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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백년하청 부산·경남 먹는 물, 복류수 해법 될 수 있나
안전한 먹는 물 확보 문제는 부산·경남 주민들의 숙원이다. 낙동강에 의존해 먹는 물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한 먹는 물 확보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동강 오염으로 인해 먹는 물의 안전에 비상이 걸리자 그동안의 정책은 상수도에 공급할 대체 취수원을 찾는 데 집중돼 왔다. 소위 ‘취수원 다변화’로 일컬어지는 해당 정책은 다양한 시도로 이어졌으나 결실을 내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정부는 다른 취수원을 찾기보다 취수 방식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나섰다. 현 정부 임기 내 부산·경남 식수 문제 해결까지 언급할 정도이니 새 시도에 비상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 6일 기후에너지환경부 국감 때 대구에서 진행 중인 복류수 실증에서 수질 개선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강바닥 아래 모래와 자갈층을 통과하며 걸러진 상태로 끌어 올린 복류수가 대구에서 수질 개선 효과를 보인 만큼 하류에서도 실증을 거쳐 취수원 사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김 장관은 이어 “현 정부 임기 내 부산·대구 식수 해결이 목표”라며 낙동강 하류 실증 조기 착수를 예고했다. 그동안 정부가 내놓은 남강댐·합천댐과 합천 황강 복류수, 창녕 강변여과수 활용 방안 등이 지역 갈등과 주민 반대로 인해 좌초했던 것보다는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평가다.
이 같은 평가에도 지역에선 해당 정책이 안전한 먹는 물 확보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우선 개선을 확인했다는 복류수가 과불화화합물이나 녹조 독소 같은 유해물질까지 제대로 걸러진 상태인지부터 불명확한 상태다. 먹는 물 확보를 위해 대량의 물을 채취해도 정화 효과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여부도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대구 지역에서 일부 정화 효과가 확인됐다고 하더라도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유입되는 오염물질을 방치한 상태로는 하류에서의 정화 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현 정부 임기 내 부산·경남 식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언급이 섣부르게 들리는 이유다.
정부가 이번에 제시한 복류수 채취 방안은 취수 방식의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취수원 이전을 통한 다변화 정책이 주민 반대나 지역 갈등 리스크로 인해 발목이 잡힌 과거가 되풀이돼 왔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2024년 기준으로 낙동강 수계에 하루에만 약 47만㎥의 폐수가 흘러들어오는 현실을 감안하면 복류수가 현재로서 근본 해결책이 되기엔 역부족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취수원 그 자체인 낙동강의 수질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취수 방식을 아무리 바꾼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너무나 명확하다. 결국 부산·경남의 먹는 물 문제는 돌고 돌아 낙동강 수질 개선과 직결됨을 재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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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누리호 5차 발사 성공, 민간 우주항공 시대 속도 내야
민간 주도로 추진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5차 발사가 성공했다. 7일 발사된 누리호는 처음으로 초소형 군집위성 5기를 목표 궤도에 성공적으로 투입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지난해 11월 4차 발사 성공에 이어 우리나라의 다중위성 수송 역량과 발사 신뢰성을 높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차 발사 실패 이후 4회 연속 성공 기록을 이어가며 ‘뉴스페이스’ 시대 가능성을 높였다. 민간이 주도하는 상업 발사 서비스로의 전환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5차 발사에는 부산대와 조선대가 공동 개발한 큐브위성이 탑재되는 등 부산과 울산, 경남 등 동남권 우주항공 산업 생태계의 발전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리호는 이날 예정 시각인 낮 12시 25분에 주탑재 위성인 초소형 군집위성 2∼6호 5기와 큐브위성 10기 등 위성 15기를 싣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3차와 4차 등 과거 발사 때는 센서 신호 이상 등으로 발사가 미뤄졌으나 이번엔 처음으로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발사되면서 한층 안정적이면서 진보된 기술력을 입증했다. 이어 초소형 군집위성들을 목표 고도인 570㎞ 기준 오차 범위 15㎞ 이내인 575∼580㎞에서 분리했다. 큐브위성 10기 중 1기를 제외한 9기가 모두 사출된 점도 고무적이다. 누리호 5차 발사 성공으로 민간이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와 발사체 상용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그동안 1∼3차 발사는 항공우주연구원이 누리호 제작을 주관했으나 한국형 발사체 고도화 사업으로 추진된 이번 5차와 4차 발사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관련 작업을 총괄했다. 4차 발사를 통해 민간 우주항공 시대 가능성을 검증했다면 5차 발사는 민간 주도 전환을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5차 발사 준비와 운용 과정에 투입된 민간 관계자도 대폭 증가했다. 부산대와 조선대의 큐브위성 ‘CPSat’의 경우 부산대 항공우주공학과 연구팀이 자세결정 및 제어시스템 전반의 개발을 담당했다. HD현대중공업도 발사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설계, 운용하며 성공에 기여했다.
이번 발사 성공을 계기로 우주개발에 대한 민간 기업의 역할은 한층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동남권도 우주항공복합도시인 경남 사천시를 중심으로 한 동남권 산업 생태계를 한층 고도화시켜 우주개발 상업화 시대를 주도할 준비에 나서야 한다. 지역 대학의 우주 전문 인력 양성과 위성 등 관련 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해 우리보다 앞선 미국 등과의 격차를 최대한 빨리 좁혀야 한다는 과제도 남겨졌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민간 기업과 대학에 대한 지원을 대대적으로 늘리는 것은 물론 민간 이양 분야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민간 우주항공 시대를 위한 민관의 적극적인 협업과 기술 고도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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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 물 들어온다
“요즘 부산에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도시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시기인가 보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듣는다. 도심 친수공원에 느닷없이 나타난 상어 부캉이가 단연 주인공이다. 시작은 평일과 주말, 도심과 자연 할 것 없이 곳곳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이면서부터였다. 대만 여행객들의 ‘부산병’은 처음엔 과장 아닌가 했다. 국내에서도 부산에 대한 선망을 고백하는 타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정말 그런가 싶다.
규모 자체가 커진 K관광 중에서도 부산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면 자연 환경과 문화·관광 자원, 라이프스타일과 같은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정부 정책이나 상업적 기획보다 부산만의 풍경, 부산만의 지역성, 부산만의 역사를 품은 콘텐츠들이 사람들을 자발적인 팬으로 만들었다. 10월의 부산을 들썩이게 한 부캉이와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도 마찬가지다.
북항친수공원은 장벽 너머 삼엄한 보안 구역이던 노후 항만을 재개발한 곳이다. 피난과 파병 부두에서 경제발전 신화를 이끈 수출 역군의 현장을 지나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친수공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을 20일째 떠나지 않고 있는 상어는 소셜 미디어에서 ‘부캉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단숨에 친근한 존재가 됐다. 부산 시민들조차 잘 모르던 ‘북항’까지 전국에 알린 건 부수적인 효과다. 2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주문한 ‘슬리퍼를 신고 가서 즐길 수 있는’ 북항 재개발의 비전이 부캉이로 실현된 셈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31년 전 ‘지방에서 무슨 영화제냐’는 냉담한 시선 속에서 아시아 대표 영화제를 꿈꾼 영화청년들의 열정에서 출발했다. 공식 약어는 영문 앞 글자를 따서 BIFF다. 처음에는 PIFF였다. 부산이 로마자 표기법상 ‘Pusan’에서 ‘Busan’으로 바뀐 뒤에도 수년간 개명을 미뤘다. 공식 명칭과 상관 없이 전국의 영화 팬들은 ‘부국제’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바다 어귀의 전용 상영관뿐 아니라 커뮤니티비프와 동네방네비프의 이름으로 부산 전역을 찾아간다.
지난 주말 열광 속에 끝난 부산국제록페스티벌도 있다. 2000년 제1회는 7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렸다. 이후 다대포해수욕장을 거쳐 지금의 탁 트인 삼락생태공원으로 무대를 옮겼다. 2019년 유료화를 결정할 때는 논란도 있었다. 이제는 전국에서 4만 명 넘는 유료 관객이 몰리는 국내 1위 음악 축제로 자리 잡았다. 관객들은 특히 8년째 누적 17억 원을 후원한 부산 기업 대선주조의 소주 하이볼바나 사상구 한신2차아파트부녀회의 부추전과 소고기국밥 부스 같은 지역성에 호응한다.
물론 관광도시가 곧바로 도시 전체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부산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관광산업을 넘어 도시 전체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인구 정책 측면에서 보면 일자리보다 부산만의 차별화된 문화 환경과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전문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좋은 일자리가 적어서 청년이 떠나니까 대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맞지만, 가고 싶은 도시,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면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창업을 하고 기업이 인재를 따라올 수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소개한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연구도 비슷하다. 5개 대륙 80개 도시, 약 1만 7000명을 조사한 결과 도시가 제공하는 일상 생활의 질에 만족하는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보다 직무 만족도가 30%포인트나 높았다. 소위 ‘경험 보너스’가 도시의 규모나 편의 시설의 숫자보다 훨씬 중요했고, 젊은 층일수록 더 그랬다. 보고서는 인재들은 갈수록 이미 유명한 대도시가 아니라 일상 생활이 더 풍요롭고 더 연결되어 있으며 더 개방적이고 가능성으로 가득 찬, 떠오르는 도시를 선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콜로라도주의 인구 10만 소도시 볼더와 텍사스주의 주도 오스틴이 모델로 꼽힌다. 볼더는 로키산맥 관광의 거점이자 첨단 기술 산업과 웰빙 산업이 집중된 ‘스타트업의 성지’다. 오스틴은 매년 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예술축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주요 사업장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초로 스타트업 비자를 도입해 청년 인구비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후쿠오카도 가까운 예다.
물이 들어올 때는 일단 노를 저어야 하고, 동시에 다음 파도를 대비해 배도 지어야 한다. 공공기관을 유치하고 대기업을 모셔오는 것은 어렵고 또 중요하다. 이미 갖고 있는 부산의 소프트파워 자산과 그 토대 위에서 싹트고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키워내는 것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금 좋은 파도가 물러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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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외면받는 청약통장
1977년 3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목화아파트 분양 경쟁률은 44.6 대 1이었다. 312채를 공급한 이 단지에 1만 3926명이 신청한 것이다. 주변 사람의 이름을 빌려 100채 이상을 한꺼번에 신청한 사람도 있었다. 목화아파트를 필두로 1977년 공급된 여의도 아파트들은 선착순 분양 방식이나 추첨 방식을 주로 택했다. 그러나 이 방식이 부동산 투기와 소유의 편중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자 체계적인 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커졌다. 1977년 8월 주택청약 제도가 탄생한 배경이다. 이 제도에선 공공부문 주택의 청약 자격을 국민주택청약부금 가입자로 한정했다. 이듬해인 1978년부터 민영주택에도 주택청약 제도가 적용됐다.
주택청약 제도는 주택보급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재원을 공급했다. 선(先)분양 제도를 통해 분양받는 사람들이 건설사에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급하면 건설사는 이 돈으로 건설 자금을 충당했다. 수요자들이 주택청약 상품에 가입해 붓는 예치금은 저리로 공공부문의 주택 재원으로 사용됐다. 과거 청약통장에는 청약예금, 청약부금, 청약저축이 있었다. 청약 예금·부금은 민영주택(부금은 85㎡ 이하), 청약저축은 국민주택만 분양받을 수 있었다. 2009년 출시된 주택청약종합저축은 국민주택과 민영주택 모두에 청약할 수 있는 ‘만능 청약통장’이었다. 2015년 9월부터 청약예금·부금 신규 가입이 중지됐고, 주택청약종합저축에만 가입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2024년 10월부터 기존 청약예금·부금·저축을 주택청약종합저축으로 바꿀 수 있는 ‘입주자저축 전환 제도’를 시행 중이다.
20·30대의 청약통장 해지 건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따르면 20·30대 청약통장은 2024년 5만 좌(가입 153만, 해지 158만), 2025년 7만 좌(가입 106만, 해지 113만)가 줄었다. 올해는 8월까지 8만 좌(가입 67만, 해지 75만)가 줄어 지난해 연간 순감 규모를 이미 넘어섰다. 서울 등 수도권에선 치솟는 분양가와 높은 경쟁률, 엄격한 대출 규제 등으로 청약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올 8월 기준 서울에서 분양된 전용 59㎡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5억 9343만 원이었다. 반면 지방에선 미분양이 많아 청약통장 없이도 신축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다. 청약통장은 절약해서 모으면 미래에 번듯한 집이 생길 수 있다는 희망의 징표였다. 하지만 20·30대가 청약통장을 외면하는 세태를 보면서 청약 제도의 주거 사다리 역할이 흔들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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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아이들에게 ‘공부의 기쁨’을 돌려주자
최근 우리 교육계는 거센 입시 개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다. 문·이과 통합형 수능과 고교 내신 5등급제를 뼈대로 한 28학년도 대입 개편안이 현실로 다가온 데 이어, 국가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중장기 대입 개편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수능 전 과목 절대평가, 서·논술형 평가, 수시와 정시의 통합 여부 등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학부모와 교육 현장은 또다시 정책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밑바탕에는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다. 지금의 정답 맞히기식 교육으로는 눈앞에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시의 틀과 평가 방식을 바꾼다고 해서 교실의 배움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바꾸기에 앞서 우리가 ‘배움’이라는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창의성 발현되는 궁극적 뿌리는 호기심
세상을 향한 의문, 알고 싶다는 갈망은
새로운 생각 싹 틔우는 유일한 자양분
스스로 묻고 오래 탐구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앎 닿았을 때 번지는 환한 미소
배움을 대하는 우리 태도부터 바꿔야
‘논어’의 첫 문장은 잘 알려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를 흔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해석하고 학습의 중요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문장의 무게중심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핵심은 ‘학(學)’이나 ‘습(習)’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열(說)’, 즉 마음에 차오르는 참된 ‘기쁨’과 ‘희열’에 닿아 있다. 배움의 끝에 있는 것은 기쁨과 희열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몰랐던 세계의 문이 열리고,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리며, 사물의 이치를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때 찾아오는 지적 희열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의 만족과는 다르다. 어쩌면 공자의 제자들이 이 문장을 ‘논어’의 첫머리에 놓은 것도 배움의 본질이 지식의 축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앎에서 비롯되는 기쁨에 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육에서는 이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21세기에는 생성형 AI가 인간이 오랜 시간 축적해야 할 지식을 몇 초 만에 찾아내고 정리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과 정형화된 문제 풀이에서 인간은 기계보다 효율적이기 어렵다. 그래서 교육은 최근 창의성을 강조한다.
창의성은 교과서에 밑줄을 긋거나 주입식 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다고 해서 길러지는 능력이 아니다. 창의성이 발현되는 가장 궁극적인 뿌리는 바로 ‘호기심(Curiosity)’이다. 세상을 향해 품는 순수한 의문과 알고 싶다는 갈망이야말로 새로운 생각을 싹트게 하는 유일한 자양분이다. 호기심이라는 불꽃이 마음속에서 타오르지 않는다면 어떤 창의적 통찰도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 호기심으로 가득 찬 탐험가였다. 흙바닥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만 보아도 쪼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고, 부모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왜?”라는 질문을 쏟아냈다. 세상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을 때마다 눈동자는 반짝였다. 아이들에게 배움은 고통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가장 신나는 놀이이자 마법 같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호기심은 조금씩 사라진다. 정해진 정답을 남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야 하고, 오답은 감점으로 이어진다. 질문도 교사의 의도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틀리지 않기 위해 남의 생각을 따라 하고, 엉뚱한 상상을 스스로 검열한다. 배움은 어느새 탐구가 아니라 경쟁이 되고, 공부는 참아내야 하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개혁은 평가 방식만 바꾸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술형 평가를 도입한다고 해서 갑자기 창의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수능의 절대평가 전환만으로 질문하는 학생이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평가 방식이 또 다른 ‘점수 따기 기술’로 변질된다면 교육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미래 교육은 아이들이 다시 질문하도록 만드는 교육이어야 한다. 질문은 정답을 몰라서 생기는 부족함이 아니라, 알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배움의 문이다. 좋은 교육은 그 문을 닫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엉뚱한 질문도 존중받고, 실패와 오답도 새로운 발견으로 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는 교실이어야 한다. 교사는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학생의 질문을 더 깊은 탐구로 이끄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입시제도를 바꾸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보다 먼저 바꾸어야 할 것은 배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인지도 모른다. 공부가 고통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설렘이 될 때, 아이들의 잠재력은 비로소 피어난다.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잃어버린 호기심을 되찾아주자. 스스로 묻고, 오래 탐구하고, 마침내 새로운 앎에 닿았을 때 번지는 그 환한 미소. 우리가 미래 교육에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은 어쩌면 바로 그 ‘배움의 기쁨’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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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같은 달, 다른 하늘
누군가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정당한가. 찍는 사람은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말하지만, 찍히는 이에게 그 렌즈는 견디기 어려운 시선일 수 있다. 이 간극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따라온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가능한 사랑’은 바로 이 질문 위에 서 있는 영화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다큐 감독 ‘예지’(조여정)가 해고 노동자 부부 ‘미옥’(전도연)과 ‘호석’(설경구)을 카메라에 담으려 만나면서 시작된다. 여기에 예지의 남편 ‘상우’(조인성)가 더해지면서, 서로 다른 계급에 선 두 부부의 삶이 한 화면 안에서 얽힌다.
이 만남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현실을 대하는 두 방식의 충돌이다. 미옥과 호석은 해고 이후의 고통을 지워 내려 하고, 예지는 그 지워진 자리를 기어코 끄집어내려 한다. 덮으려는 쪽과 열려는 쪽이 마주 섰으니, 저마다 무엇을 바라는지가 궁금해진다. 연대와 투쟁을 믿었던 호석은, 정작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등을 보이며 달아나던 동료들의 모습이 매 순간 떠올라 고통스럽다. 조금 푼수 같은 미옥은 남편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오늘 저녁 먹을 반찬이 더 걱정인 여자다. 값비싼 가방과 옷을 걸친 예지는 그들의 현실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몸에 붙지 않은 옷처럼 겉돈다.
예지는 노동자의 삶에 다가서려 애쓰고,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사연에 끌린다. 그러나 그 카메라가 누구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선한 마음인지, 렌즈 뒤에 숨은 자기 갈증인지 영화는 판단을 미룬다. 이때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상우다. 그는 그들과 어울리지만 한 발 떨어져 관찰하고 있고, 또 모든 조건을 마련하는 사람이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 영화에서 가장 기묘하고 섬뜩하다.
상우는 아내 예지가 노동자들과 처지가 다르면서도 공감하려 애쓰는 모습을 두고 메소드 연기라고 말한다. 이 말이 날카로운 것은 두 부부 사이의 거리가 마음가짐으로는 메워지지 않는다는 점을 짚기 때문이다. 이 거리를 가르는 기준은 선과 악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 곧 계급이다. 그로 인해 호석과 미옥은 고통을 지워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위태로운 얼굴로, 예지와 상우는 그 고통을 소재로 삼을 여유가 있는 사람의 얼굴로 서로 다른 자리를 보여 준다. 그 거리는 미옥이 인천 월미도에서 올려다본 달과 예지가 미국 시카고에서 올려다본 달만큼이나 멀다. 같은 달이 떠 있어도, 같은 하늘일 수는 없다.
영화에서 달은 곧 시선이다. 달은 어디를 가도 따라오고, 때로는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 지켜 준다는 느낌과 지켜본다는 사실은 한 끗 차이다. 달빛은 포근하지만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달은 카메라와 닮았다. 달은 모두를 똑같이 비추지만, 그 시선 아래에서 편안한 사람과 들키는 사람은 다르다. 들키는 쪽은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어렵게 예지의 카메라 앞에 앉은 호석이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며 울부짖는 장면이 처연한 것도 그래서다. 말을 쏟아내도 그 속내는 온전히 닿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삶을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은 가능할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들이 한 화면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랑처럼 보인다. 사랑이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어디서부터 진실일까. 이해하려고 다가서는 일과 내 필요에 맞게 쓰는 일 사이의 경계는 끝내 선명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은 이것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낙관인지, 믿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역설인지는 극장을 나서면서도 내내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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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아이들 옷이 깨끗했던 이유
1960년 7월 20일, 나라가 4월 혁명의 잔불로 들썩이던 때,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이 설립됐다. 형제육아원은 2년 후인 1962년 6월 9일 용당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시설의 운영 법인으로 1971년 발족한 사회복지법인 형제원은 1975년 7월 25일 부산시와 ‘부랑인 선도’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1976년 지금의 주례동으로 자리를 옮겨 형제복지원을 개소했다.
부랑인을 ‘선도’하고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는 뜻의 ‘복지’는 형제복지원 안에서 본래의 뜻과 전혀 다른 의미로 통용됐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의무교육에서 배제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성폭력 등을 겪었다. 사망할 경우 시신은 무연고 처리되어 암매장됐다.
이 형제복지원에 입소시키기 위한 부랑인 단속에는 경찰과 시청·구청 공무원이 합세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작성한 신상기록카드에 따르면 부산역파출소와 주례파출소의 단속 실적 건수가 가장 높았다.
복지라는 이름을 걸고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지만,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이 ‘보호’와 ‘복지’를 명목으로 국가폭력을 일삼은 사례는 이것 외에도 더 있다. 1980년 법제화된 보호감호와 이듬해 설립된 청송보호감호소의 인권침해 실태가 그러하고, 보호감호소에서의 감금·제압 기술이 유사하게 재현된 2021년 화성외국인보호소의 미등록외국인 대상 가혹행위 사건이 그러하다.
정부는 과거 국가의 복지 의무를 주로 사회복지법인에게 떠맡기고, 법인의 파행적인 시설 운영을 묵인 또는 방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마땅히 할 일을 안 한 부작위의 책임과 더불어 천인공노할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위의 책임을 모두 포괄한다. 부랑인으로 점찍힌 사람들을 형제복지원에 집어넣는 데 참여한 경찰 및 지방행정기관과 그들을 통솔한 한국 정부는 그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민간업자들이 끼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그 책임을 회피하지만, 여성들을 징모하고 접전 지역으로 이송하는 데 일본 정부와 군이 합세한 명백한 증거에 비추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피할 길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20세기 말 나의 양친을 비롯한 부산의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대문 밖에 내보낼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옷매무새를 바르게 할 것을 유달리 강조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와 퇴소자에 대해 지역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증언을 곱씹어보면, 그것은 그저 남에게 보일 입성을 강조한 것을 넘어 제 자식이 ‘부랑아’로 오인돼 시설에 갇힐 위험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의 폭력에 부작위와 작위의 책임이 있는 이들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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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미국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가 - 방정아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
커다란 바위산 한가운데 상의를 벗고 속옷만 걸친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주변에는 여성들이 서거나 앉아 있다. 뒤로는 바다가 펼쳐지고, 하늘은 붉은빛과 주황빛이 뒤섞여 묘한 불안감을 자아낸다. 얼핏 보면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의 인공 정원 같다.
그런데 제목을 보는 순간 풍경은 달라진다. ‘올해의 작가상 2021’ 후원 작가로 선정된 방정아의 출품작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다.
노인은 로마 신화의 주피터, 곧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연상시킨다.
번개를 든 위엄 있는 신들의 왕이 아니라, 석가산 같은 인공 바위 위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아 있다. 제우스가 맨 전투 배낭은 그의 신화적 위엄을 군사적 현실의 이미지로 바꾸어놓는다. ‘주피터’라는 이름 뒤에는 부산항 8부두에 주한미군이 배치한 생물학 방어 프로그램 ‘주피터(JUPITR) 프로젝트’가 있다. 주피터라는 군사 프로그램은 신화 속 주피터가 되고 방정아의 화면에서 다시 늙은 제우스가 된다.
여기서 방정아 특유의 풍자가 시작된다. 너무 곁에 있어서 마침내 풍경으로 보일 때, 권력은 오히려 더 잘 보이지 않는다.
브레히트의 ‘생소화 효과’가 익숙한 현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하듯, 방정아는 일상의 풍경 속에 숨어 있던 권력의 관계를 다시 드러낸다. 한편 전경의 두 여성에게서 보이는 불안정한 선과 어색한 몸짓은 평온해 보이는 풍경에 묘한 불편함을 더 한다.
작품 제목의 ‘한결같은 태도’도 묘한 반어다. 여기서 ‘한결같다’는 변하지 않는 마음과 신뢰가 아니라, 오래 지속되어 온 힘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 그림에서 방정아는 미국의 군사적 힘이 부산 시민의 일상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현실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앉아 있고, 기다리고, 바라보거나 외면하는 등 각자 다른 행동을 한다. 그러나 조금 오래 바라보면 익숙한 장면과 평범한 풍경 속에 숨어 있던 권력이 모습을 드러낸다.
방정아는 2005년 작품 ‘분위기 파악 못하는 박정희씨’를 올해 제2회 부마미술제에 출품했다.
방정아는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그것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박정희씨’에서는 과거의 권력자가 거대한 공간 속에 작고 어색하게 서 있고, ‘미국, 그의 한결같은 태도’에서는 현대의 제우스가 공원의 석가산 위에 앉아 있다.
이로써 방정아는 오래 보아 익숙해진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든다. 방정아의 그림 속 주피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난 뒤에는 그 풍경이 더 이상 아무 일도 없는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방정아의 그림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는 아직도 저 자리에 앉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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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거점국립대병원 수술 급감, 지역 필수의료 누가 지키나
소위 ‘빅5’로 불리는 수도권 병원을 찾아 연간 100만 명이 새벽 KTX에 몸을 싣는다. 그로 인해 연간 4조 6000억 원이 넘는 사회적 비용이 지방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의료 인력과 시설, 서비스 수준에서도 ‘서울공화국’의 폐해는 여전하다. 정부가 거점국립대병원을 지역 필수의료의 중추로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은 뒤늦었지만 옳은 방향이다. 부산대병원의 지역 완결형 메디컬센터 추진도 원정 치료의 병폐를 해소하는 전기가 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국립대병원 전문의 수는 ‘빅5’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수술 건수는 줄고 빈 병상은 늘고 있다. 지방 의료는 의정 갈등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대병원의 위기는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를 제외한 국립대병원 9곳의 평균 병상 가동률은 2023년 73.6%에서 2024년 56.4%로 급락했고 지난해에도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경상국립대병원은 75.4%에서 52.9%로 떨어졌다. 수술 감소는 더 심각하다.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국립대병원 10곳의 수술은 2023년 19만 3213건에서 지난해 14만 5810건으로 24.5% 줄었다. 부산대병원은 지난해 1만 3991건으로 2023년보다 17.3% 줄었다. 부산대병원은 지난해 말 전공의 복귀로 10월 기준 병상 가동률이 75%까지 회복했지만 전공의가 정원의 68%에 그쳐 인력 부족은 여전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과 재정이다. 올해 6월 기준 지역 대학병원 9곳의 전문의는 1904명으로 ‘빅5’ 3985명의 47.8%에 그쳤다. 병상은 ‘빅5’의 87.1%에 이르지만 10병상당 전문의는 2.37명으로 ‘빅5’의 4.31명에 크게 못 미쳤다. 이래서는 24시간 중증·응급·필수의료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다. 또 경상국립대병원의 누적 금융 부채는 3392억 원에 달하고 연간 이자만 105억 원에 이른다. 부산대병원도 1235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다. 시설 투자비를 일반 금융권 대출에 의존한 탓이다. 의료진 부족과 경영난이 신뢰 실추와 환자 이탈을 부르고, 이것이 다시 경영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만큼은 막아야 한다.
지역 의료의 붕괴는 ‘서울행’과 동전의 양면이다. 중증 환자가 원정 치료에 나서는 것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수도권과 지역 간 의료 격차가 원인이라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주지에 따라 건강 불평등이 발생하는 구조를 바로잡는 것은 국가의 책무다. 정부가 국립대병원을 보건복지부로 이관하고 지역 필수의료의 중추로 육성하겠다고 한 만큼 이제 선언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중증·응급·희소 질환까지 책임지는 지역 완결형 의료체계가 구축되려면 전문의 확충과 필수진료과 지원, 전공의 지역 배정 확대뿐 아니라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 해답은 거점국립대병원의 혁신에 있다. 정부의 구체적인 로드맵과 속도감 있는 집행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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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회 제청 관여는 위헌' 국감서 작심 발언한 대법원장
조희대 대법원장이 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법원 국정감사에 기관장 자격으로 출석했다. 민주당은 국감에서 조 대법원장을 상대로 청와대의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청 거부를 따져묻겠다며 증인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조 대법원장은 일반증인 출석 요구에 대해 지난 2일 법사위에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조 대법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헌법의 취지에 비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에 관해 증언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삼권분립과 사법 독립의 원칙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며 여당의 일반증인 출석 요구와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이후 서영교 법사위원장은 조 대법원장의 이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법사위는 국감 첫날부터 조 대법원장의 증인 자격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대법관 재제청 논란에 대한 여권 의원들의 의혹 제기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유와 헌법적 근거가 명확하게 기재돼 있지 않았고, 공문 내용만으로는 취지를 알기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특히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 절차, 대통령의 임명 절차에 전혀 관여할 수 없듯이, 국회와 대통령도 대법원장의 제청에 전혀 관여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국회가 대법원장의 제청에 간섭하는 건 헌법이 명문으로 정한 기관 간 분배와 사법권 독립에 반한 위헌적 조치라고 강조한 것이다. 대법원장이 국감에서 의원들 질의에 답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국감장에서 통상 대법원장은 인사말, 마무리 발언을 하고 의원들의 세부 질의는 법원행정처장이 답변해 왔다. 삼권분립을 보장하기 위한 오랜 관례였다. 그럼에도 여당 주도로 대법원장을 국감장 증인석에 세워 대법관 재제청 불응에 대한 추궁을 시도한 것은 국회의 견제 권한을 넘어 사법부 독립을 흔드는 일이다. 이날 법사위의 대법원 국감은 민주당의 일방적인 증인 채택과 이석 불허용 등 지난해와 판박이였다. 지난해 국감에서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조 대법원장의 이석을 허가하지 않으면서 민주당 의원들은 이 대통령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에 대한 질의를 쏟아낸 바 있다. 법사위 국감이 여야 정쟁의 장으로 변질돼 안타깝다.
국감 첫날부터 민주당이 조 대법원장을 몰아붙여 증언을 요구하고 국감장 이석 여부를 놓고 국민의힘이 반발하면서 법사위 감사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국감의 목적은 입법부가 행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 보고 문제점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론 사법부의 행정이나 예산 집행을 살필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감이 사법부와 대법원장을 겨냥한 공세의 장이 된다면 그 존재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법사위만 하더라도 형사사법체계 졸속 개편에 따른 문제점 등 시급히 점검하고 수정해야 할 국정 과제가 산적하다. 여당은 사법부 흔들기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행정부 견제와 민생 현안 점검 등 국감 본연의 책무에 충실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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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해수부 부산 이전 그 후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동구 수정동 임시청사에서 개청식을 하고 부산 시대 개막을 알린 게 2025년 12월 23일의 일이다. 그 사이 해수부 신청사 위치도 북항 1단계 재개발 부지로 정해졌고 2030년이면 북항 청사 시대가 열린다.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 흥아해운에 이어 국내 최대 해운기업 HMM도 부산으로 옮겼다. 팬스타 아크로호가 북극항로 개척에 나서 북극해의 유빙을 뚫고 유럽 노선 운항에 성공한 후 12일 부산항으로 돌아온다. 부산 지역 대학의 해양 관련 학과 입시 경쟁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해수부 이전 후 골목상권이 들썩인 것을 시작으로 부산에 불고 있는 긍정적 변화들이다.
정부 부처 이동은 그 자체로 낯선 일은 아니다. 1980년대 정부과천청사 이전이 있었고, 2010년대에는 정부세종청사 시대가 열렸다. 이에 비하면 해수부는 일개 부처 이동에 불과하지만, 정부 청사 집합적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부산으로서는 오랜 해양수도 꿈을 현실화하는 출발점이지만 국가적으로도 수도권 일극주의 성장 전략의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고 해양 강국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수도권에 비견될 남부 해양경제권 생태계를 만들어야 가능한 국가적 과제다.
6·3 지방선거를 앞둔 4월 청와대에서는 이재명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점검회를 통해 남부 해양수도권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해수부는 북극항로를 선도하는, 산업이 대도약하는, 기업·사람·자본이 모이는, 살기 좋은 남부 해양수도권이라는 4대 전략을 중심으로 세부 과제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했다. 부산 시민은 해수부 이전을 주도한 전재수 후보를 시장으로 선택함으로써 해양수도 부산을 향한 열망을 표출했다.
하지만 선거 후 해양수도 부산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도 조금씩 식고 있다. 전 시장이 해수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고, 해운 대기업 본사를 유치하고, 동남권투자공사와 해사전문법원을 설립해 해양수도의 꿈을 이루겠다고 반복해도 크게 감흥이 없다는 반응들이다. 이들 사안은 전 시장 당선으로 선 반영됐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상대적으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수부는 이전을 계기로 기능을 강화해 명실공히 대한민국 해양 컨트롤타워로 거듭나기를 기대했지만, 선거 후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역에서는 조선·해양플랜트, 국제 물류, 해양레저·관광 등을 해수부로 옮겨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정부 부처를 육상부와 해수부로 나눌 정도의 해양에 대한 기능 집중이 있어야 해양경제권 조성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2027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1% 안팎에 불과한 게 현재의 해수부 위상이다. 해수부 이전과 패키지로 약속한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한국어촌어항공단, 해양환경공단, 해양수산과학기술진흥원, 한국항로표지기술원, 한국해양조사협회 등 6대 공공기관 이전도 정부 2차 공공기관 이전에 물타기 돼 버렸다.
이런 가운데 지방선거 후 정부의 5극 3특 균형발전 전략으로 3대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되면서 해양수도권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반도체와 피지컬AI, 데이터센터로 ‘남부권 반도체 혁신 벨트’를 조성하겠다는 것인데 호남은 반도체 팹을 중심으로 800조 원 이상 대규모 신규 투자를 집중하면서 부울경은 기존 수백억 원의 투자를 끼워넣는 수준에 그쳤다.
물론, 반도체 대기업의 호남 투자를 소지역주의 관점으로 시비 걸 일은 아니다. 문제는 호남 반도체 팹에 쏟는 정성이 해양수도 부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 광주 군 공항 이전 속도전을 강조하면서 해양수도권의 필수 인프라인 가덕신공항 적기 완공을 위한 공사비 증액은 특별법 개정까지 거론하며 발목을 잡는다. 같은 대기업인데 대한항공의 통합 LCC 부산 거점 약속은 내몰라라다.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 원칙을 생각하면 산업은행 부산행도 정부 여당이 결자해지해야 할 사안인데 묵묵부답이다.
지방선거 후 이재명 정부 국정지지율 하락 속에 부울경 민심이 상대적으로 더 싸늘해진 것은 이런 상황이 반영된 결과다. 집권 여당 지지율 하락에 놀란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에도 부산을 찾아 ‘2028년 총선 주전장은 한강이 아니라 낙동강’이라고 강조했지만 말로만 될 일은 아니다. 김 대표가 SNS에 ‘돔돔돔, 부캉이’라고 올리며 북항 돔 아레나 지지를 밝힌 것은 반길 일이지만 해양수도권을 위해서는 다방면의 전폭적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재수 시장의 비수도권 맏형 역할에도 힘이 실린다. 그리고 해양수도권 조성은 지역 민원이 아니라 국가의 성장잠재력 회복을 위한 국정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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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저출산과 병역 특례
국방만큼 저출산 리스크에 노출된 분야도 드물다. 1970년대 국군 상비 병력은 60만 명 정도였다. 북한보다 재래식 무기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보병의 수로 부족한 화력을 상쇄하려 했다.
그러나 60만 명은 군대의 적절한 수용 범위를 넘어선 규모였다. 248km 휴전선 철책 전체에 보병 사단을 촘촘히 박아 넣고도, 군인이 남았다. 방위병과 전투경찰 제도를 대규모로 운영했던 것도 남는 국방 병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1973년 병역특례제도가 도입된 것도 징병 자원이 풍부해서였다. 당장 군인을 늘리는 것보다, 북한과의 국력·메달 경쟁에서 앞서는 게 국익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때였다. 군인은 어차피 많았다.
이후에도 상비 병력은 꾸준히 늘었다. 1980년대 말 65만 명에 도달했고, 1990년대 중후반에는 69만 명 수준까지 늘었다. 북한이 병력을 늘린 것이 확인돼, 정부도 군인 수를 늘렸다. 해군, 공군, 기계화 부대 등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군인 수요도 생겼다. 1995년 방위병제 폐지로 현역 입대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나라가 부강해진 것도 병력 증가와 관계가 깊다. 70만 명 가까운 대군을 운영해도 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재정과 경제력이 탄탄해졌다.
2000년대 초부터 상황이 역전됐다. 1980년대부터 나타난 저출산의 영향과 군복무 단축 효과가 겹쳐 군인 수가 줄기 시작했다. 2010년 상비 병력은 65만 명으로 줄더니, 2018년 말에는 59만 명대로 떨어졌다. 60만 명이 깨진 건 1953년 정전 이후 처음이었다. 5년도 안 돼 2022년 50만 명 선도 무너졌고, 지금은 45만~47만 명 수준이다.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2030년대까지는 직업 군인을 늘려 지금의 병력 규모를 유지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지만, 2040년대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병력은 20만~30만 명 내외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60만 명을 운영하던 국방 시스템은 더는 작동하기 어려운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2026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축구 대표 등에 대한 병역 특례 논란이 거세다. 징집병은 많고 대한민국 브랜드 가치는 바닥이던 시절, 국위 선양을 위해 만든 병역특례제도를 이제는 크게 손질해야 한다. 더불어 어떻게 적은 인원으로도 충분한 전투력을 낼 수 있는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지도 더 고민해야 한다. 수년 뒤 징집 가능 인원수는 이미 정해진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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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노신의 스페이스] 우주와 야생마
70여 년의 우주개발 역사에서 수많은 성공 신화가 쓰여 왔다. 1969년 인류 최초의 유인 달 착륙, 1997년 발사되어 2004년 토성 궤도에 진입한 카시니 우주선의 토성 탐사, 그리고 2012년 인간이 만든 물체로는 최초로 태양권을 벗어나 성간 공간에 진입한 보이저 1호의 이정표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스페이스X가 구축한 스타링크가 우주 경제의 판도를 바꾸는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토양과 동력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광활한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야생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이스X를 이끄는 일론 머스크 역시 매번 신기술을 발명해 낸 천재라기보다는, 기존의 성공이 주는 타성과 안락함을 과감히 거부하고 우주라는 거친 들판을 향해 달리는 야생마에 가깝다.
머스크, 타성 벗어나 스페이스X 구축
아놀드, 통념 맞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장벽 깨는 야생 정신으로 미래 개척을
머스크가 팰컨9 로켓 1단의 수십 회 재사용을 통해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재사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 고안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 우주왕복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사용에 접근한 대담한 결단에 기인한다.
과거 미국의 우주왕복선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발사 비용을 낮추지 못했던 이유는 기술적 한계만은 아니었다.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와 미 공군의 요구에 더해 각 주의 정치적·산업적 이해관계까지 반영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지나치게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실패의 비용이 극도로 큰 경직된 구조가 만들어졌고, 한두 번의 실패는 곧장 사업 전체의 존폐를 흔드는 치명타가 되었다. 반면 머스크는 실패를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만들고, 시험하고, 고치는’ 야생의 반복 루프를 통해 이 거대한 관성을 깨뜨렸다.
이러한 야생의 정신이 위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매년 10월 발표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다. 201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아놀드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칼텍) 석좌교수가 대표적이다. 프린스턴대에서 기계·항공우주공학, 버클리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생물학 전공자가 아닌 공학자 출신 연구자였다. 1980년대 후반 생물학계에서는 단백질 구조를 이해한 후 효소를 정밀하게 설계하려는 접근법이 주류였다. 하지만 단백질 서열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천문학적으로 많았고, 계산 기반 설계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학을 전공한 아놀드는 이 지점에서 판을 바꿨다. 단백질을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최적화가 필요한 역학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 바라보고, 수학적 ‘최적화’ 개념을 분자 세계에 적용한 것이다. 내부 원리를 모른다면 자연의 방식인 ‘진화’를 실험실에 복제해 무수한 반복 루프를 돌리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DNA에 인위적인 무작위 돌연변이를 일으킨 뒤, 우수한 변이체만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유도진화’ 기법이었다. 이 방식은 당시 학계의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생물학계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던 그녀는 오히려 기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혁신적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93년, 효소의 활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변이체를 만들어내며 자신의 대담한 발상이 옳았음을 실험으로 증명해 냈다.
두 이방인이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구어낸 성공의 공통점은 역설적이게도 완벽한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무지의 수용’이었고, 자신이 속한 분야의 도구를 이웃 분야의 난제에 과감히 들이대는 대담함이었다.
현대의 학계와 사회는 점점 더 좁고 깊은 자신들만의 ‘사일로’(Silo)를 쌓아 올리고 있다. 그 안에서 습득한 지식은 정교할지언정, 성벽 밖의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지 못한다. 장벽 내부의 길들여진 모범생들이 안전한 정답만을 고르고 있을 때, 다음 세대의 신화를 쓸 씨앗은 사그라든다.
이제 우주 분야의 빛나는 성취나 노벨 과학상의 위대한 업적을 볼 때마다,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생태계가 일론 머스크나 프랜시스 아놀드와 같은 비주류의 도전을 포용하고 격려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특히 수도권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도전자’(Underdog)일 수밖에 없는 부울경이 우주 시대의 주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의 박제된 지식이나 장벽 내부에 갇힌 정답이 아니라 민간 주도의 야생의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류의 냉소 속에서도 “왜 안 되지?”라는 투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 비주류의 위치를 도리어 기존 게임의 법칙을 뒤집는 특권으로 여길 줄 아는 개척자의 대담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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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리운 곳으로부터 바람은 분다
덩치 큰 산짐승들이 내려와 인간의 살림을 뒤질 것이다
기꺼이 마음을 잃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할 것이다 이 사랑
은 무모하고 무용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엔 이유가 없다 밤의 검은 창문을 두드리는
이 무국적 바람은 어딘지 기시감이 있다 그날 습한 바람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낮고 느리게 울며 발목을 감았지
그것은 지표면의 것이 아닌 지구 내부 맨틀로부터 뛰쳐나온
거대한 짐승의 미친 열정이 내뱉는 신음 같은 것 지독한
번민의 날들을 부러 게으르게 지나고 있다 나의 사랑 더,
더, 더 쓸모없어질 테다 여름이 응집된 열매들은 만추의 빛
을 입고 자정 너머에서 부스럭거리고
-시집 〈청색에 흘린 청색〉(2026) 중에서
마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듣고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볼륨을 조금 더 내려봅니다. 사랑이야말로 무모하고 무용해서 아름다운 것. G단조의 선율에 실려가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 묻고 또 묻게 됩니다. 세상을 떠도는 바람이 있어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지나기도 합니다. 존재의 근원적인 상처, 깨지기 쉬운 영혼의 현실을 떠돌게 됩니다. 그래서 비련의 히스클리프를 목놓아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는 나만의 기억, 그 호명 앞에서 잠시 숨을 멈추어봅니다. 사랑도 지독한 번민도 더 쓸모없어져 보겠다는 다짐은 마치 가을이 주는 이상한 선물 같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인간의 살림을 뒤져야하는 산짐승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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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산에서 벌에 주의하자
산 숲길 소로 곁에 버려진 우유 팩을 수거하기 위해 집게로 집어 드는 순간, 십여 마리의 벌이 한꺼번에 달려들며 양팔, 손등, 양 무릎과 다리에 침을 쐈다. 깜짝 놀라 두 손으로 휘저으며 자리를 벗어나는데도 끝까지 따라오며 공격했다. 잠시 후 물린 부위에 통증과 부기가 솟아, 동료가 휴대한 물파스로 상처 부위에 임시 도포를 하고 한숨을 돌렸다.
얼마 전, 트레킹 팀과 연제구 연산동 배산을 둘레길 따라 오르고, 하산길에 연산동 고분군을 돌아보는 코스로 돌고 왔다. 산의 입구부터 소로, 정자 주변과 체육공원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수거하고 오르는 도중에 58년간 국내외 산을 트레킹해도 발생하지 않았던, 난생처음 벌에 공격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시민들이 건강과 운동을 위해 자주 찾고 방문하는 코스가 벌떼 서식처로 판명된 이상, 주민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자체의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서식처가 되지 않도록 음식과 관련한 쓰레기는 절대 버리지 않도록 홍보했으면 한다.
하산 후 병원에 들러 주사와 약 처방을 받았고, 한의원 침술 치료도 받았지만 벌에 쏘인 후유증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당일 심야에는 통증, 열, 부기와 가려움으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고, 며칠이 지나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10월까지는 벌의 활동 시기이니 벌에 쏘이지 않도록 예방을 철저히 하고, 뱀과 모기에도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후 처리 약제도 준비했으면 한다.
산행객은 제발 일회용 식품, 비닐류, 과자봉지, 담배꽁초, 플라스틱병, 커피 컵 등의 재활용품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되가져와서 재활용 용기 수거함에 처리하도록, 지자체가 시민 홍보 교육을 지속했으면 한다.
박판수·부산 금정구 중앙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