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이어주는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 아시나요?

인지력 떨어지는 노인도 대화 절실
요양병원·경로당 등 교구 활용 수업
원목 조각 눕히고 쌓고 뒤집다 보면
인지력 높이고 이야기 보따리 ‘술술’
부산 노인생활과학연구소 만든 교구
지도사 배출하고 해외 진출도 추진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2026-03-27 07:00:00

이 모(87) 씨는 지난해 연말 10년도 넘게 돌보던 아내를 요양원에 보냈다. 대신 집과 멀지 않은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보기 위해 이틀에 한 번씩 면회하러 간다. 하지만 지극정성의 이 씨도 인지가 거의 없는 상태의 부인과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는 않다. 그동안에는 주로 예전 사진을 가지고 가서 이야기를 건넸다. 어느 날부터 아내는 지겨워졌는지 사진을 보지 않으려 했다. 이 씨는 궁여지책으로 장난감을 구해서 들고 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 장난감이 팔순의 노인과 잘 맞지 않아 고민이라고 했다. 아이는 미래지향적이고, 노인은 과거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있는 가족 면회를 하러 가서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인지력이 떨어진 노인과의 소통을 도와줄 뭔가가 없을까.


노인교구 중 ‘세상이야기’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노인교구 중 ‘세상이야기’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요양원에도 봄은 찾아오고

부산 남구 그랜드자연요양병원은 입원 노인들에게 ‘노인교구’로 수업한다고 했다. 아직 세상에 낯선 노인교구가 궁금해서 찾아갔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성 노인 8명이 휠체어를 타고 모였다. “안 오려고 하다가 당신 보고 싶어서 왔다.” “당신 나이가 몇 살이고? 88세면 나보다 한 살 적네. 한 살이나 두 살 차이면 친구 아이가.” 낯이 익은 분들 사이에서 반가운 인사가 오고 갔다. 마스카라를 예쁘게 하고 온 분도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가요?” 하혜연 노인교구 지도사는 날짜를 물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의외로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인지 능력 중 시간, 장소, 사람을 인식하는 능력을 지남력(指南力)이라고 한다. 인지 기능이 약해질 때 시간에 대한 지남력이 가장 먼저 손상되기 때문이다. 몸풀기 체조로 볼 돌리기부터 시작했다. 손에 힘이 있어야 밥도 잘 먹을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교구 수업은 몸풀기 체조로 볼 돌리기부터 시작한다. 교구 수업은 몸풀기 체조로 볼 돌리기부터 시작한다.

이날은 노인교구 중 ‘세상이야기’로 수업하는 날이었다. 세상이야기는 반원 모양의 크기가 다른 8개 원목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 개를 모으니 원이 된다. 하 지도사의 말에 따라 세상이야기를 만지고, 개수를 확인하고, 눕히고, 세우고, 뒤집었다. 쌓고, 배열하고, 곡선을 만들어 이었다. 세상이야기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과 다리로도 변신했다. 노인들은 교구를 가지고 놀 줄 알았다. 순간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각자가 머리를 써야 하니 인지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사람과 짝지를 해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만들라고 했다. 얼굴이라면 눈, 코, 입, 귀가 있어야 한다. “반원 모양의 원목 8개로 얼굴을 어떻게 만들라고….” 지켜보던 기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반면에 이미 교구가 손에 익은 노인들은 거침이 없었다. 이내 활짝 웃는 얼굴이 여기저기서 탄생했다. 어디선가 “내 눈이 왜 짝짝이고”라며 타박이 터져 나왔다. “교구가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라고 설명해도, “나는 코를 오뚝하니 예쁘게 만들었는데 저게 뭐꼬”라며 불만이다. 아예 자기 교구까지 건네면서 새로 만들어 달라니 난감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아얀 그때 꿈을~.” 이 상황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노래 ‘얼굴’이었다. 치매가 진행되더라도 노래는 가장 마지막까지 뇌에 남는 아주 특별한 기억 중 하나라고 한다. 가족의 이름은 잊어도 젊은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 가사와 멜로디는 기억한다는 사실이 신비하면서도 슬프다.


노인교구 중 ‘세상이야기’로 얼굴을 만들고 있다. 노인교구 중 ‘세상이야기’로 얼굴을 만들고 있다.

수업은 자기 얼굴 만들기 순서로 이어졌다. 누가 누가 예쁘게 만드나 경쟁하는 초집중 시간이었다. 다 만든 뒤에는 칭찬하기다. “OOO야, 이만하면 예쁘다”, “한국에서 안 빠진다”, “복스럽고 예쁘고 좋다”, “이 중에서 제일 예쁘다”…. 하 지도사는 “어르신들,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열심히 잘사셨다. 자신에게 ‘사랑해!’라고 하면서 안아 주라”라고 말했다. 여전히 예쁜 자신에게 꽃다발도 만들어 선사했다. 어느덧 수업을 마칠 시간이다. 같이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는지 묻자, ‘나의 살던 고향(고향의 봄)’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봄이다. 비록 꽃 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요양병원에도 울긋불긋 봄이 오고 있었다.

그랜드자연요양병원은 일주일에 한 번 노인교구 수업을 한다. 이날 모인 분 중에는 귀가 잘 안 들리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분도 있었다. 일반 경로당에 가면 노인교구를 이용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다. 그랜드자연요양병원 이지영 팀장은 “지금은 잘하시지만 처음에는 낯설어서 손도 못 대던 분들도 있었다. 그냥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교구로 수업을 하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1~2주 전에 있었던 일을 비롯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래서 노인교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는 10가지로 구성되었다.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는 10가지로 구성되었다.

■부산이 개발한 노인교구 전국구로

노인에게 놀이와 보드게임이 보급되고 있지만 노인교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찾아보기 힘들다. 노인 교육이 아직 제대로 된 교육 과정으로 구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산 연제구에 있는 노인생활과학연구소(소장 한동희)가 개발한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는 이 분야의 선구자다. 일선 현장에 도입된지 벌써 10년이 넘고, 지난해까지 총 600명 이상의 노인교구 지도사를 배출했다.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는 균형의자 이야기, 담벼락 이야기Ⅰ·Ⅱ, 바느질 이야기Ⅰ·Ⅱ, 자석한글 이야기, 자석숫자 이야기, 세상이야기, 칠자 이야기, 마음의 영양소 볼 등 총 10가지로 구성되었다. 교구는 건강한 노인부터 치매 노인까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건강한 노인은 치매 예방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고, 치매 노인은 교구를 통해 치매 상태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교구를 거부해도 호기심으로 만지고 뭔가를 만들어 자신의 세계를 설명하고, 이야기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교구의 이름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인에게 마음의 영양소를 공급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노인교구는 꾸준한 지도사 배출로 부·울·경, 대구·경북, 서울·경기 지역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 액티브에이징혁신센터(ACAI)에서 소개되어 관심을 모았고, 일본과 태국 진출도 추진되고 있다. 노인이 많은 도시 부산이 자랑스럽게 내놓을 만한 노인교구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사 김진휘 씨(왼쪽)와 김미옥 씨가 교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도사 김진휘 씨(왼쪽)와 김미옥 씨가 교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도록 도와주세요

지난 11일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열린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 지도사 발대식은 특별했다. 노인일자리 사업이 전국 최초로 배출하는 노인교구 지도사들이기 때문이었다. 신중년 일자리 사업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이상적인 ‘노노(老老)케어’의 모습이었다. 이날 새롭게 지도사가 된 18명은 모두 연제구에 거주하는 60세 이상이었다. 3 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뚫고 면접에 합격한 뒤 40일가량 교육을 이수하고 지도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보수가 많지 않지만, 사회에 봉사하는 일자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노인을 가까이 해보지 않아 그동안 노인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되지만 사실 노인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교사 출신의 김진휘 씨는 “교구로 실습을 하며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처음엔 노인교구가 단순한 장난감인 줄 알았는데 어르신들의 생각을 끄집어내서 얘기할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하는 잘 만든 도구였다”라고 말했다. 또 김미옥 씨는 “공무원을 퇴직하고 놀다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지원했다. 교구를 배우며 스스로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덜 알려진 노인교구를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힘쓰겠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노인생활과학연구소 한동희 소장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되지만, 노력하는 사람만이 성장한다. 노인 한 분 한 분에게 찾아가서 손을 잡아주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드러내도록 돕는 것이 어떤 보약보다도 귀한 처방이다. 여러분이 이웃과 마을을 지키는 그런 모형을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지난 11일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 지도사 발대식이 열렸다. 지난 11일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노인교구 ‘마음의 영양소’ 지도사 발대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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