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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HMM 이전 위한 '해운도시 조성·발전 특별법' 필요하다
해양수산부가 부산 이전 청사 입지를 부산 동구로 확정짓고 연내 업무 개시 목표로 속도전에 들어갔다. 어렵게 성사된 해수부 이전 효과가 극대화되려면 관련 기업·공공기관의 집적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북극항로 개척으로 해양 물류의 신기원을 개척하겠다는 비전 실현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것이 국내 최대 해운선사 HMM이 해수부를 따라 본사를 옮기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때 부산 이전을 공약했고, 전재수 해수부 장관 후보자 또한 14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해운기업 유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부터 법적 근거를 만들고, 정치적 추진 동력을 쌓아야 체계적이고 차질 없이 해양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부산시와 해수부는 해운업 재건의 상징인 HMM 본사를 부산으로 옮겨 글로벌 해양수도의 대표 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HMM 노조는 “상장사의 자율성과 독립성 훼손”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정부 측 지분이 70%가 넘는다 해도 힘으로 밀어붙일 수만은 없다. 부산시민들은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국회와 노조의 벽에 부딪혔던 경험이 쓰라리다. 따라서 단순한 기업 하나 유치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해운도시 육성을 목표로 하는 특별법을 통해 설득하고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지역뿐만 아니라 기업에게도 기회가 열리는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해수부 이전 확정 이후 공공기관과 해운기업의 동반 이전으로 시너지를 낼 필요성이 줄곧 제기됐지만 법제화 논의는 더디다. 부산상의가 14일 ‘해운도시 조성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이 국면에서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특별법 없이 해수부만 옮긴 채로 시간을 끌면 공공기관과 기업의 이전은 차일피일이 될 우려도 있다. 최악의 경우 해수부 주소만 바뀐 채로 핵심 인력과 기능은 여전히 서울에 머무는 ‘무늬만 이전’에 그칠 수도 있다. 글로벌 해운산업의 허브로서 부산의 위상 확보는 법·제도적 지원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 해사법원, 선주협회, 해양보험사 유치 연계도 법적 뒷받침이 필수다.
이재명 대통령이 18일 부산에서 ‘타운홀 미팅’을 갖는다. 해수부 등의 이전, 북극항로 개척이 주요 의제다. 그중 HMM 이전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이 지리적인 이동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해양강국 도약과 부산의 글로벌 해양수도 비전 실현을 위한 전환점이 될 수 있어서다. 그러려면 큰 틀에서 해운도시를 키우는 내용을 반영한 법제화는 불가피하다. 각종 행정특례, 세제 혜택, 이전 비용 및 연구·개발(R&D) 지원, 특별 해양금융지원 프로그램 등의 지원책과 함께 해사법원 설립 근거가 담겨야 한다. 해운도시 특별법은 국가균형발전 실현과 해양강국으로 가는 동력을 위해 필수적이다. 대통령의 전향적인 지지·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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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토부 장관 지명자 가덕신공항 조기 착공부터 해결해야
이재명 정부 내각의 마지막 퍼즐로 꼽혔던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장관에 더불어민주당 3선 김윤덕 의원이 지명되자 동남권 지역에서는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대통령실이 김 의원의 국토부 장관 인선 배경으로 지역균형 발전에 대한 김 의원의 의지를 거듭 강조해서다. 김 의원은 전북 전주갑 출마 당시에도 혁신도시와 광역교통망 등 지역균형 발전 마중물이 될 공약을 많이 내걸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남권은 새 국토부 장관이 동남권의 미래를 위한 중요 인프라임에도 사업이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는 가덕신공항 문제를 제일선에 놓고 적극 해결에 나서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가덕신공항 건설 사업은 국토부가 발주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자로 계약을 맺은 현대건설 측이 알 수 없는 이유로 7년으로 확정된 공기를 2년 더 늘리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다며 포기한 상태다. 현대건설은 이 같은 몽니를 부리고도 부산지역에서 각종 대형사업에 참여하겠다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여 지역의 비판을 한몸에 받고 있는 중이다. 현재 올스톱된 가덕신공항 건설은 올해 안에 사업이 새로 재추진되고 기존 확정된 7년의 공기를 적용해도 2032년에야 겨우 마무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재입찰을 실시해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이 들끓고 있다.
다행히 김윤덕 국토부 장관 지명자는 최근 국토부·건설사 등과 간담회를 열며 가덕신공항의 재입찰 조건 저울질에 나서고 있다. 현대건설의 몽니가 현실화할 때까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부산시도 새 국토부 장관 취임 직후 가덕신공항 재입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명자 측과 행보를 맞추고 나섰다는 소식이다. 문제는 기존에 확정된 7년의 공기가 더 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다. 공기 연장 운운하며 사업을 지연시킨 현대건설에 대한 지역의 비판이 고조되면서 공기 연장 가능성은 낮아졌다는 분석이 우세하지만 계약 당시 확정된 공기마저 뒤집은 전례에 비춰본다면 마음을 놓을 순 없는 일이다.
가덕신공항 건설 사업이 지역균형 발전의 지렛대가 될 동남권의 핵심 사업임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지역균형 발전을 위한 사업이기 이전에 기존 공항 안전과 수용력 등의 한계로 인한 정부 공항 정책에 따라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정권에 따라 시혜성으로 지역에 인프라 하나를 지어주는 그런 사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책 시급성에 따라 진행되는 사업이기에 더 이상 지체되어선 곤란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초대 국토부 장관이 가덕신공항 조기 착공과 공기 단축 등을 최우선 과제로 두어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사업의 순조로운 진척이 이재명 정부의 지역균형 발전 철학을 두드러지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더더욱 그래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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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다음은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다
765만 명 주민들이 살고 있는 부울경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사업 무산 소문까지 나돌았던 부울경 광역철도 건설사업이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예타)를 통과해서다. 예타 통과는 정부가 이 사업의 필요성을 인정·승인한 것으로, 앞으로 기본계획 등 후속 절차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의미다.
부울경 광역철도는 부산도시철도 1호선 노포역~양산 웅상출장소~KTX 울산역을 잇는 총연장 47.4km를 단선으로 건설하는 사업이다. 11개 정거장에 하루 35회 경전철이 운행된다. 사업비는 2조 5475억 원이다.
이 철도가 개통되면 부산 노포에서 양산 웅상까지 10분, 울산 KTX역까지 45분대로 이동할 수 있어 부울경 지역을 1시간 생활권으로 묶을 수 있게 된다.
부울경 광역철도 예타 통과는 순탄치 않았다. 이 철도의 예타 결과 발표는 지난해 6월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9월로, 다시 12월로, 올해 상반기로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법정시한(6월 말)인 2년을 넘겼다. 결과가 늦어지면서 ‘노선 단축’, ‘단선 건설’, ‘사업 무산’ 등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6월 장미대선에서 수도권 집중 현상과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5극 3특’ 체제로의 전환을 공약한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고, 취임 후 “부산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현안 해결에 집중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제성은 부족하지만 예타 통과 가능성’이 점쳐졌고, 현실화했다.
실제 예타 통과 과정에 지역 균형발전 가치 등의 정책적 배려가 기준(0.5)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2021년 시행한 ‘사전 타당성조사(사타)’에서 B/C가 0.66으로 나왔다. 기재부 예타는 사타보다 경제성을 더 엄격하게 보기 때문에 B/C는 사타보다 훨씬 낮게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부울경 1시간 생활권 조성과 초광역경제권 구상의 핵심 인프라에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가 남아 있고, 이 철도 역시 예타 통과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부울경 광역철도처럼 정책적 배려(?)를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KTX 울산역~양산 상·하북~김해 진영을 잇는 총연장 51.4km의 동남권 광역철도도 지난해 기재부 예타에 선정돼 용역이 진행 중이다. 사타에서 B/C가 0.7을 넘겼지만, 예타 결과 발표가 늦어지면서 사업 무산 소문까지 나돌았던 부울경 광역철도와 비슷한 길을 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부울경 지자체와 정치권이 예타 통과를 위해 경제성 높이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양산시와 윤영석 국회의원도 이 철도를 이용해 울산에서 가덕신공항까지 가도록 노선 변경을 추진하고 있지만, 사실상 예타 통과는 녹록지 않다.
윤영석 의원은 동남권 광역철도 예타 면제 등을 포함한 ‘동남권 광역철도 건설을 위한 특별법’까지 발의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김태호 국회의원이 최근 발의한 ‘국가재정법 개정법률안’이 주목을 끈다. 이 법안은 지방 균형발전을 위한 초광역권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해 예타 때 ‘지역 균형발전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김 의원은 “국가균형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초광역권 SOC 사업은 그 핵심 열쇠”라며 “개정안을 통해 초광역 사업들이 균형발전과 정책적 가치에 따라 추진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 역시 부울경 광역철도 예타 면제 등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국회를 넘지 못한 데다 개별 사안마다 예타 면제 등을 담은 특별법 발의도 쉽지 않은 만큼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국가재정법 개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부울경 지자체와 정치권은 협력을 통해 가덕신공항이나 부울경 광역철도 등의 국책사업을 끌어냈듯이 부울경 1시간 생활권 조성에 필수 인프라인 동남권 광역철도의 예타 통과 또는 면제, 김 의원의 ‘국가재정법 개정법률안’ 통과를 위해 다시 한번 총력전을 펴야 할 것이다.
어렵게 통과한 부울경 광역철도 조기 착공이나 예산 확보 등의 후속 절차도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선 과정에서 전국을 5개 초광역권(극)과 3개의 특별권(특)으로 나눠 고른 성장을 유도하겠다는 ‘5극 3특’ 실현을 위해서 지역 공약을 반드시 정부 계획에 반영해 ‘구호’가 아닌 ‘실천하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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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이제는 MOGA 시대
부산으로 옮겨오는 해양수산부의 임시청사가 동구 수정동의 빌딩 두 곳으로 확정됐다.
해수부 직원 850여 명과 그 가족들의 이주를 앞두고 인구 소멸 위기에 직면한 부산 원도심(동구·서구·중구·영도구)이 모처럼 들썩인다. 해수부는 지금까지 부산으로 옮겨온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2014년 12월 서울에서 문현금융단지로 이전한 한국자산관리공사(730명)가 이전까지는 가장 컸다. 해수부 이전은 침체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상인들은 가게 매상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고, 주민들도 집값 상승을 꿈꾸고 있다. 상가 임대인들은 매물을 거둬들였고, 부동산 중개인들의 통화량은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해수부는 이명박 정부에서 5년간 폐지됐다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부활했다. 그때 해수부 청사를 부산에 마련하자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지금도 일부 직원들이 반발하고 있지만, 그때도 부처 차원의 이전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당시 해수부 고위 관료가 기자를 설득하던 목소리가 또렷하다.
“해수부 와봐야 겨우 직원 600명(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내려옵니다. 청사 옆 중국집에서 짜장면 600그릇 밖에 더 팔겠습니까? 해수부는 다른 부처하고 같이 있어야 부산에 더 도움됩니다.”
나름대로 논리를 내세웠지만, 죽어가는 원도심 주민과 상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줄서는 식당’까지는 아니라도 점심 때라도 빈자리 없이 영업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원도심 식당 주인들의 하소연이 귀에 울렸다.
해수부는 조만간 부산에 정식 청사를 마련해야 한다. 북항 재개발 지역이 가장 유력하다는 전언이다. 부지 선정, 실시설계, 착공 등의 기간을 감안하면 입주까지 3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북항은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개최 예정지였다. 그때도 원도심은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2023년 11월 29일. 어이없는 표차로 부산이 유치전에서 탈락하자 “그러면 그렇지”라고 원도심 주민들은 한숨은 깊어갔다.
해수부가 동구에 임시청사를 마련한 데 이어 북항에 신청사를 짓게 되면 부산의 원도심은 다시 번영의 계기를 맞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선거 구호로 내세워 재선에 성공했듯이 부산도 MOGA(Make ‘Original City Center’ Great Again)를 발판으로 재도약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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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캐나다에서 열린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계획보다 일찍 귀국한 뒤, 지난달 22일 이란 핵시설을 공격하기까지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펼쳐진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중동 상황’을 이유로 캐나다에서 급거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 귀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휴전 협상 때문”이라는 발언이 알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더 큰 일이 있다”며 발끈했다.
그 뒤는 모두가 알게 됐듯, 트럼프 대통령은 B-2 폭격기를 동원해 이란 핵시설에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앞서 이스라엘은 핵 위협을 원천 차단한다는 이유로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이에 이란이 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해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최강 미사일 방공망 ‘아이언돔’을 무력화하면서 ‘확전’으로 나아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란 핵시설 타격이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이 꺼려온 타국 전쟁에 개입하는 일이었다. 특히 벙커버스터 투하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꾸준히 요청해 온 사항이었는데,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카드를 썼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엔터테인먼트처럼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벙커버스터가 이란 지하 핵시설에 떨어지는 영상은 현실인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벙커버스터 투하 결정 시점부터, B-2 폭격기가 미국 어디에서 벙커버스터를 싣고 출발해 어떤 과정으로 투하됐는지 자세하게 보도했다. B-2 폭격기에 탄 조종사 2명의 준비 과정을 전직 조종사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사도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외신 기사를 바탕으로 화려한 그래픽을 동원해 벙커버스터 투하 과정을 보도했다. 일련의 기사를 읽으면서 씁쓸함이 커졌다. 세부 정보를 자세히 알면 알수록 전쟁이 실제 사람이 죽고, 유족이 생기는 슬픈 일이 아니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폭탄이 떨어지고 목표물이 파괴되는 엔터테인먼트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드론 폭탄만 해도 현실이라기보다 게임 속 한 장면 같아서 위화감을 느꼈었는데,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최근 아주 오랜만에 찾은 극장에서 본 ‘미션 임파서블’ 마지막 시리즈가 시시하게 느껴졌던 건 이런 현실 때문이지 싶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영화답게 톰 크루즈 특유의 맨몸 액션이 이번에도 등장했다. 톰 크루즈가 맨손으로 경비행기에 매달려도, 실제 미사일이 떨어지는 현실만큼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데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에 착잡해졌다.
가자 지구에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3일(현지 시간)에도 단지 배급소에 물을 길으러 갔을 뿐인 팔레스타인 어린이 6명이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숨졌다. 이스라엘군은 미사일 오작동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스러진 목숨 앞에서 비겁한 변명으로 들린다.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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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닫히는 청와대, 열리는 도모헌
2025년 8월, 청와대가 다시 문을 닫는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는 3년 만에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복귀할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259억 원의 예산이 확보되었고, 14일부로 전체 개방이 종료되며 내달 1일부터는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전면 중단된다. ‘국민에게 돌려준 청와대’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이번 청와대 복귀는 단순한 공간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시민의 거리, 정치와 공간의 관계, 관광과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중대한 전환이다. 윤석열 정부는 ‘탈권위’와 ‘소통’을 기치로 청와대를 개방했지만, 용산 대통령실은 업무 동선의 비효율, 보안 취약, 주민 불편 등의 문제를 노출했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려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권위의 상징’을 다시 열어둘 수 있느냐는 논의가 시작됐다.
대통령 집무 공간 회귀하는 청와대
서울 중심 정치 관광 콘텐츠의 퇴조
반면 부산시장 관사 작년 전면 개방
부산 콘텐츠가 주목받을 기회 부각
폐쇄와 개방 사이 공간 주인 물어야
도시 가치 담는 공간 구현 가능해져
청와대 개방은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시민 참여의 경험이었다. 경복궁과 북악산을 잇는 도심 관광축의 핵심으로 기능했고, 하루 수만 명의 내외국인이 이곳을 방문하며 서울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관광객들은 단지 사진을 찍는 것을 넘어, “대통령이 일하던 곳을 내가 걷고 있다”는 상징적 체험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직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나 관저를 박물관 혹은 관광지로 활용하는 사례는 많지만, 현직 대통령의 거주 및 집무 공간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개방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전례 없는 개방은 서울 관광의 질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기록됐으나 이 공간은 다시 봉인된다. 봉인 후에는 보안 강화와 행정 효율성이 우선되며, 관람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서울 도심 관광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와대 개방이 가져온 시민 경험은 단절되고, 정치 공간의 폐쇄성은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때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부산시장 관사로 쓰이던 공간이 시민에게 전면 개방됐다. 광안대교 앞 황령산 자락에 위치한 이 공간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마치고, ‘도모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관과 야외 정원, 공유 오피스, 시민 강연장, 카페 등으로 구성된 이 장소는 이제 더 이상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의 회복과 소통, 창작과 휴식의 공간이다. 그동안 ‘지방 청와대’라 불리며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곳이 문화예술과 여가, 휴식의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청와대가 닫히고, 부산시장 별장이 열리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지방도 권력의 공간을 시민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실천의 사례이자, 공공공간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는 관광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산은 이 공간을 단지 시민 편의시설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때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 ‘지방 청와대’라는 역사적 스토리는 정치사와 문화관광을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여기에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 부마민주항쟁, 임시수도청사와 민주공원 등과 연계하면 정치·역사·시민성 중심의 스토리텔링 관광이 가능하다. 이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 이미지와 시민 정체성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청와대 개방이 종료되면서 서울 중심의 정치 관광 콘텐츠는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지방 도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수도권 중심의 문화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역 고유의 역사적·정치적 콘텐츠가 관광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부산은 피란수도라는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가진 도시이자,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이 혼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복합적 역사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체계화하고 콘텐츠화하느냐에 따라 부산은 ‘열린 도시’, ‘시민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힐 수 있다.
이제는 공간을 단지 건물의 용도가 아니라, 기억의 장소, 체험의 현장, 민주주의의 물리적 구현 공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든 부산시장 별장이든, 더 이상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과 소통하고, 도시의 가치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는 권력의 방식에 따라 닫히거나, 시민의 방식에 따라 열릴 수 있다. 부산이 선택한 ‘개방’의 방식은 단지 정치적 상징을 넘어서, 관광, 문화, 교육, 도시 브랜딩까지 연결되는 포괄적 가치 창출의 기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공간을 통해 어떤 미래를 만들고 싶은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청와대는 닫히지만, 부산은 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은 시민을 위한 문이며, 미래를 향한 문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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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장관 후보 눈덩이 의혹에도 '전원 통과' 외치는 여당 오만
이재명 정부의 첫 내각 인사청문회가 이번 주 본격화한다. 오늘부터 닷새간 17명의 장관급 후보자가 잇달아 검증대에 오른다. 그야말로 ‘슈퍼위크’다. 여성가족부, 교육부, 통일부 등 주요 부처 수장을 포함해 이재명 정부의 국정 철학과 리더십을 가늠할 첫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여권은 “단 한 명의 낙마도 없다”는 방침에 따라 방어에 나섰지만, 야당은 강선우 여성가족부 후보자와 이진숙 교육부 후보자를 정조준하며 강도 높은 송곳 검증을 벼르고 있다. 하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각종 의혹 앞에서도 사과보다 엄호에만 몰두하는 여당의 태도는 유감스럽다. 지금 필요한 건 국민 눈높이에 맞춘 철저한 검증이다.
이번 청문회 대상자 중 일부는 이미 ‘낙마 대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은 단연 강 여가부 장관 후보자와 이 교육부 장관 후보자다. 강 후보자는 국회의원 시절 5년간 무려 46차례나 보좌진을 교체하고 자택 쓰레기 처리나 변기 수리 같은 사적인 업무까지 지시했다는 ‘갑질’ 의혹에 휩싸여 있다. 이 후보자는 충남대 재직 시절 제자의 논문을 대필·표절했다는 의혹에 더해 자녀의 불법 조기 유학, 논문 쪼개기 게재 논란 등으로 도덕성과 공직 윤리에 심각한 의문을 낳고 있다. 두 후보 모두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공직자 자격이 의심되는 인물은 청문회에서 엄정히 걸러내야 한다.
이 외에도 정동영 통일부 후보자의 농지법 위반 의혹, 윤호중 행정안전부 후보자의 음주운전 전과 등 줄줄이 도마에 오른 상태다. 전체 후보자 면면을 보면 크고 작은 도덕성 논란에 휘말린 인물이 적지 않다. 무결점 후보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일부는 국민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런데도 여권은 사실상 ‘버티기 인사’로 일관하며 실망을 더하고 있다. 특히 여당은 전원 통과를 기정사실화하는가 하면, 내부에서는 “소명이 안 되면 더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옴에도 이를 원론적 입장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겉으론 단호한 엄호를 외치고 속으론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이중적 태도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민의힘이 제기한 자료 미제출, 증인 배제 등 이른바 ‘맹탕 청문회’ 우려다. “청문회에서 해명하겠다”던 후보자들이 핵심 자료 없이 증인도 부르지 않고 또다시 책임을 회피한다면 청문회 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고위공직을 맡은 사회지도층이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불법 아니다”, “남들도 그랬다”는 말만 반복하는 데 깊은 허탈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이재명 정부 내각 출발선에서 여당은 때론 야당 비판을 정쟁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귀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시작이 청문회다. 대통령이 국민과 야당의 우려를 무시하고 인사를 강행한다면 책임은 결국 대통령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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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의대생 전원 복귀 선언… 의료 현장 신속히 정상화해야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반발해 장기간 학교를 떠났던 의대생들이 전격적으로 학교 복귀를 선언하고 나섰다. 의대생 단체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는 지난 12일 대한의사협회와 함께 입장문을 내고 전원 학교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2월 동맹 휴학에 들어간 지 약 1년 5개월 만이다. 그동안 정부가 유화 조치를 잇따라 밝혔음에도 응답조차 하지 않던 의대생들이었기에 이들의 복귀 선언은 의정 갈등을 풀 열쇠로 여겨진다.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대정부 투쟁 수위가 낮아지고 복귀 희망 의대생들도 늘어나자 협회 집행부가 강경 투쟁 일변도 입장에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의대생들이 복귀 선언을 했다고 해도 이들이 곧장 강의를 받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학사 일정 차질을 우려한 정부와 학교 측이 지난 학기 마지노선으로 제시한 복귀 시점을 넘긴 의대생들에게 곧장 수업을 허용할 경우 당장 불거질 형평성 논란 때문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미 전국 40개 의대의 유급 대상자는 8000명이 넘고 제적 대상도 46명에 이른다.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협회 측이 학생들의 복귀를 전적으로 환영한다면서도 학사 유연화에는 선을 긋고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일단 학생들이 정부와 대학에 복귀 길을 열어달라고 백지 위임을 한 만큼 향후 여름 방학 동안 복귀 방안을 놓고 치열한 논의가 예상된다.
의대생들이 전원 복귀를 선언하자 남은 관심은 의정 갈등의 또 다른 주체가 돼 온 전공의의 거취에 집중된다. 전공의도 지난달 강경파로 분류되던 비대위원장이 물러나고 대화파에 속하는 새 비대위원장이 들어서면서 복귀 논의가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의료개혁 실행방안 재검토, 입대 전공의에 대한 수련 연속성 보장 등 선결조건을 제시한 상태다. 이들은 오늘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만나 이달 말 하반기 전공의 모집 공고 등을 통해 복귀하는 방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정부도 특혜로 인한 형평성 논란 등을 우려해 아직까지는 이들의 움직임을 관망중이지만 곧 복귀 스케줄을 마련할 모양새다.
유례 없이 장기화한 의정 갈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와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환자단체들이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복귀에 앞서 한마디 사과도 없다며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복귀가 가시화한 것은 반가운 일이나 이들이 “의정 갈등은 정부 오판이 키운 문제였다”며 슬며시 돌아오기엔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 만만찮다. 그들은 자신들의 복귀가 곧 의료 정상화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나 진정한 의료 정상화는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다. 지역 필수의료 문제 해결 등 진정한 의료개혁 시작의 원점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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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여가부 잔혹사를 끝내자
얼마 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큰별쌤’으로 유명한 최태성 역사 강사를 만났다. 최 강사는 광복 80주년 기획전이 진행 중인 부산 박물관에 특강하기 위해 찾았다. 박물관 대강당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이 왔고, 최 강사는 ‘그날을 만든 사람들-부산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대형 화면에 ‘위대한 사랑의 역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영상이 비치고 있다. 최 강사는 “오늘 저는 위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부산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뜬금없이 무슨 사랑 타령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최 강사는 1시간 30분 동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에 나가기 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기록이다. 영화 ‘밀정’에서 이정재 배우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을 연기한다. 독립운동 동지가 변절의 이유를 묻자 “독립이 될 줄 몰랐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당시 많은 지식인, 지도자가 독립은 포기하고 일제와 타협해 조금 더 편하게 사는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독립운동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독립된 세상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폭탄과 함께 뛰어들었고, 살아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도 타협 없이 죽음을 택했다. 그 마음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후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 역시 앞서 싸운 이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것이다.
최 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여성가족부의 탄생 상황을 회상하다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사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처음 맡은 분야가 ‘여성·가족’이었다. 30년 전 ‘여성·가족’ 기사는 대체로 ‘슬기로운 주부 생활’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족 돌봄과 알뜰한 살림은 주부의 일이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같은 직종, 비슷한 경력에도 남성 직원이 여성보다 승진, 연봉에서 유리했던 차별 상황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돌봄, 젠더 폭력, 차별 등을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정책을 펼칠 독립 부처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인권 운동, 여성 운동, 시민 운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여성부 설립을 위해 국민 서명을 받았고 집회도 열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어려움이 많았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며 선배들은 광장에서 몸과 마음을 다쳐 가며 싸웠다.
그렇게 2001년에야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부는 정권마다 위상이 크게 출렁였다.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 ‘여가부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온 윤석열 정부 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대에 부딪혀 부서를 폐지하진 못했어도, 16개월째 장관을 공석으로 두며 여가부는 사실상 ‘식물 부서’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윤 정부 3년간 남성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도 않다. 청년층의 고립, 구조적 차별은 심해졌고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압박도 여전히 크다. 모든 국민이 보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버젓이 여성 신체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후보를 국회의원에서 제명시키자는 청원이 6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가 그 발언이 성폭력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를 확대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성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성평등가족부로 확대해 차별과 혐오, 고립과 폭력을 걷어내고, 다양성과 돌봄, 공동체를 회복하는 국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 소멸 위기에서 출생은 한 가족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돌봐야 할 일상의 단위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정권 변화에 따라 예산도 인원도 정책 방향마저 흔들리던 여가부 잔혹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다시 한 번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국민이 공정과 평등을 누리는 세상을 열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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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내각 절반이 국회의원
2009년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은 국무장관에 지명되자 바로 의원직을 사임했다. 미국 헌법은 각료와 의원의 겸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서다. 프랑스도 내각에 발탁되면 의원직을 수행할 수 없다. 삼권분립에 기반한 대통령제는 행정부가 국정을 책임지되, 입법부가 대통령 탄핵을 포함한 견제 장치를 통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한국은 대통령제의 역사가 길지만 출발은 내각제였다. 대한민국 정통성의 시원인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을 맡았다. 제헌의회도 내각제 지지가 다수였다. 하지만 정부 출범 초기 강력한 리더십의 필요성에 대통령제를 채택하되 대통령 국회 간선제와 의원 입각 허용 등 내각제적 요소를 절충하는 것으로 타협됐다. 개헌을 거듭하며 대통령은 직선제로 바뀌었으나, 의원의 내각 겸직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이었다. 이명박 정부 1기 내각에는 현역 의원이 아예 없었고, 역대 정부마다 서너 명 정도에 그쳤다. 김대중(DJ) 정부 때 김종필(JP) 국무총리 등 10명의 의원이 각료로 진출한 건 예외적이었다. ‘DJP연합’이 내각제 개헌을 공약했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각료 과반을 국회의원으로 채웠던 것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현역 의원이 장관이 되면 입법부 고유의 견제 기능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었다. 상임위에 못 가고, 국회 3대 임무인 입법과 국정감사, 예산 심의 수행도 불가능하다. 또 정부 정책을 수행하면서도 차기 선거를 의식하는 정체성의 딜레마에 빠진다. 포퓰리즘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는 의미다.
이재명 정부의 총리와 장관(19명) 지명자 중 현역 국회의원은 9명(45.0%)이다. 내각제를 내세운 ‘DJP연합’을 제외하면 역대 최다 입법부 차출이라 의원내각제가 연상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 각료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오늘 시작된다. 자질·도덕성 검증도 중요하지만 의원 입각의 장단점도 이번에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전임 윤석열 정부의 실패 배경에 대통령과 의회의 불통이 으뜸으로 꼽힌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건강한 비판 관계가 훼손되면서 치른 국가적 손실이 너무 컸다. 5일 간 이어지는 인사청문회 슈퍼위크 중 제헌절(7월 17일)을 맞는다.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의원 다수의 내각이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협치를 이끌어 낼지, 반대로 삼권분립과 입법부 견제 기능 약화로 또 다른 불통을 초래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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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문화시선] '핫플'이 된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론 뮤익’ 전시가 개막 90일 만인 지난 10일 누적 관람객 50만 명을 돌파했다. 4월 11일 개막 이후 하루 평균 5590명 이상이 관람해 올해 상반기 국내에서 가장 흥행한 전시가 됐다. 13일 막을 내린 이 전시는 서울에서 열렸지만, 기자도 5월 초 보고 왔다. 처음 간 날은 너무 많은 인파로 관람을 포기하고 돌아섰고, 다음 날 아침 ‘오픈런’ 대열에서 돌아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즈음이 관람객 10만 명을 돌파할 때였고, 국립현대미술관 담당 학예사는 “론 뮤익의 인물 조각은 보편적인 모습을 담은 익숙한 인간상을 리얼하게 구현해서 보는 즉시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을 끌어낸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전시였나 싶기도 했다.
물론 아시아 최초로 소개한 론 뮤익(1958년) 회고전에다 생애 통틀어서 48점밖에 안 되는 작품 가운데 두개골 100개로 이뤄진 ‘매스’ 등 조각 작품 10점과 스튜디오 사진 연작 12점, 다큐멘터리 필름 2편 등 총 24점을 선보이고, 작가가 워낙 대중한테 드러나지 않은 점도 흥행에 한몫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론 뮤익 전시의 성공 원인을 당시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뒤늦게 나온 분석을 종합하면, 2030 관람객이 70%나 됐고 국립현대미술관 SNS 채널의 관련 게시물 노출 수는 325만 건이 넘는 등 2030이 미술관의 변화를 강하게 추동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SNS로 소비되는 2030의 전시 관람 방식을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없지 않으나, 이것조차도 2030 세대의 소통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터부시할 건 아니라고 본다. 젊은 층이 모여들며 ‘핫플’이 되고, 일상으로 파고든 미술관이 그저 부러웠다.
다가오는 주말인 19일 부산서도 또 하나의 화제 전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국내 처음으로 개막한다. 10월 26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릴 이 전시는 스웨덴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의 예술 세계를 국내 처음으로 조명하게 된다. 특히 그의 대규모 회화 연작은 당시 유럽 추상 미술의 대표 예술가인 칸딘스키(1866~1944)나 말레비치(1879~1935)보다 앞서 추상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의 흐름도 재고하게 만든다.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 이어 서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산을 찾는 전시여서 얼마나 많은 국내 관람객이 찾을지 궁금하다. 유료이긴 하지만, 입장료는 도쿄(성인 기준 2300엔)의 절반 수준인 1만 원이다. 18일까지 사전 예매는 더 싼 6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어렵사리 부산에서 유치한 대형 전시인 만큼 많은 이가 보고 즐기면 좋겠다. 올여름 피서는 미술관에서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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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부산항의 경쟁 항만은 어디일까
‘경쟁 항만’이라는 표현은 항만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용어다. 부산항의 경쟁 항만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중국, 일본, 대만의 아시아 주요 항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정한 경쟁 관계를 논하려면 먼저 무엇을 두고 경쟁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살펴볼 대상은 수출입 화물이다. 한국에서 수출되는 해상 컨테이너 화물은 한국 항만을 거치지 않고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한국의 수출입 화물은 외국 항만과 경쟁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따라서 수출입 화물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국내 항만 간의 경쟁이다. 예를 들어 부산항과 광양항, 인천항, 울산항이 수출입 물동량을 놓고 점유율 싸움을 벌이는 구조다. 하지만 한국은 이 네 개 항만 모두가 중앙정부 소속 항만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는 항만 간 경쟁을 유도하기보다는 기능의 분담과 협업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친다.
반면 중국이나 미국, 일본 등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 나라의 대부분 항만은 지방정부가 운영 주체다. 예컨대 중국의 상하이항과 닝보항은 직선거리로 불과 150㎞ 떨어져 있으며, 저장성·장쑤성·안후이성 등 동일한 배후 권역의 수출입 화물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최근에는 산둥성의 칭다오항까지 이 경쟁에 뛰어들기도 한다. 미국 1, 2위 컨테이너항인 서부의 LA항과 롱비치항도 바로 인접한 위치에서 수출입 화물을 유치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을 펼친다.
그래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경쟁의 대상은 환적 화물이다. 환적이란 제3국의 화물이 특정 항만에 도착한 뒤 다른 선박으로 갈아타고 또 다른 국가로 향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부산항 물동량의 절반 이상이 환적으로, 이는 자국 수출입 중심 항만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세계적으로도 수출입과 환적 물량이 각각 1000만TEU를 넘는 항만은 부산항이 유일하며, 환적 물량으로는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환적은 선사의 선택에 따라 이뤄진다. 선사는 선박 운영 효율, 항만 서비스 품질, 비용, 위치, 연결 노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환적항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부산항의 환적 화물은 인근의 칭다오, 상하이, 가오슝, 도쿄 등과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만약 컨테이너 1개가 다른 항만에서 환적되면, 부산항은 해당 물량을 아예 잃는 셈이 되고, 반대로 부산에서 환적이 이뤄지면 양하 1회, 적하 1회를 각각 기록하게 되어 2개의 환적 실적이 집계된다.
중국은 세계 수출의 중심지로, 아시아발 북미향 수출 컨테이너의 60%, 유럽향 수출의 75%를 중국이 점유한다. 이 막대한 물량 덕분에 세계 상위 10대 항만 중 7곳이 중국에 몰려 있다. 그러나 중국 항만의 대부분은 자국 내 수출입 화물에 기반하고 있어 환적 비중이 크지 않다. 상하이나 닝보항의 국제 환적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다. 중국 내륙에서 트럭이 아닌 내항선으로 상하이까지 운송된 후 중국 타 항만으로 다시 해상 운송되는 화물은 엄밀히 말해 환적이 아니라 내수 물류다.
중국과는 반대로, 환적 물량 기준 1위 싱가포르나 3위 말레이시아 탄중팔레파스항처럼 환적 중심 항만도 있다. 하지만 이들 항만은 지리적으로 떨어진 위치에 있고 환적 시장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부산과 경쟁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반면 상하이, 칭다오, 홍콩, 가오슝, 일본의 주요 항만 등은 지리적으로만 봤을 때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일본은 GDP(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며 인구는 1억 2000만 명이 넘지만, 국제무역의 비중이 한국보다 낮아 연간 해상 수출입 물동량은 약 1700만TEU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물류의 분산 구조다. 부산항이 국내 전체 수출입의 62%를 처리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1위 항만인 도쿄가 28%, 2위 요코하마가 16%를 차지할 정도로 컨테이너 집중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주요 5대 항만과 더불어 80개 이상의 지방 항만에서 물동량이 분산 처리된다. 집중도가 떨어지면 대형 모선이 기항하기 힘들고 환적도 발생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본 전체 국제 환적 물량은 부산항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가 정책, 지리, 선사 전략, 수출입 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어, 단순히 “부산항의 경쟁 항만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정답을 내리긴 어렵다. 수출입만 놓고 보면, 부산항은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반면 환적 물량에 한해서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수많은 항만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쟁 항만 개념은 지극히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다. 결국 부산항의 경쟁 항만에 대한 답은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이 질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판단은, 독자 여러분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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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인간에게 성격이 곧 운명일까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성격이 팔자’라는 우리 속언과 호응하며 지금까지 꽤 설득력을 얻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는 존재에 관한 추측만 무성할 뿐 전해지지 않았고, 그의 말들만 조각으로 인용되곤 한다. 그래서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그의 말은 대부분 출처 없이 여러 말과 글에 등장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을 참고하면, 이 말의 원문은 ‘성품(ethos)이 곧 수호신(daimon)이다.’
원문과 떠도는 인용이 다소 다르다. 먼저 에토스(ethos)를 성격으로 번역할지, 성품으로 번역할지가 문제이다.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이기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성품은 성격이란 바탕 위에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개인 특성이기에 교육, 경험, 관계 등 다양한 요인으로 변화하며,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형성된다.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에토스이고, 옥스퍼드사전에서 에토스를 개인이 지니는 도덕적 생각과 태도라고 정의했으니, 에토스는 성격이 아니라 성품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만약 성격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이미 운명을 타고난다는 뜻이고, 성품이 운명이라면 운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글자 하나로 뜻이 완연히 바뀐다. 만물 유전설로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라면, 변화 가능성이 희박한 성격이 곧 운명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 다이몬(daimon)에 관한 번역도 문제다. 다이몬은 악마를 뜻하는 ‘데몬(demon)’의 어원이지만 본디 반인반신의 생물로 악마와 천사를 함께 품은 모순의 존재이며, 책에서는 ‘수호신’으로 번역했다. 다이몬의 번역은 다양하며, 그중에서 ‘운명’이란 의미가 있다. 다이몬은 사람일지 신일지, 천사일지 악마일지, 섣불리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운은 운인데, 그것이 행운일지 불운일지, 인생에서 좋고 나쁜 것은 명확하지 않다. 화가 복이 되기도 하고,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 인용된 원문은 ‘성품(ethos)이 곧 운명(daimon)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바른 성품을 갖추지 못한다면, 좋지 않은 운명을 맞아야 마땅하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인지생야직 망지생야행이면(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사람의 인생은 곧아야 한다. 곧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면 요행히 화를 면하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직(直)이 에토스가 강조하는 윤리적 생각과 태도, 즉 바른 성품을 뜻한다. 직(直)의 반대말이 곡(曲)이다. 곡학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자가 잘 살고 있다면 운이 좋아 화를 면하고 있는 것뿐이다. 운이 좋은 것도 한두 번이다. 결국 전 생애에 걸쳐 좋은 운명을 원한다면 바른 성품을 지녀야 한다.
바른 성품은 마음(heart)과 정신(mind), 의지(will)로 형성된다. 공감과 연민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함을 잃지 않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배움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지적 겸손을 갖추어야 공자가 직(直)을 강조하되 경직(硬直)을 경계했던 이유를 깨닫는다.
인생은 늘 반듯할 수 없다. 그래서 곡절 없는 인생이 없다고들 한다.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힘들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 통제력(self-control)을 갖춘 의지가 있다면, 그리하여 바른 성품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면, 성품이 곧 원하는 운명이 될 수 있다. 내 성품이 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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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AI 시대 경쟁력, 전력망 적기 구축이 선행돼야
AI 산업의 확산이 전력수요 증가에 가져온 파장이 만만치 않다. AI 서비스 구축에 필수적인 것이 데이터센터인데, 수도권의 산업입지가 포화됨에 따라 대체지로 지방도시가 각광을 받게 되면서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고 있는 부산의 전력수요도 급증할 전망이다. 또한, 부산시는 ‘기회발전특구’, ‘도심융합특구’ 지정 등을 통해 전력반도체, 이차전지, ICT융‧복합 지식서비스와 같은 첨단산업 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산 인근의 발전량도 지속적으로 증가될 전망이다. 새울원전 3·4호기(옛 신고리 5·6호기)가 2026년 완공 예정이며, 태양광,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에 의한 발전도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또 부산시는 서부산 일대 산업단지에 에너지저장장치 팜을 조성하는 방안으로 최근 산업부의 ‘분산에너지특화지역’ 공모에 최종후보로 선정되었다.
이렇듯 부산에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전력의 수요와 공급이 모두 커질 것으로 예상되나, 안타깝게도 전력계통의 수용여력 또한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는 전력망 인프라가 부족하여 늘어난 수요와 공급을 감당할 수 없고, 따라서 전기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필요한 때에 공급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된 전력을 적기에 수요지로 보내기 위한 송전망과 변전소가 더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한전은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대응한 ‘11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 등으로 미래의 전력수요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설비계획의 수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이터센터와 같은 전력 다소비 시설이 3년 정도면 준공되는 데 비해, 전력망 건설은 송변전 설비 인근 지역의 주민여론, 인·허가 등으로 훨씬 오래 걸리는 실정이다. 즉 수립된 계획의 실행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부산 일부 지역의 전력망은 한 방향에서만 전기를 공급받는 형태로, 이 경우 한 곳에서 장애가 발생하면 다른 경로로 전기를 보낼 수 없어 정전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2003년 태풍 ‘매미’ 당시, 경남 일부 지역으로 들어가는 단방향 송전선로가 끊어진 탓에 해당 지역에서 며칠간 정전을 겪었다.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력망을 환상망으로 조속히 보강할 필요가 있다. 환상망은 한쪽 경로가 끊겨도 다른 경로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어 정전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력 공급을 신속히 복구할 수 있다.
한전은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을 통해 국가기간 전력망 적기 확충에 임하고 있다. 앞으로도 전력망 건설에 대한 투명한 정보 공개와 수용적 대화를 통해 주민의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전력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급증하는 부산권 전력계통 안정을 위하여 STATCOM(Static Synchronous Compensator, 정지형 무효전력 보상장치)과 같은 첨단 특수설비를 확충하는 등 지속적인 투자에도 힘쓸 것이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첨단산업을 유치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데 핵심적인 기반이 된다. 전력망을 적기에 확충하기 위해 지역 주민의 이해와 협조가 절실하다. 한전과 지역사회가 꾸준히 힘과 지혜를 모아 연대한다면 지역 발전의 지속가능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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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북극항로 개척과 부산 청년 인재의 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역사적인 명연설 첫 구절이다. 누구에게나 꿈은 그 삶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어쩌면 도시도 마찬가지다. 꿈이 있는 도시는 번영하고 희망이 사라져버린 도시는 쇠퇴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20여 년간 부산은 꿈과 희망이 사라져가는 도시의 길을 걸어왔다. 해마다 3~4만여 명의 인구가 유출되는 도시, 광역시 가운데 최초로 초고령사회 진입과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된 이른바 ‘노인과 바다’의 도시가 바로 오늘날 부산의 자화상이다.
누가 뭐래도 부산의 전성기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였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로서 한때 서울보다 많은 100만 인구의 도시로 급팽창을 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은 공업화의 상징인 ‘경부 성장축’을 근간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다하였다. 이 당시의 부산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꿈이 있는 도시였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부산으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청춘남녀의 인재 유입으로 ‘다이내믹 부산’이 되었다. 그러나 부산의 인구는 1995년에 389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부터 지속해서 그 수가 매년 줄어들더니 급기야 현재 328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지난 30년간 무려 60만 명이 유출되었고, 이 가운데 과반은 부산에서 꿈을 찾지 못한 청년 인재들이었다. IMF 경제위기 이후 부산의 청년실업률은 10%대로 높았고,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든 도시에 청년 인재의 꿈도 사그라들었다. 과연 부산은 이대로 쇠락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
‘궁즉통’이라 했던가. 올해부터 부산은 글로벌 해양물류 허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그 실마리는 누가 뭐래도 북극항로 개척이다. 사실 북극항로 개척은 부산만의 기회를 넘어 우리나라가 재도약할 수 있는 역사적 대전환의 기회이기도 하다. 지구촌 기후환경 측면에서는 대재앙의 경고장이지만, 그렇다고 녹아버린 북극항로를 다시 얼게 할 수 없다면 잘 활용할 수밖에 없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의 바닷길 개척으로 오늘의 무역항로가 열렸고, 동서양 육로 문명교류의 상징인 실크로드가 작금의 유라시아철도를 열었다. 이제 새롭게 개척되는 북극항로는 지금까지 변방에 머물러 있던 동북아지역이 세계해양물류의 신세계로 급부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산이 동북아의 싱가포르로 되기 위해서는 지자체 수준의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이미 중국 상하이와 닝보에 비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다행히 이재명 정부가 북극항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해사법원 신설, 동남투자은행 설립, 대통령실 해양수산비서관 신설 등으로 발 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수년 내에 북극항로가 정상화된다면 부산과 그 배후지인 남부권 전체 산업에 미칠 전후방 연관 효과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북극항로는 포화상태인 수에즈 운하와 호르무즈 해협의 위험성에 대한 대안 항로로서 가치 또한 급증하고 있다.
혹자는 이번 북극항로 개척이 이미 십수 년 전부터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부산의 단골 공약(空約)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더구나 아직 연간 4개월 이상 북극항로 운항이 어렵고, 북극항로의 중간 기착 항구가 거의 없어 여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미 북극항로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라시아판 새로운 대항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과거 북극항로 개척의 비현실성 문제는 이미 항로 단축과 시베리아지역의 천연가스 등 무한한 광물자원에 대한 수요만으로도 가성비가 한층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북극항로 개척이 부산의 청년 인재에게 미치는 가장 긍정적 효과는 그들에게 부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미래 비전과 꿈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부산 경제 관련 세미나나 강의를 하면서 부산의 희망찬 미래를 논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극항로 개척으로 머지않아 글로벌 해양수도 부산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음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필자는 몇 주 전 이번 학기 종강을 하면서 마무리 발언을 이렇게 하였다. “부산의 청년 인재 여러분! 조만간 북극항로가 열리면 부산은 꿈이 있는 도시로 변모할 것입니다. 이제 기회의 땅이 될 글로벌 해양수도 부산에서 여러분의 꿈을 맘껏 펼쳐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