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개헌, 지방분권 개헌이 살길
12·3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했다.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윤 대통령이 복귀하길 바라는 국민의힘과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을 파면해야 마땅하다는 더불어민주당. 최근 거대 양당이 탄핵 찬반으로 나뉜 도심 집회에 편승해 ‘거리 정치’에 나서면서 여야 대립은 격화하고 있다.
정치권이 헌재를 압박할 의도로 여론몰이를 통한 지지세 결집에 몰두하는 탓에 국론 분열이 극심하고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럽다. 이런 상태에서는 헌재의 탄핵 결정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깨끗이 승복하기는커녕 보수·진보 진영 어느 한쪽의 거센 반발 등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정국 불안을 초래한 정치의 쇄신과 국가 안정을 위한 근본 해법으로 개헌이 꼽힌다. 게다가 이왕 개헌을 추진할 바엔 국가와 지방의 미래가 걸린 지역균형발전에 실질적 효과가 있는 지방분권형 개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 헌법 개정 필요한 이유
윤 대통령의 독단적인 불법 계엄 선포가 개헌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1987년 9차 개헌으로 마련한 현행 6공화국 헌법을 38년 만에 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초유의 이번 대통령 내란 사태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폐단이 여실히 드러난 만큼 제왕적 권한이 주어진 대통령제를 현실과 국민 눈높이에 맞게 수정·보완하자는 요구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막강한 권력과 역할을 분산하고 견제와 협력을 통해 민주적인 국가 공동체를 만들자는 게다.
이 같은 개헌 요구는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슈가 될 때마다 여야가 정파적 이익이나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며 충분한 논의를 기피하는 바람에 좌초되기 일쑤였다. 38년 전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임기 중간에 총선이 치러지면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될 경우 여야 간 극심한 정쟁으로 국회가 마비되기 쉬운 점도 개헌의 당위성을 높인다. ‘87년 헌법’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는 것이다.
■ 개헌에 대한 여야 입장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서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이 내부적으로 개헌을 위한 의견 개진에 적극적이다. 일단, 여론이 여권에 부정적인 위기를 모면하는 한편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에 대비하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여당은 이달 4일 주호영 국회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특위는 지난 13일 두 번째 회의를 갖고 이른 시일 내 개헌안을 내놓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앞서 윤 대통령도 지난달 25일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서 탄핵 기각에 따른 직무 복귀를 전제로 임기 단축 개헌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개헌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민주당 역시 당 차원으로는 개헌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윤 대통령 탄핵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보고 개헌 논의에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경우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 대표 입장에서는 성급한 의견 제시가 이로울 게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지 싶다. 이 때문에 이 대표가 개헌 논의에 서둘러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주문이 곳곳에서 잇따른다.
■ 다양한 방안과 움직임
구체적인 개헌 내용과 실시 시점에 대해선 생각이 제각각이다. 지난 4일 김형오 정의화 정세균 박병석 김진표 등 전 국회의장 6명과 정운찬 이낙연 등 전 국무총리 4명이 한자리에 모여 개헌을 논의했다. 이날 서울대에서 열린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라는 대담회였다. 여야를 망라한 이들은 대화·타협에 의한 협치와 정치 개혁을 위해 권력 분산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의원 내각제(의회제), 중대선거구제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지금이 개헌의 적기이므로 때를 놓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주로 여야의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개헌 추진 의지가 강하다. 국민의힘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동훈 전 대표, 유승민 전 의원이 임기 단축을 통한 개헌을 주장했다. 만일 조기 대선이 실시돼 당선되면, 대통령을 3년만 하고 개헌을 통해 2028년 대선과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식이다. 안철수 의원은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 개헌을 내놓았다.
민주당의 경우 김동연 경기지사가 분권형 4년 중임제와 책임 총리제를 포함한 개헌을 약속하며 대통령 임기 2년 단축 의사를 밝혔다. 김부겸 전 총리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야권 대선 주자 대부분도 분권형 개헌에 동의한다. 김두관 전 의원도 최근 <헌법개정 제안서>란 책을 펴내고 다음 달 4일 부산에서 북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권한과 임기를 조정하는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한국갤럽이 지난 4~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54%)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30%)의 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의의 계엄 사태와 혼란스러운 탄핵 정국이 국가 위기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지자 국민들이 고물가·고환율 등 직접적인 피해를 겪고 있어서 그럴 테다. 따라서 개헌 주장이 대선 등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국가적 불확실성과 탄핵 후폭풍을 해소하며 국가 시스템과 정치 체제를 민주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 때문이다.
■ 절실한 지방분권 개헌
우리나라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통해 세계 굴지의 경제·문화 수준을 갖춘 선진국으로 성장했으나, 정치 분야는 여전히 낙후돼 있다. 여야 간 극심한 정쟁과 극단적인 진영 갈등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감마저 감도는 요즘이다. 일상화한 정치 퇴행과 국정 공백 상황을 바로잡고 국가·사회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대책으로 개헌론이 대두되는 이유다.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도 최근의 개헌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특히 전국 시민단체들은 지방분권형 개헌 실시를 강력히 촉구한다. 나라를 살리고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을 이루는 데 지방분권 개헌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이어서다. 수도권 일극체제와 지역 소멸에 따른 인구 절벽 현상으로 수도권과 지방이 공멸할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지방분권 개헌의 실행은 절실하다. 지난 4일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가 양원제, 중대선거구제, 4년 중임 정·부통령제 등을 뼈대로 발표한 ‘분권형 헌법 개정안’은 지방분권 강화를 위해 참고할 만하다.
지방분권 개헌은 대통령 권력의 분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대폭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부처가 예산과 인력을 좌우하는 현행 중앙집권적·수직적인 행정제도 아래에선 지자체의 자율성 발현과 지역 활성화는 요원할 뿐이다. 올해 민선 지방자치 30주년을 계기로 지방분권 개헌 추진이 급선무다. 자치 재정권을 비롯해 지방정부의 자치 권한을 강화해야 비수도권이 되살아나며 국가 발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겠다. 이를 위해 헌법에 실질적 지방자치와 재정분권 보장을 명문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헌법을 근거로 국가적으로, 범국민적으로 지방분권을 실효성 있게 추진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개헌 그리고 과감한 지방분권 개헌 추진은 더는 미뤄선 안 되는, 국민이 바라는, 시대가 요청하는 과제다. 여야는 부디 당리당략보다 국익을 앞세워 조속한 합의와 추진에 방점을 두고 비수도권 국민이 함께 잘 살기 위한 개헌 논의에 집중할 일이다.
강병균 대기자(大記者)·논설위원 kbg@busan.com
-
[사설] 헌재, 야당의 무차별 탄핵 공세에 경종 울렸다
헌법재판소가 13일 최재해 감사원장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원 중앙지검 4차장, 최재훈 중앙지검 부장 등 검사 3명에 대한 탄핵심판에서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이번 탄핵안은 지난해 12월 5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헌정사 최초로 감사원장을 탄핵심판정에 세운 사유는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 이전 감사를 부실하게 하고, 전현희 전 권익위원장을 표적 감사를 했다는 것 등이다. 검사 3명에 대해서는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을 부실하게 수사했다는 이유를 달았다. 탄핵소추안 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던 이들은 98일 만에야 직무에 복귀했다.
헌법은 탄핵심판 대상이 된 공무원이 ‘그 직무 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를 탄핵 사유로 규정한다. 즉, 파면할 정도로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침해했을 경우에만 탄핵소추 대상이 된다. 물론 탄핵할 사안이라고 판단되면 소추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회가 발의한 탄핵소추안은 29건에 이른다. 본회의에서 가결된 것은 총 13건이다. 하지만 8건이 기각됐고 헌재에서 인용된 사례는 없다. 최 원장과 검사 3명을 비롯해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과 이정섭 검사에 대한 예전 판결 등 6건도 전원일치로 기각됐다.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젠 과도한 탄핵 공세가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심우정 검찰총장 탄핵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최근 밝혔다. 현실화될 경우 30번째 발의로 기록된다. 이재명 대표는 최근 ‘줄탄핵’이라는 지적에 대해 “우리도 좋아서 했겠냐”며 “헌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위헌 행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추가 탄핵의 명분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줄탄핵에 대한 부정 여론이 이어지자 나름의 방어논리를 펴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물론 국회의 탄핵소추권은 헌법이 부여한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리적으로 가능하더라도 도가 지나쳤다는 여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8전 8패라는 헌재 결정이 이를 말해준다.
우리 사회는 탄핵심판 때마다 혼란과 갈등에 시달렸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 앞선 이번 헌재 결정을 두고도 여야는 또 날선 공방을 펼치고 있다. 국민의힘은 “탄핵 남발 행태는 본질을 벗어난 이재명 ‘방탄·보복 탄핵’이자 ‘정치 탄핵’이라는 비판이 나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은 “중요한 것은 윤석열 선고 기일을 신속히 잡아 파면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양분된 민심은 ‘심리적 내전’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차별적 탄핵소추가 국회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최후 수단으로 여겨지는 탄핵심판의 위상도 추락하고 있다. 국정 공백 등 국가적 손실도 막대하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탄핵심판 제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사설] 본격화한 부산교육감 선거전 교육 혁신 경쟁해야
부산교육감 재선거 일정이 내달 2일로 확정되면서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번 재선거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일과의 연계로 선거일이 언제가 될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탄핵 선고일이 늦어지면서 결국 선거일이 이 날로 정해졌다. 이에 후보 등록은 13일과 14일 양일간 진행되면서 각 후보의 선거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선거 대진표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후보 등록 첫날인 13일 진보 진영의 김석준 후보와 중도보수 진영의 최윤홍 후보가 부산시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로 등록했다. 중도보수 진영의 정승윤 후보도 오늘 중으로 등록을 마칠 것으로 예상된다. 부산의 교육을 이끌어갈 새 리더를 뽑는 중요한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이번 재선거는 지난해 12월 하윤수 전 부산교육감의 당선 무효형이 확정되면서 치러지게 됐다. 공식 선거운동은 오는 20일부터 투표 전날인 4월 1일까지다. 선거일까지 남은 기간이 20일도 채 되지 않아 새로운 정책을 내놓고 알리기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재선거로 유권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운데 진행된다는 점이 변수다. 교육감 선거는 대체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는데 재선거 역시 저조한 투표율을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역대 교육감 선거처럼 선거 막바지에 후보들의 정책 공약보다는 단일화 여부나 정치적 성향이 더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형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새 교육감 임기는 하 전 교육감의 잔여 임기인 2026년 6월 30일까지로 2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산교육감은 부산 지역 유치원, 초·중·고교생의 교육 정책을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또한 부산 시내 교육공무원의 인사와 연간 5조 원이 넘는 예산 집행 권한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교육 소통령’을 뽑는 것과 다름없다. 유권자들이 교육감 후보의 정책을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감 선거는 단순히 정치적 이념이나 세력 간의 대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선거 기간 교육 정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표를 얻기 위한 단기적인 공약을 넘어 실질적인 교육 혁신을 위한 경쟁이 펼쳐져야 한다.
부산의 교육 현황을 살펴보면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교육의 질 향상, 교육 격차 해소, 그리고 디지털 교육의 확대 등 미래를 대비하는 교육 개혁이 시급하다. 특히 교육 자원의 배분에서 지역 간 불균형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다양한 학생들의 요구에 맞춘 교육 환경과 지역 특성을 반영한 교육 정책도 필요하다. 교육감 후보는 정치적 이념이나 갈등을 넘어 오롯이 부산 교육의 백년대계를 염두에 두고 비전과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교육감은 단순히 교육 행정의 수장이 아니라 부산의 미래를 책임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이번 교육감 선거는 시민들이 부산 교육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기회다.
-
[김승일의 곰곰 생각] 트럼프 관세 전쟁, 공황의 그림자
“미국인들은 느려 터져서 생산성이 떨어져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이 문을 닫자 대규모 실직 사태가 발생한다. 다행히 중국 푸바오그룹이 공장을 인수해 재고용하자 지역 사회는 활기를 되찾는다. 한데, 중국 관리자들은 미국인의 굼뜬 일머리에 속이 터진다. 반면 미국인들은 중국식 근면과 규율, 업무 강도, 그 결과인 높은 생산성에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미국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해 대항하려 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2019년)는 미국에 진출한 중국계 기업이 겪는 문화 충돌이 주제다. 이 다큐를 본 기업인이라면 미국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돈으로 건물을 짓고 장비는 들일 수 있으나 일하는 문화까지 살 수는 없다.
‘무역 전쟁은 좋은 것이고, 이기기 쉽다.’(Trade wars are good, and easy to win.) 2018년 3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윗은 관세 폭탄의 예고편이었다. 트럼프 1기 때는 중국만 두들겨 팼지만 2기에는 동맹국도 가차없다.
우아한 외교 수사는 사라지고 무쇠 주먹만 휘두르는 낯선 미국의 이면에는 제조업 붕괴가 있다. 1960년대 제조업은 국내 총생산(GDP)의 25%였는데 최근 11%로 떨어졌다. 생산력이 몰락하고 기생적 금융자본주의만 번성하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일자리 하나는 비제조업 분야에 3.4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2000년 이후 제조업 일자리가 500만 개 이상 사라졌고 후방 효과로 비제조업 실업자까지 쏟아져 미국 사회가 입은 내상은 심각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는 ‘미국인 다시 취업하기’ 캠페인인 셈이다.
트럼프 관세 전쟁의 본질은 ‘일자리 빼앗기’다. 밥그릇 앞에 이념도, 동맹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5일 의회에서 인도, 중국, 한국을 부당 관세 국가로 콕 집어 지목한 뒤 “우방이든 적국이든 똑같다”고 선언한 배경이다. 이날 연설의 핵심은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지 않으면 더 높은 관세를 매기겠다”였다.
반도체는 상징적인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대만과 한국이 반도체를 ‘훔쳐갔다’는 표현까지 썼다. 미국에서 탄생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과 대만으로 옮아간 과정은 자연스럽다. 한국과 대만은 적정 임금에 24시간 공정을 지탱하는 노동력 공급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불가능해졌기에 아시아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가 전략 물자로 부상하자 ‘미국에서 태어난 기술이니 도로 내놔라’는 억지가 시작됐다. 실제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대만의 TSMC의 팔을 비틀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게 해 놓고 정권이 바뀌자 약속했던 보조금은 안면몰수할 기색이다.
트럼프의 목표는 제조업 회생, 즉 일자리 창출이다. 그 수단이 관세다. 관세는 제품 가격에 흡수되어 미국 소비자에 전가된다. 캐나다가 미국의 25% 관세에 맞서 미국에 수출하는 전기에 25% 수출세를 부과한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이는 가구당 월 100달러(우리 돈 15만 원)의 생활비를 증가시킨다. 물가 앙등이 촉발한 경기 침체의 위기 경고가 미국 내에서도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상호 관세를 부과하고 세계 각국이 맞대응하면 물가 앙등, 무역 감소, 경기 침체는 필연적이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를 넘어 대공황까지 우려한다. 1930년대 세계 경제를 붕괴시킨 대공황과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어서다. 당시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해 최고 60% 관세를 매겼다. 다른 국가들이 보복 관세로 맞선 결과 세계 무역은 65% 감소했다.
10일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했는데 이유는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하는 중인데, 과도기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기 침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불안 심리에 불을 질렀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을 ‘거래의 기술’로만 이해하는 건 금물이다. 트럼프에 있어 ‘엄청난 일’은 산업 구조의 근본적 개혁이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어서 관세 폭탄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임기 4년의 트럼프가 무서워 미국에 공장을 지을 턱이 없다. 12일 유럽연합이 최대 50%의 보복 관세로 반격한 것은 준비된 선전 포고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불가피하고 벌써 대공황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린다. 내수 비중이 높으면 그나마 버티겠지만 수출 의존도가 높은 데다 대미 흑자가 큰 한국은 시계제로다. 트럼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무역 전쟁은 나쁘고 이기기도 쉽지 않다.’ 승자 없이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인 이 무역 전쟁을 피할 길이 없는 처지가 참담하다. 한국은 최악 시나리오를 각오해야 한다.
-
[밀물썰물] 꼬마위성
1992년 8월 48.6kg짜리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가 대한민국 인공위성 1호 타이틀을 달고 우주로 발사됐다. 이 조그마한 인공위성의 발사가 훗날 대한민국의 우주시대를 여는 서막이 됐다.
인공위성은 무게에 따라 펨토위성, 피코위성, 나노위성, 초소형위성, 소형위성 등으로 나뉜다. 1kg에 못미치는 피코위성과 수십g짜리 펨토위성은 가로 세로 높이가 10cm 이하여서 부피 1리터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극소형 위성이다. 1~10kg짜리인 나노위성까지 ‘꼬마위성’으로 불린다. 10kg을 넘어가면 초소형으로 분류된다. 우리별 1호도 48.6kg짜리이므로 꼬마위성 수준을 넘는 초소형위성에 속한다. 100kg이 넘는 위성부터는 소형·중대형위성으로 취급된다.
초기 우주개발 시대에는 중대형 인공위성들이 정부 주도로 개발됐으나 전자전기 기술과 광학 기술의 발달로 모듈의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꼬마위성 개발이 가속화하고 있다. 이젠 개인회사 차원에서 프로젝트를 수주한 뒤 소형위성 이상급과 맞먹는 꼬마위성을 잇따라 공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2006년 한국항공대가 무게 1kg짜리 꼬마위성 한누리 1호를 제작해 러시아 발사체에 실어 쏘아올린 바 있다. 발사체 문제로 정상 궤도 진입엔 실패했으나 이후 2013년 경희대가 미국 버클리대 등과 협업으로 개발한 3kg짜리 시네마호 위성 발사 성공의 토대가 됐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주최로 국내 여러 대학이 참가하는 꼬마위성 경연대회가 해마다 열려 우주기술 저변 확대와 전문 인력 양성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민간 영역으로 우주개발이 확대되면서 마침내 국내 최초로 기초지자체가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시대가 열렸다. 경남 진주시가 14일 진주샛-1B호로 명명된 1.8kg짜리 나노위성을 미국 스페이스X사 발사체에 실어 발사하는 것이다. 진주샛-1B호는 바다 감시 데이터 등을 수집해 지역 기업에 무상 제공할 예정이다.
진주시는 2019년 한국산업기술시험원, 경상국립대 등과 위성 개발사업을 시작했고 2023년 나노위성 진주샛-1호 발사를 시도한 바 있다. 당시 발사체 문제로 실패했지만 위성 자체의 성능은 문제가 없었다는 평가다.
진주시는 진주샛-1B호 발사가 성공하고 나면 시비와 도비 등 50억 원을 투입, 더 큰 위성 개발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다. 작디 작은 꼬마위성에 담긴 우주개발의 크나큰 의지가 신선하다.
-
[이은철의 정가 뒷담화] 행사가 뭐길래
정치인들에게 있어 지역 행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홍보의 장이다. 이 자리에서의 말과 행동은 비용이 발생하는 광고 문자·전화보다 구전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이크를 둘러싸고 배석자 간 얼굴이 붉히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최근 들어 손발을 맞춰야 하는 국회의원과 구청장간 갈등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지난주 부산 A구에서는 구청장이 국회의원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발언하면서 참석자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참석자에 따르면 이 구청장은 국회의원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30분가량 자신의 구정 활동과 관련한 PR을 쏟아냈다. 반면 국회의원 발언 시간은 6분 남짓이었다. 이에 해당 국회의원은 현장에서 바로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주변 참모들에게 간접적으로 구청장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일 때문에 두 사람이 독대하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B구의 국회의원과 구청장의 불화설은 지역 정가에 파다한 소문이다. 한때는 영혼의 단짝이라고 불릴 정도로 남다른 호흡을 자랑했던 두 사람이지만 매 행사마다 국회의원 조연 역할만 맡으며 바람잡이로 전락한 구청장은 언젠가부터 동석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결국 국회의원의 호출, 구청장의 거부가 반복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만 지방선거가 내년으로 다가오면서 지금은 잠시 봉합됐다는 게 B구 지역 상황에 밝은 한 인사의 설명이다.
이처럼 이들 2곳을 제외하고도 같은 정당의 국회의원과 구청장 간 불편한 동침이 이어지고 있는 부산의 기초단체는 또 있다. 대부분 지역 역점 사업의 치적을 둘러싼 갈등이 대다수다. 정부 부처를 상대로 한 국회의원의 압박이 주효했다는 주장과 구청에서 실무 작업을 철저히 한 덕분이라는 주장이 충돌하는 형태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게 정치의 원칙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최근 이러한 기류가 다수 감지되는 것은 22대 총선을 거치며 새로 지역구를 맡은 현역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된 지역들 중 일부는 현역 교체가 이뤄지지 않기도 했지만 파열음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부산의 경우 대규모 교체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한다. 일부 구청장들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도 이같은 해석에 무게를 싣는다.
지역 발전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기에 국회의원과 구청장이 기싸움을 벌이면서 주민들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탄핵으로 멈춘 상황에 지역에서는 같은 정당 소속인 두 사람이 싸우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게 지역 소멸 위기의 한가운데 있는 부산시민으로서 개탄스러울 뿐이다.
-
[정훈의 생각의 빛] 부산항 북항 문학 르네상스를 꿈꾸며
올해 5월 7일은 1985년 ‘5·7문학협의회’가 결성된 지 40주년을 맞는 날이다. 군사독재와 반민주주의의 폭거가 횡행하던 때,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을 비롯한 소설가와 시인 및 문학평론가 등 일군의 문인들이 문학인의 결속과 협의체의 필요에 따라 중구 동광동의 한 식당에 모여 5·7문학협의회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이 협의회는 1987년 11월 ‘부산민족문학인협의회’로 확대 재편되어 지금의 (사)한국작가회의 부산지회, 즉 ‘부산작가회의’의 전신이 되었다.
부산작가회의는 그간 부산민예총 등 타 기관의 공간 일부를 빌려 오랜 시간 더부살이를 해오다 지난해 연말 동광동 인쇄 골목 쪽 비어있던 사무실을 임대받아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지역의 문학단체를 대표하는 부산작가회의의 독립적인 공간이 5·7문학협의회가 결성되고 무려 40년이 지난 시점에야 안착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단체의 공간 마련이 비용이나 예산이 비로소 확보되어 이루어졌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40년 전 중구 한복판에서 결성된 문학인의 뜻과 의지가 시간이 흘러 구성원이 확대되고 다양한 창작 세계를 펼쳐왔던 이력의 공간적 구심점이 다시 원도심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중구 일대는 작가 모인 작품 집필 공간
부산작가회의·소설가협회도 둥지 틀어
새 시대 이끄는 ‘원도심 창작 산실’ 기대
최근에는 부산소설가협회 사무실도 중앙동 부산우체국 뒤편 골목에 자리 잡은 건물에 들어서기도 했다. 인쇄소와 출판사가 즐비해 1980~1990년대 당시 문학인의 교류가 활발했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문화공간과 구성원 및 단체의 이전과 분산의 흐름에 따라 침체의 늪에 빠졌던 ‘원도심 문학’이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형국이다. 아울러 그동안 숱한 예술인들의 ‘문화사랑방’ 구실을 했던 ‘양산박’이나 ‘강나루’ 등의 주점이 사라지면서 오갈 데 마땅치 않은 작가들이 각종 창작프로그램이나 북콘서트를 비롯한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장소가 확장됨에 따라 삼삼오오 이곳 중구 일원으로 모여들고 있다.
부산 중구, 특히 동광동과 중앙동 일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오욕과 영광을 아우르는 장소였다. 동광동은 1678년부터 1876년 부산포 개항까지 지금의 용두산 일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량왜관의 동관(東館)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관’과 인근 ‘광복동’의 첫 글자를 따 지은 행정구역이다. 중앙동은 1900년대 초부터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북항 매축공사에 따라 바다를 매립, 지금의 중앙대로와 충장로 일대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기존의 일부 지역에 편입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과 대륙 침탈을 위한 발판으로 건설한 1부두와 부산역 등의 육·해상 교통 플랫폼을 끼고 있어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과 문화가 유입된 곳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 패션 1번가로 명성이 높았던 광복동, 한국에서 가장 큰 어패류처리조합인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 한국 최초로 조성된 공설시장인 부평깡통시장이 있는 부평동, 한국 최대 규모의 책방골목이 있는 보수동 등 이곳 중구는 부산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 전체로 봐도 손색없는 근·현대사와 문화의 ‘성지(聖地)’ 중 하나이다. 여기에 부산항 북항을 끼고 있는 동광동과 중앙동 일대에 속속 둥지를 틀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문학단체와 작가들이 가세해 바야흐로 부산 문학이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기 위한 기반과 여건이 얼추 마련되었다. 2017년경에는 다른 구(區)보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중구 일원에 터를 둔 문학인들의 조직인 부산중구문인협회가 조직되어 지난해 제1회 용두산문학상을 제정하여 한평생 중구민으로서 창작 활동을 했던 아동문학가 강기홍 선생을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함성이 1987년 6월의 항쟁으로 되살아나 광복동과 남포동 그리고 중앙동의 거리에서 불꽃처럼 피어올랐던 땅이기도 하다. 비록 17세기 초량왜관 조성으로 근대적인 의미의 시가(市街)가 형성되었지만, 이후 세계사적인 격동과 전쟁 및 산업화·근대화를 지나면서 이 나라 산업과 문화의 조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곳이다.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을 중심으로 한 남항 일대와 임시수도기념관이 자리한 서구 부민동의 독특한 역사·문화적인 공간, 그리고 부산근현대역사관과 백산기념관을 품은 대청로를 가로지르면서 웅크리고 있는 형형색색의 글감들이 작가의 펜이 스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부산항 북항 일대에 오래전부터 작가들이 살면서 작품을 생산해 냈다. 삶의 터전으로서 주거 공간의 시간을 지나 지금은 ‘기획된’ 행위로써 작가들이 속속 모이는 공간의 시간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시간 속에서 운명처럼 글을 써야 했던 지난 세대의 작가정신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예술 형식과 내용을 불러내는 작업이 북항 일대에 번지기를 기대한다.
-
[공감] 골목을 걷다
오래된 골목 앞에 서면 비단 나만 그러할까. 이웃집 담장이 다닥다닥 어깨를 겯고 당목 이불 홑청이 햇살을 되쏘던 곳, 녹슨 대문 앞에 ‘개조심’이란 팻말이 문패같이 걸렸고, ‘셋방 있씀’처럼 맞춤법 한두 군데 틀린 광고지가 담벼락에 붙어있던 곳, 덜 마른 보릿대에 보리까락을 섞어 태운 모깃불 연기가 초저녁달을 향해 사라지던 곳, 큰소리로 순덕, 말남, 금자를 부르면 땟국물 절은 옷소매를 걷으며 맨발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곳. 옛 골목들은 언제나 휘황 다단한 현대의 삶도 한갓되이 무화시켜버린다.
오늘은 꽃구경 대신 골목을 걷기로 한다. 이왕 걷는 길은 낡고 한적하면 좋겠다. 빈 의자가 보이면 잠시 앉아도 되고, 낯선 집 처마 밑의 제비집 사진을 찍어도 나무라지 않는 인심이 있고, 창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유행가 몇 소절쯤 귀동냥으로 들을 수도 있으니까. 어디서 날아온 씨앗들이 잎을 틔웠는지 모르지만 냉이꽃 더미에 실핏줄 같은 거미줄이 엉켜 있고, 길고양이 한 마리쯤은 돌옹벽 아래에 널브러져 오수를 즐기며, 털빛 빤지르르한 검둥이도 남의 집 문간에 오줌을 갈기고 도망을 가야 제법 골목답다.
휘어져 여유롭고 느려서 편안
막다른 골목 앞에서 울어본 사람
굴곡진 삶을 살아온 사람을 닮은 길
구불구불 곡선 길을 뒤돌아보니
골목길 벗어나던 한때의 내가 있다
주례동 뒷골목에 하늘처럼 높고 용 같은 기상을 의미하는 하늘미릇길이 있다. 지하철역으로는 냉정역 2번 출구와 가깝고 위로는 동서고가가 우뚝하며 주변에는 위풍당당한 고층 아파트가 솟았다. 그 현대식 건물 아래 옛 마을이 납작 엎드린 채 골목을 거느리고 있다. 물줄기가 흘렀을 법한 움푹 꺼진 땅에도 골 따라 축대를 세우고 지붕을 올렸다. 하천을 그대로 남긴 채 한쪽 옆으로 옹벽을 쌓고 다다닥 들어선 집들은 마치 현대판 수상가옥처럼 보인다. 젊은 사람들은 아파트로 떠나고 토박이 노인들만 남았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편견일까. 헤드셋을 머리에 얹은 소년이 쪽문을 열고 나온다. 낯선 이방인의 호기심도 이미 익숙해졌다는 눈빛이다.
엉킨 전선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담장 위로 널린 빨래들이 주인을 대신해 봄바람에 펄럭인다. 어떤 집은 얼룩진 석벽 중간에 작은 화분으로 눈가림을 해두었고 어떤 집은 활짝 열어 빈속을 드러내었다. 고만고만한 담벼락 앞에도 흙 채운 붉은 고무통이 즐비하다. 쪽파와 상추와 봄동배추가 동백 화분 사이로 키를 키웠다. 귀한 생명들이다. 뿌리 내린 곳에서는 기꺼이 버티고 살아내야 하리라.
골목이라고 모두 퀴퀴하고 암울하기만 할까. 현대 골목은 급격하게 변신하고 있다. 무채색 벽들은 연두 초록 분홍 노랑 파란색으로 각자의 색깔을 내고, 구도심의 골목은 역사와 문화를 재생시키고 스토리를 입히며 각종 페스티벌과 야행 축제를 개최한다. 예쁜 카페들이 문을 열고 아담하고 소박한 빵집과 밥집과 책방과 옷집도 감성을 더하니 화려한 골목길은 입소문을 통해 빠르게 번져간다. 부산만 하더라도 해리단길, 청리단길, 전리단길, 망리단길, 덕리단길 등이 핫 플레이스라는 명칭을 얻어 골목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삶을 가꾸고 생을 지켜내는 골목도 남아 있다. 집이 안이고 골목이 바깥이라는 사실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길. 돗자리 하나만 깔면 골목 거실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온기가 남은 곳. 이곳도 어떤 이에게는 가슴 뛰던 옛사랑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길을 벗어나면 반듯한 도로가 나오겠지만, 태생이 깡촌이라 그런지 나는 후미지고 구부러지고 옆구리가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좁은 골목길이 좋다. 휘어져 여유롭고 느려서 편안하다. 무엇보다 막다른 골목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과 골목길처럼 굴곡진 삶을 살아온 자들을 닮은 길이니까. 구불구불 곡선의 길을 뒤돌아본다. 어둑한 골목길을 총총 벗어나던 한때의 내가 서 있다.
-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프리츠커상 건축가가 만든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룩셈부르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과 맞닿아 있으며 네덜란드와도 불과 50km에 떨어져 있지 않다. 3국이 면한 교통 요지여서 인구 60만 명에 불과한 이 나라의 국가명이자 수도인 룩셈부르크를 방문하거나 통과하는 일이 종종 있다. 시내 중심부를 지나던 중 백색의 독특한 외형을 한 건물이 인상적이어서 찾아봤더니,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가 만든 ‘룩셈부르크 필하모니’였다.
룩셈부르크는 1995년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는데, 그해 룩셈부르크 당국은 콘퍼런스와 콘서트홀이 동시에 가능한 건축물을 건설하기로 한다. 이어 모로코 출신의 건축가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 프로젝트가 공모에 당선된다. 공사는 2002년부터 시작해, 개관은 2005년 6월에 했다. 콘서트홀의 공식적인 명칭은 조제핀 샤를로테 대공비 콘서트홀인데 현 앙리 대공의 어머니 이름이다. 각국 사절단과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열었다. 당시 룩셈부르크는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으로, 룩셈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펜데레츠키 교향곡 8번을 세계 초연했다.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의 초기 아이디어는 자연스러운 필터를 통해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흰색 강철로 만들어진 823개 정면 기둥이 3열로 배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내부 기둥열은 공연장을 담고 있으며, 두 번째 기둥 열은 외벽 창문을 지지하고, 세 번째 기둥열은 하중을 담당한다.
슈박스 형태로 디자인된 그랜드 오디토리엄은 2만㎥ 규모와 최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직사각형이라는 평면의 제약을 극복하고 음향을 최적화하기 위해 8개의 상자 타워가 공연장 내부 양쪽 벽면에 불규칙하게 배치돼 균일한 사운드 분배를 한다. 잔향 시간은 콘서트홀로는 최적인 1.5~2초를 유지하고 있다. 무대 커튼의 유연성과 조절 가능한 음향 반사판을 설치한 덕분에 음향은 다양한 음악적 요구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룩셈부르크 필하모니도 그렇지만, 대부분 백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시의 공연장과 다르게 2000년대 이후 완공한 콘서트홀은 설계 공모를 통해 대부분 스타 건축가의 작업을 통해 태어났다. 건축가 장 누벨이 디자인한 루체른의 KKL과 필하모니아 드 파리,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LA 디즈니 콘서트홀, 그리고 헤어초크 드 뫼롱이 디자인한 함부르크 필하모니가 대표적이다. 건축가의 개성만큼이나 눈에 띄는 형태를 가지고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적어도 21세기에 지어지는 문화 공간은 음향학적 기능과 요구는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까지도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평소 생각에 일치하는 대목이다.
-
[기고] 차세대 해양정책 리더 양성을 위해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정책 수립 등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적 차원에서의 해양의 중요성과 잠재력에 대한 교육·홍보를 강화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가 진정한 해양강국으로 성장하려면 미래 세대의 해양 전문가 양성 기반 마련이 필수다. 이를 위해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과 같이 해양 진출을 희망하는 젊은이의 관심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해양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해양 전반에 대한 관심을 확산하기 위해 해양수산부가 정부 차원의 노력을 기반으로 국민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해양정책 리더 양성 아카데미 과정을 주최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국립한국해양대는 한국해양재단과 공동 주관으로 차세대 해양정책 리더 양성 아카데미 과정을 2022학년도 2학기부터 정규교과목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23학년도 2학기부터 2024학년도 2학기까지 차세대 해양정책 리더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누어 확대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은 우선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해양영토, 해양안전, 해운항만물류, 해양환경, 해양경영경제, 국제해사, 해양안보, 해양과학기술, 수산, 해양문화, 해양레포츠, 해양교육 및 미래해양 등의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 및 저명인사들의 교육을 통한 해양정책 소양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교육 과정의 강사진은 국립한국해양대를 중심으로 해양수산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해양수산연수원, 한국해사협력센터, 해양환경공단, 한국선급 소속의 국내 최고 해양정책 전문가들이다.
주요 교육 내용은 우리나라 해양정책 개념과 중요성을 주제로 첫 수업이 진행됐고, 이어 해양영토, 해양안전, 해운·항만과 물류, 해양경영·경제, 해양안보, 해양문화, 해양레포츠에 대해 국립한국해양대 교수진이 강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소속 연구원이 해양환경, 수산정책, 글로벌해양 분야에 대해, 그리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소속 전문가가 해양자원 분야에 대해, 그리고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소속 전문가가 해양교육 분야에 대해, 그리고 해양환경공단 소속 전문가가 해양오염 분야에 대해, 그리고 한국선급 소속 전문가가 자율운항선박 등 미래해양정책 분야에 대해 강의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국립한국해양대가 자랑하는 세계 최대 첨단 실습선에서 선장 출신 교수가 직접 선박의 특성과 종류 등에 대해 대면 교육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이어서 선내투어, 시뮬레이터 체험 등 승선체험교육도 했다.
지난해에는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해양수산 글로벌전략에 대한 특강과, 한국해사협력센터 소속 전문가의 국제해사기구 탈탄소화 정책에 대한 특강을 진행해 해양정책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를 더했다.
해양수산부, 한국해양재단과 국립한국해양대가 주최·주관하는 이 사업은 실무적으로 국립한국해양대 산학협력단·교양교육원·교수학습개발원이 공동으로 추진했다. 교육 대상은 국립한국해양대 재학생 및 총 31개교의 학점 교류 대학 재학생이었으며, 특히 2024학년도에는 국립부경대학교 재학생이 수강해 대상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 교육 과정은 차세대 해양정책 분야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해양정책 기초 및 전문 소양을 교육하는 학점 취득 과정으로 우선 국립한국해양대 및 학점 교류 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했다. 향후 이 사업을 해양정책 분야 학점은행제를 통한 대학 및 대학원 이수학점 취득, 편입 및 대학원 진학 학점 인정, 공공종사자 연수 과정 인정은 물론 해양정책 입안 지원을 위한 범국민 해양정책 분야 전문가 양성 아카데미 사업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
-
[사설] 대한항공 끝내 에어부산 분리매각 지역 염원 등 돌렸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에어부산 분리매각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 11일 열린 대한항공 본사에서 신규 기업 이미지(CI) 발표를 겸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다. 조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에어부산 분리매각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회장의 발언은 에어부산을 가덕신공항 개항 시 신공항을 모항으로 운영할 거점 항공사로 보고, 에어부산 분리매각을 요구해 온 부산 지역 입장과는 정면 배치된다. 대한항공이 에어부산 분리매각에 대한 지역 염원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지역의 입장에서는 ‘예고된 참사’다.
조 회장은 2019년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중심이 된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형제의 난’ 와중에 KCGI·반도건설·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3자 연합)은 산업은행이 ‘조원태 경영권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공격했다. 이때 정부, 대한항공, 산업은행이 내세웠던 명분이 지방 공항 LCC 허브 육성이었다. 대한항공은 2020년 11월 정부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 발표 당시만 해도 통합 LCC 허브를 지역 공항으로 하겠다는 약속으로 부정적 여론을 진화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2022년 통합 LCC 본사 소재지에 대해 “진에어를 브랜드로, 인천국제공항을 허브로 운항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경영권을 지킨 뒤 약속을 저버리는 ‘먹튀’ 행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 결합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국토부와 산업은행도 통합 LCC 본사 위치와 에어부산 분리 매각에 대해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국토부는 2020년 LCC 통합 본사에 대해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 옳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실에 제출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 관련 서면 답변서에서 ‘통합 LCC 본사 위치는 경영 상황에 따라 민간기업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산업은행 강석훈 회장도 지난해 6월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에어부산 분리매각에 부정적 입장을 밝혀 지역 여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에어부산이 지역 대표 항공사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은행 차원에서 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에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답한 것이다.
조 회장이 에어부산 분리 매각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히면서 부산시와 지역 사회는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가덕신공항 조기 개통과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역 거점 항공사가 필수적이다. 현실적으로 에어부산 분리매각이 어렵다면 통합 LCC를 부산으로 유치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진에어가 김포, 인천공항 기반의 투자를 계속하고 있어 이마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대한항공과 국토부, 산업은행은 지역의 에어부산 분리매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면 당초의 통합 LCC 본사 부산 유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해야 마땅하다.
-
[사설] 헌재 선고 앞두고 정치권 거리로… 국민 통합 어쩌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하자 헌재를 압박할 의도로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지난 8일 윤 대통령이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52일 만에 석방된 이후 연일 강성 진보·보수 세력의 탄핵 찬반 집회가 열리면서 여야의 ‘거리 정치’가 거세지는 모양새다. 현안은 내팽개친 채 국회를 박차고 나온 장외 정치는 헌재의 탄핵 인용 또는 기각을 바라는 거리의 찬반 대립이 격화하도록 선동하는 측면도 있어 자칫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탄핵심판 이후 국가와 사회 안정에 절실한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여론몰이를 끝내고 자중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의원들의 천막 농성과 단식, 삭발 등 수위가 높은 방법을 총동원해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헌재의 탄핵 결정이 야당 기대보다 지연될 것을 우려해 윤 대통령을 조기에 파면하도록 겁박할 목적에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2일 서울 광화문 앞 천막 농성장에서 4일째 단식 중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비명계 인사들과 시국을 논의하며 윤 대통령 탄핵을 촉구했다. 앞서 11일부터 초선 의원 3명이 헌재의 신속한 결정을 촉구하며 삭발에 나섰고, 일부 의원들은 단식 농성에 동참했다. 야당 차원에서 탄핵 선고 때까지 헌재를 압박하는 거리 투쟁에 주력한다는 속셈인데, 해결이 시급한 경제·민생 현안을 외면한 처사라는 지적도 많다.
국민의힘은 이같이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했는지 당 차원의 대규모 투쟁에 나서진 않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하지만 여당도 거리에 나서기는 마찬가지다. 윤상현·박대출 등 친윤(친윤석열)계 의원들이 지난 10일부터 헌재 앞에서 탄핵 기각을 촉구하는 밤샘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당은 이 같은 개별 행동은 물론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소속 의원들이 “헌재를 쳐부수자”는 극한 발언을 일삼아도 방치한다. 여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국론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최근 전국 도심 곳곳이 탄핵 찬반 집회로 갈라져 진통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정치권까지 거리에 가세하는 바람에 헌재의 탄핵 선고 당일 큰 불상사가 염려된다. 여야의 여론전에 흥분한 시위 군중이 선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울서부지법 점거 같은 폭력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선고 당일 헌재 주변 100m를 차벽으로 둘러싸는 경호와 갑호비상 발령을 검토할까 싶다. 여야는 사생결단하듯이 국민의 심리적 내전을 부추기는 한심한 행태를 멈추고 국회로 돌아가 국정협의회 운영 등 의정활동을 정상화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다. 정치권이 혼란의 최소화를 위해 자중하면서 헌재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 다수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여야는 국민 통합과 국정 현안 해결에 집중하기 바란다.
-
[데스크 칼럼] 도자기가게 코끼리를 우짤꼬?
독일 속담에 ‘도자기상점에 들어간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덩치 큰 야생코끼리가 귀한 상품들이 가득 진열된 도자기상점에 들어가 돌아다닌다. 코끼리가 움직일 때마다 부딪쳐 도자기들이 부서진다.
2기 행정부를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요즘 행보가 저 속담 속 주인공 같다. 취임 전부터 떠들썩했고 취임 후 전세계 곳곳에 대놓고 트집을 잡고 있다. “그린란드·파나마운하·캐나다를 미국땅으로 편입해야 한다” “멕시코만은 미국만으로 바꾸겠다” 등 발언이 거침이 없다. 여기까지는 한국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카드’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직격탄이다.
미국 정부는 12일부터 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엔 한국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에 관세를 물릴 방침이다.
이 같은 미국의 으름장은 어느 정도 약발이 받는 모양이다. 백악관은 지난 10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들이 관세로 인한 타격을 줄이기 위해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며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LG전자를 다국적 기업 10여 곳과 함께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현대차의 경우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가 지난해부터 시운전에 들어갔고 이달 말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현지화를 통해 미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역내 점유율을 유지하거나 확대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정부로서도 자국의 무역적자와 함께 미국 내 실업률를 낮추는 일석이조 효과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노믹스의 통상정책은 무역적자 개선이 최우선 목표”라고 했다. 2023년 기준 중국의 대미수출 규모는 4272억 달러로, 미국의 대중 수출규모 1478억 달러의 3배에 달한다. 트럼프 통상정책의 주된 관심대상 국가는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의 한국 무역적자는 514억 달러 규모로 중국의 5분의 1 수준이다.
관세를 피해 미국 내 현지공장을 짓는 게 과연 정답일까. 지난해 미국 출장 중에 간 식당에서 경험한 물가는 한국의 2~3배 수준이었다. 통계치로 나온 미국 평균임금도 한국의 배가량 된다. 동남아나 남미 등 인건비가 싼 곳과 비교하면 더 큰 차이가 난다.
인건비가 싼 지역 대신 미국 내에서 제품이 만들어진다면 가격은 수입 제품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미국산 TV나 자동차를 사게 된다. 이로 인해 소극적인 구매로 이어져 결국 경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렇게 해서 최근 생겨난 신조어가 ‘트럼프 리세션’(경기후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을 댕긴 관세 전쟁이 제 발등을 찍어 상대국은 물론 미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부메랑이 될 것이란 얘기다.
실제 미국 경제성장률을 실시간으로 추정하는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의 지디피나우(GDPnow)는 지난 6일(현지 시간) 올해 1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을 -2.4%(전기 대비 연율 기준)로 제시했다. 지난 2년여 동안 나홀로 성장을 이어온 미국 경제가 트럼프의 관세·이민 정책으로 후퇴할 것이란 우려가 커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 침체 전망에도 “큰일에는 과도기가 있다”며 다음 달 2일부터 미국의 모든 무역 상대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될 경우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최대 0.62%포인트 하락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인 제조업 위축으로 관련 산업 부진과 양질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의 대응 카드는 없을까. 벌써 캐나다와 중국 같은 대국들은 미국을 겨냥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맞불작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선 아직 그런 얘기가 없다. 자동차,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국내 그룹 총수들은 트럼프 대통령 아들, 실세 등에 줄대기 바쁜 모습이다. 미국 내 한국 기업의 대관 담당 인력도 보강하고 있다. 맞대응 해봐야 손해만 더 커진다며 피해 최소화 분위기다.
최근 국방, 조선, 반도체, 한류 등으로 국격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인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 한국은 아직도 올라갈 ‘산’이 많아 보였다.
-
[밀물썰물] 아침을 열던 소리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지만 기자가 학교에 다닐 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 시간마다 운동장에서 체조를 하곤 했다. 먼저 담임 선생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양팔을 앞뒤로 벌려 친구들과의 간격을 넓혀 체조 대형을 갖췄다. 이어 힘찬 구령과 함께 음악에 맞춰 전교생이 체조를 했다. 바로 국민체조였다. 대부분의 학생은 즐겁게 따라 했지만 그중에는 마지못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유년 시절을 국민체조와 함께하며 자랐다.
국민체조는 1977년 3월부터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정부가 학교를 중심으로 보급했다. 공공기관에서도 매일 국민체조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오전 6시 라디오에서 국민체조 구령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소요 시간은 5분 남짓으로 별도의 준비물도 필요 없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어 보급되자마자 급속도로 퍼졌다. 국민체조는 준비운동인 제자리 걷기를 제외하고 숨쉬기부터 숨 고르기까지 총 12개 동작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는 신나는 동작도 있는데, 바로 온몸을 사용해 노를 젓는 동작이다. 이 동작을 할 때 아이들은 격한 움직임을 하다 보니 친구에게 피해를 주어 선생님께 혼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세월이 지나 국민체조는 1999년 ‘새천년 건강체조’로, 2010년에는 다시 ‘국민건강체조’로 대체됐다. 일각에서는 집단 체조 자체가 ‘구시대 유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체조는 빠른 속도의 버전까지 등장했고 다양한 콘텐츠로 SNS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우렁찬 목소리로 아침마다 우리를 깨워준 국민체조 속 목소리 주인공인 유근림 경희대 체육대학 명예교수가 최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당시 체조선수들을 불러 20명 정도 되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국민체조 동작을 시키고 직접 구령을 붙였다고 한다. 정작 고인은 국민체조를 만든 대가로 따로 보수를 받은 적도 없다고 하니 안타깝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민체조는 근육 이완이나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넓히는 준비 운동으로 충분히 효과적이다. 목과 어깨 등을 움직이는 동작이 많아 평소 운동이 부족할 수 있는 상체 관절을 풀어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운동할 시간이 부족한 고3 학생들에게 잠시 짬을 내 국민체조라도 해보라고 권하는 이유다. ‘국민체조 시~작’. 지금도 이 구령을 들으면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대한민국 체육 교육과 건강 증진에 기여한 유 교수의 명복을 빌어 본다.
-
[중앙로365] 우크라이나를 망친 젤렌스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100만~150만 명의 국민을 희생시키며 3년을 끌어온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패전이 굳어져 간다. 나라가 거덜 났다. 국토의 20%는 이미 러시아에 넘어가 버렸고, 우방이라고 믿었던 미국도 등을 돌렸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는 앞으로 어떤 협상도, 회담도 없다”라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까지 한다. 미국은 100조 원어치를 퍼부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도 전면 중단했다. 광물 협정이 어렵사리 성사된다고 해도 우크라이나 국민은 앞으로 10세대 250년에 걸쳐 3500억 달러 혹은 그 이상을 미국에 내야 한다.
유럽이 일견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젤렌스키를 돕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남을 제물로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유럽의 ‘술책’이고, 게다가 미국이 빠진 유럽이 무슨 힘이 있을까. 프랑스의 평화유지군 파병, 영국의 4조 원 차관 약속이라는 것도 국제 정세와 역내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지난 2월의 나토 합동 군사훈련에도 32개 나토 회원국 가운데 겨우 9개국만 참가했다.
전황 정보를 종합해보면, 미국의 무기 지원과 정보 중단 훨씬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의 패전은 명확했다. 살아날 불씨가 없다. 4개의 큰 전선 가운데 북쪽의 루간스크, 동남쪽의 자포리자와 헤르손은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에 넘어갔고, 도네츠크, 그중에서도 포크로우스크 전선만 우크라이나군이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희토류 등이 많은 광산 지대로 엄폐물이 의외로 많고, 전차전을 펼 수 있는 평야 지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초의 점령지에서 36%만 남은 서북쪽의 쿠르스크에서도 백악관 회담 결렬 이후 러시아 쪽의 공세가 심해졌다. 이러다간 수도 키예프와 서부 등 나라 전체가 없어질 판이다. 경제도 완전히 망가졌다. 그런데도 젤렌스키는 거꾸로 간다. 승산 없는 전쟁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계속 이어가려 하고, 징집 나이도 25세에서 18세로 확 낮추려 한다. 사업가들을 쥐어짜 정치자금을 더 불리고, 전 대통령과 군 최고사령관 등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국내 정적들을 미리미리 제거하느라 바쁘다. 거의 내란 수준이다. 이건 지도자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무모하고 잘못된 선택이었다. 작은 나라의 국가 지도자라면 전쟁보다는 균형 외교를 택했어야 했다. 핵 재무장론도 해결책이 아니다. 외세를 끌어들여 강대국과 전쟁을 벌이기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국가 기반이 너무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변방’이라는 뜻의 우크라이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독립의 역사가 겨우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키예프 러시아(882~1240)도 바이킹과 노브고로드 귀족들이 내려와 세운 고대 러시아국가였고,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서부는 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동부는 세금과 부역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와 살았던 러시아 하층계급 코사크의 자치구역이었다. 돈바스 지역에 지금까지 러시아 뿌리가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맞서 1654년에 러시아 제국에 영토 병합을 스스로 요청한다. 소련이 300년 뒤인 1954년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서류상으로 할양한 것도 사실은 이 사건을 다시 자축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1917년 2월의 러시아 부르주아혁명 혼란기에 잠깐 독립을 했다지만, 우크라이나가 실제로 독립한 건 소련 붕괴기인 1991년 8월 24일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고 국력도 약한 나라가 왜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며 침몰을 자초하는지,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몹시 안타깝다.
지도자의 죄가 크다. 서방은 떡 줄 생각조차 안 하는데 전임자인 포로센코 대통령은 말기에 헌법까지 고쳐가며 유럽연합과 나토 가입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더니, 젤렌스키는 더했다. 2019년 5월 집권 초기엔 균형 외교를 잠깐 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미군을 국토로 끌어들여 포 사격 등 도발을 먼저 감행하고 아예 중립과 등거리 외교를 포기해버렸다. 물론 우크라이나 비극이 젤렌스키 탓만은 아니고, 1990년 10월 독일 통일 때의 부시-고르바초프 약속을 어기고 미국이 계속 동진해오고 러시아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2022년 2월에 사방에서 내려온 탓도 크다. 그러나 지도자가 잘했으면 우크라이나가 오늘날의 이런 꼴은 당할 리 만무하다.
탄핵 정국이 올봄에 어떻게 정리되어 대한민국호가 어떤 새 출발을 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앞으로 국가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한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정보다 권력욕, 모험주의, 화려한 언변을 앞세우는 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엔 젤렌스키 동정론이 의외로 강한 듯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당하는 비극을 보면서 그저 약소국 지도자의 비애, 비정한 국제관계만 읽는다면 숱한 희생을 치른 비극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