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행려병자가 돼 서울의 한 거리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시대를 앞서 갔던 그녀의 삶은 비극을 맞았지만 뒤늦게 그녀의 삶은 근대적 여권론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 페미니스트적 화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김견희 기자 kh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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