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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문제는 창의력이야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1992년 미국 대선후보 빌 클린턴의 선거구호이다. 일반론에 의존하지 말고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직시하라는, 이 구호에 힘입어 클린턴은 선거에서 이겼다. 이후 나는 이 말을 스스로 다잡는 문구로 삼았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이 바보야!’
사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어디 개인의 문제에 국한될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이니,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유 의식이 필요하다. 일반론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도시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도시의 생존력과 직결된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 말은 더욱 절실하다.
여태까지의 비창의적인 태도를 반성한다면? 예컨대 서양의 도시계획을 모방한 교과서적인 가로망, 홍보에 열중한 가시적 랜드마크, 경제적 손익에만 바탕을 둔 확장과 개발. 그런 것들이 이 도시의 지금 모습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어정쩡한 도시의 현대는 바로 전 시대인 근대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정체성을 잃고 있으며, 고층화된 도시는 세련되었다고는 하나 그 속에서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인 것은 아닌지?
부산의 원도심에 위치한 몇몇 지자체가 또다시 산복도로 주변의 고도제한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주변과의 형평을 내세운 주민의 숙원사업이라는 주장에다 이번엔 북항재개발과 도심의 균형 문제를 보태어, 지난 50여 년간 유지된 도시계획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지자체의 주장이 관철되면, 지역의 경제적 가치 변동은 필연적이다. 여기에 자본이 침투하면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휘몰아칠 거라는 우려는 이미 경험된 바이고 불안한 이유다. 그렇다고 소극적 볼거리로 그 넓은 지역을 방치해야 할까? 일컬어 벽화가 그려진 판자촌과 그것을 둘러보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유아적 발상을 얼마나 더 유지해야 하는지? 양날의 칼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문제는 더욱 특별하다. 다운타운에 만연한 ‘집장사’라는 아비규환을 윗동네로 전염시킬 것인가, 아니면 어정쩡한 ‘산토리니’로 남겨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어쩌면 이곳의 사례가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래를 결정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타지역 사람들이 질문한다. ‘산복도로가 뭐예요?’ 우리에겐 익숙한 단어가 저들에게는 생경하고 유일무이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곳에 데려가면, ‘와!’하고 탄성을 내지르면서, 그들과 나는 마침내 이 도시의 내력과 풍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의 인문적, 도시계획적 가치를 이만큼 직설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운타운에서 실패한 밀집한 건물군의 방향은 아닌 것 같다. 빛나는 창의력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창의력은 일부 지자체 주민의 숙원과 일시적 비교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 모두로부터 나와야 하고, 공평하고 전체적이어야 한다. 일컬어 ‘경제성에 앞서 도시의 풍토, 지리, 역사, 등 인문적 관점이 도시 그림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고 앞으로 더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의회의 의사봉으로 쉬이 결정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시민 또한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집이 넘치는 도시에서 집의 생산이 답이 될까? 제한은 늘 발전의 걸림돌인가? 그때마다 제한을 풀어 몸집을 불린 이 도시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그림은?
답이 있을 법도 하다. 또 묻는다. “문제는 창의력이야.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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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욱의 오오티티] 동은이는 죄가 없다
*이 글은 드라마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글로리’ 문동은의 인생을 바친 복수가 마침내 끝났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없다’며 비릿하게 미소 짓던 가해자에게 동은은 가장 통쾌한 복수를 선사했다. 혼자서 한 일은 아니다. ‘없는 것들’의 연대, 아니 폭력으로 부모를, 인생을, 미래를 ‘잃은 것들’의 연대와 공감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완결된 복수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10일 시즌 2가 공개된 이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2주 연속 ‘넷플릭스 톱10’ 비영어 시리즈물 부문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넷플릭스 톱10은 주간 누적 시청 시간을 기준으로 콘텐츠의 순위를 매기는 유일한 공식 차트다. 더 글로리의 누적 시청 시간은 1억 2359만 시간. 영어 시리즈물 1위인 ‘너의 모든 것 시즌 4’의 누적 시청 시간은 6406만 시간. 더 글로리의 절반에 불과하다.
“너는 잘못한 일이 없니?”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고 한다. 더 글로리는 이 우문에 대한 현답이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학폭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면서 복수의 결과보다 과정에 초점을 맞춘 탄탄한 서사에 있다.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이 절대 명제를 향해 내달린다. 그래서인지 동은의 대사처럼 더 글로리 속 복수는 영화 ‘테이큰’ 같은 화려함은 없다. 동은은 18년간 증거를 모아 복수를 준비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숨긴 진실과 치부를 적절하게 폭로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인물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자격지심과 원한으로 맺어진 관계는 존재 자체가 서로의 약점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바둑처럼 치열한 수 싸움 끝에 동은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들의 ‘영혼’까지 무너뜨린다.
더 글로리엔 모든 부조리를 주먹 하나로 해결하는 범죄도시 ‘마석도’ 같은 통쾌함도 없다. 그 자리를 메꾸는 건 피해자의 연대다. ‘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는 서로 약점을 헐뜯으며 갈가리 찢어진다. 반대로 동은을 비롯한 피해자는 서로 상처를 보듬으며 한데 뭉친다.
피해자가 뭉쳐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하다. 다만 금자씨에선 복수의 순간에도 망설이거나,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피해자의 모습을 통해 복수의 찜찜함에 대해 말한다. 반면 더 글로리의 복수엔 찜찜함이 없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 ‘강현남’, 살인마에게 가족을 잃은 ‘주여정’ 등 피해자의 연대는 마석도, 금자와도 다른 차원의 통쾌함을 선사하며, 이 사적 복수극이 ‘권선징악’이라는 가치를 내걸어도 되는 이유다. 동시에 세상의 수많은 동은에게 보내는 위로다. 모든 피해자에게만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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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세계박람회와 미래도시 부산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1893년 시카고박람회장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흰색 인조석으로 마감한 건물에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모습은 그리스 신전을 방불케 했다. 검은 도시 시카고의 매연과 소음, 무질서와 부패를 새하얀 휘장으로 감추고 백색도시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백색도시 바깥에 유흥공간 미드웨이 플레장스(Midway Plaisance)를 설치하였다. 이곳에 인간 전시장이 있었다. 이국 문화를 ‘교육’한다는 명분으로 아프리카와 자바, 사모아 원주민들을 데려와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전시’하였다. 백색도시가 문명의 신전이라면, 미드웨이 플레장스는 미개와 야만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 공간의 끝자락에 동물원을 배치하였다. 인종을 서열화함으로써 백인 문명국가의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카고박람회는 한국이 처음으로 참가한 세계박람회다. 행정가와 통역사, 악공(樂工)들로 단촐하게 구성한 대표단은 제물포를 출발해 부산, 요코하마,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카고에 이르렀다. 정식으로 설치된 한국관에 가마와 관복, 부채, 짚신, 화승포와 같은 물품 21종을 선보였다. 윤치호는 물품이 빈약하여 부끄러웠노라 말했지만, 관람객들의 관심은 꽤나 높았다. 쏟아지는 질문에 일일이 응대하기 어려워 물품 이름과 용도를 종이에 써서 붙여놓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옷감과 자리, 문발, 자개장, 자수 병풍은 우수 품목으로 꼽히기도 했다.
1889년 파리박람회에서는 인도네시아 전통 기악합주 가믈란을 선보였다. 청동 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면 다른 악기들이 정교하게 선율을 장식해 나간다. 청동의 깊고 묵직한 음향과 철의 청아한 음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심장을 울리는 소리의 공명과 유려한 리듬을 서양음악의 기보 체계에 어떻게 담을 수 있겠는가. 가믈란은 드뷔시와 라벨 등 파리의 음악가들을 단숨에 매료시켰으며, 뒷날 존 케이지, 벤저민 브리튼과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박람회는 비서구 식민지문화를 야만적 볼거리나 문명의 타자로 호출했지만, 관람객들은 제국주의적 시선에 쉽게 포획되지 않았다. 드뷔시가 가믈란이라는 창을 통해 신비와 몽환에 이른 것을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으랴.
국제박람회기구(BIE) 실사단이 2030세계박람회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곧 부산을 방문한단다. 박람회는 다양한 문화가 길항하며 새롭게 탄생하는 공간이다. 유럽문화를 기계적으로 추수하던 과거와 달리, 이질적인 문화가 저마다의 색채로 들끓으며 자신의 존재성을 한껏 발산하는 장이다. 부산은 낯선 문화와 충돌하면서도 이를 오롯이 품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온 혼종도시가 아니었던가. 여기, 세계박람회를 통해 문화의 착종(錯綜),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 접경의 생명력으로 출렁이는 미래도시 부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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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칼럼] 자기정치의 부재, 낯부끄러운 현수막
벚꽃 절정이다. 지금 부산의 산은 벚꽃 동산이요, 거리는 벚꽃 천지다. 낮에는 꽃 무더기가 바람에 흔들리며 봄의 교향악을 울리고, 밤에는 꽃등을 환히 밝혀 봄밤의 달콤한 세계로 이끈다. 주말 지나고 비라도 오면 속절없이, 그리고 가뭇없이 스러지고야 마는 게 제 운명인 것을 알기에 벚꽃은 더 아름답고 찬란하다. 다행히 봄꽃의 향연 속에 2030부산엑스포로 가는 관문인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현지 실사가 내일모레 막 오른다.
아침 출근길에 ‘엑스포가 세긴 세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낙화를 아직 준비하지 않은 꽃그늘 아래로 청명한 도시 미관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맑고 깨끗한 도시라니, 부산의 재발견이다. 실사단 맞이를 위해 정치 현수막을 일제히 걷어 내자 부산의 길거리 풍경이 사뭇 달려졌다. 이 적요한 아름다움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덕지덕지 나붙어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욕설과 비방의 낯부끄러운 언어로 국민 정서에 막대한 피해를 부른 현수막은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에 걸쳐 길거리 공해의 주범으로 꼽혔다. 당연히 수도권 비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현수막 공격의 화살이 고스란히 정치 혐오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곳은 정치권뿐이다.
현수막 정치에는 정치권 그들만의 특권이 작동하고 있다. 올해 들어 갑자기 정치 현수막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국회가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아 지정된 곳에만 걸 수 있었던 정당 현수막이 아무 곳에나 개수 제한도 없이 15일간 자유롭게 걸 수 있도록 했다. 형평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으며, 현수막 제작 비용도 국고보조금이나 정치후원금에서 나가니 이런 후안무치가 없다.
통제 불능 상황을 더 심화하는 것은 현수막을 단속해야 할 구청 공무원들이 정치인 눈치를 보며 절절매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과태료 처분 외에 별다른 제재 방안도 없고, 금액도 건당 10~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적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특권의식이 나라의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정서에까지 악영향을 끼쳐도 개선의 기미가 없다. 법을 뜯어고쳐야 하는데 가만 놔두면 국회의원들이 나서 잘도 법을 바꾸겠는가.
여의도식 정치문법이 활개 치는 현수막은 한국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테면 부산 곳곳에 내걸린 정치 현수막을 보자. 국민의힘의 ‘이재명판 ‘더글로리’, 죄지었으면 벌받아야지’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순신 학폭·곽상도 50억, 검사 아빠 전성시대’ . 길거리정치에서도 완강한 양당 구도다. 다른 당은 제대로 명함도 못 내민다. 정치담론을 두 당이 장악한 인상이다.
더 문제는 똑같은 문구의 현수막이 국회의원 혹은 당협위원장의 사진과 이름만 바뀐 채 부산 곳곳에 내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현수막에서도 중앙정치에 볼모로 잡힌 지방정치의 현주소가 잘 드러난다. 정치 현수막에 지역 현안이 등장하는 것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특정 정당의 인기가 높은 곳은 그 당의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지역을 대변하는 정치인보다는 중앙정치를 잘 대변할 ‘막대기 정치인’이 있을 뿐이다.
중앙정치에 볼모 잡힌 게 어디 지역정치뿐이랴. 여의도 정가에서는 ‘자기정치한다’는 말이 잘못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수사로 사용된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소신에 찬 발언과 행동으로 정치적 야망을 펼치려 하면 사방팔방에서 주저앉히려는 세력과 맞서야 한다. 권력자의 뜻과 당의 방침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다.
BIE 실사단이 4월 7일 떠나면 ‘벚꽃 엔딩’에 맞춰 길거리는 다시 ‘정치 공해’에 노출될 것이다. 지역정치 자기정치는 없고 서울에서 붕어빵처럼 찍어 낸 현수막이 국회의원 당협위원장의 이름과 사진만 달리 한 채 부산 곳곳에 나부낄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일 180일 전인 8월부터는 유권자의 1인 현수막 게시도 가능해져 현수막 난장판은 극을 달릴 참이다.
마침 국회가 30일부터 전원위원회를 열어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제안한 선거제도 개편안 논의에 들어간다. 국회의장을 제외한 현역 의원 299명이 모두 참석해 2주간 난상토론을 벌이는데, 전원위 자체가 2004년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을 다룬 후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정치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만큼 양당 체제의 줄세우기식 정치풍토를 혁신할, 정치인을 위한 선거제가 아니라 유권자를 위한 진정한 선거제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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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엑스포 실사단을 맞는 시민의식
대학생 시절, 이집트로 한 달 동안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람세스’, ‘신의 지문’과 같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직접 보았을 때, 그 거대한 규모에서 나오는 건축미에 숨이 막힐 듯 압도당했다. 그러나 감동은 잠시였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 바가지 씌우기에 바쁜 호객꾼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이 주는 감동을 희석했다. 그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길에 들른 카이로의 혼잡한 도로와 매연, 그리고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은 그 좋았던 인상을 피곤한 기억으로 바꿔 놓았다.
반면, 길을 찾지 못해 지도만 바라보고 있던 나의 손을 잡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고마운 시민, 친구가 되고 우정을 나눈 것을 기념하며 집에 초대해 준 동갑내기 사막 여행 가이드, 친절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던 많은 사람의 모습은 이집트에 대해 품고 있던 부정적인 인상을 다시 좋은 기억으로 남도록 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집트에 대한 나의 인상은 세계사에 기록된 아름다운 유물도, 웅장한 건축물도 아닌 개개인의 시민과 그 나라의 시민의식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30월드엑스포 부산실사단을 맞는 우리 부산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관련 인프라를 잘 구축하고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실사단에 감동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실사단의 시내 이동 중 끼어들기와 과속, 쓰레기 투기와 고성이 오가는 소란 등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 감동은 사그라들 것이 분명하다.
반면, 방문지나 준비 상황에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곳에서 만난 시민의 강력하고도 진심 어린 엑스포 유치 열망, 실사단을 환대하는 모습과 높은 시민 역량을 보인다면 부족한 부분을 상쇄하고 오히려 더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따라서 부산시민 개개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의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시민의식(citizenship)’이란 무엇인가. ‘citizenship’의 어원은 라틴어 ‘civitas’인데, 이는 ‘국가, 공동체를 위해 기능하는 개인의 역할’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시민의식이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과 참여 그리고 책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러한 개념을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일반적 맥락, 특히 국가 및 국제 주요 행사를 앞두고 말하는 시민의식은 크게 ‘친절’, ‘청결’, ‘질서’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꾼다’라고 한다. 친절한 인사에서부터 시작하는 친절한 태도는 부산을 방문하는 실사단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줄 수 있다. 다음으로 청결도 중요하다. 청결 정도가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므로 방문지를 포함하여 이동 동선에 따라 눈길 닿는 구석구석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질서는 안전의 필수 요건이다. 생명과 직결된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므로 질서는 가장 중요한 시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엑스포와 같은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세계시민의식’도 배양할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UNESCO)에서는 세계시민의식을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주의, 정의, 차별의 철폐,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 더불어 사는 삶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기초하여 보면 세계시민교육은 빈곤, 환경문제처럼 현 인류가 직면한 범지구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 평화, 인권과 같은 인간의 보편 가치, 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 그리고 반편견 의식과 같은 다양성에 대한 존중으로 교육 내용을 구체화할 수 있다. 부산시민이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높은 세계시민의식을 함양해야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유치·개최하고 글로벌 허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사실 시민의식과 세계시민의식에 대한 내용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으로 이뤄져 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몰리는 행사가 끝난 뒤 방치된 쓰레기, 큰 행사를 앞두고 극성을 부리는 바가지요금, 피부색과 국적, 종교 등에 따라 달라지는 차별적 태도는 그동안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학교와 지역사회는 시민의식의 교육을 추상적인 거대 담론 혹은 지식이나 태도를 주입하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교육의 관점에서 그 내용과 방법을 점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이 결합한 글로컬(glocal) 시대에 살고 있다. 부산이 글로컬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엑스포 유치가 간절하다. 이를 위해 시민 개개인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하고 보여 줄 때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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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찰나에서 영원으로
보통 사람은 한 가지 재능도 얻기 힘들다. 그런데 여러 능력을 두루두루 갖춘 사람들이 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복합적인 화성을 바탕으로 매혹적인 선율을 작곡하는 능력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거대한 손으로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놀라운 연주 테크닉. 오케스트라가 지닌 최상의 소리를 끌어내는 악기 조율 능력도 출중했다.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차이콥스키를 잇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마지막 거장으로 명성을 드날린 인물이다.
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는 법이다. 정상에 서기까지 내면의 상처가 만만찮았다. 이 역시 세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우울증’ ‘혹평’ ‘향수병’. 교향곡 1번 초연의 비참한 실패로 지독한 절망감과 무기력증에 빠진 때가 있었다. 그를 살린 건 최면 요법이었다. ‘자네는 훌륭한 곡을 쓰게 될 것이야. 그건 멋진 협주곡이 될 것이야.’ 담당 의사는 3년간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그는 늘 비평가들의 악평을 달고 살았다. “얇은 감각에 의존하고 선율만 강조하는 단순한 음악.” 쇤베르크의 무조주의나 스트라빈스키의 전위 음악이 휩쓰는 당대 사조와 비교해 턱없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었다. 망명 뒤에는 미국 땅에 동화하지 못한 아픔이 있다. 전기 작가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의 병을 앓았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에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휘몰아친다. 아름다움은 치열함 혹은 지극함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교향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독주, 오페라, 합창, 가곡까지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작품을 부지런히 썼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음악을 향해 흘렀던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일 테다. 그의 레퍼토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28일은 라흐마니노프가 작고한 지 8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오는 4월 1일은 그가 태어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기묘하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인접해 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른 세월이 꼭 70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생애. 결국 우리 곁에 남은 건 음악이다. 그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는 불멸의 가능성을 음악에서 찾은 게 아닐까. 아름다움이야말로 영원을 사는 비결이라는 것. 그게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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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엑스포 실사 카운트다운, 차별화 전략이 살길
2030부산월드엑스포(세계박람회) 유치전의 최대 분수령이 될 국제박람회기구(BIE) 현지 실사단의 방한이 이틀, 부산 실사가 나흘 남았다. 부산이 2021년 6월 BIE에 엑스포 유치신청서를 낸 이후 범국가적인 유치 활동과 함께 추진하고 키워 온 엑스포 준비 상황과 개최 역량에 대한 BIE 실사단의 평가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는 부산이 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가 가능한 도시로서 갖고 있는 특장점과 능력을 실사단에게 최대한 잘 인식시키는 일만 남았다. 부산시와 정부는 이번 실사에서 다른 유치 경쟁 도시들과 차별화된 부산의 다양한 매력을 적극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승부수를 띄워야 할 것이다.
8명으로 구성된 BIE 실사단은 다음 달 4~6일 사흘간 부산에서 총 14개 분야, 61개 항목에 걸쳐 엑스포 유치·개최 역량과 준비 상태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평가한다. 앞서 지난 6~10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현지 실사에 이어 24일 프랑스 파리 BIE 사무국에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프레젠테이션 실사가 진행됐다. 다음 달 17~21일 이탈리아 로마 현지 실사도 예정돼 있다. 이런 가운데 부산의 최대 경쟁 상대인 리야드의 실사 대응 내용과 실사단의 반응을 철저히 분석해 부산 실사에 대처하는 게 급선무다. 유치 경쟁 도시들과 차별화한 전략을 탄탄하게 짜서 부산이 훨씬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다.
이 같은 이유로 부산시가 지난 28일 열린 최종 점검회의에서 ‘부산 이니셔티브(Initiative)’ 전략을 실사에서 펼치기로 결정한 것은 현명하고도 시의적절하다. 어디에도 없는 부산만이 가진 강력하고 차별화된 6가지로 실사단을 매료시킨다는 게다. 한국의 고도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개도국을 지원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실천, 친환경 수소·전기차가 달리는 탄소중립 구현, 메타버스·AI(인공지능)·드론·로봇·6G 등 첨단기술 적용, 글로벌 K콘텐츠 활용, BIE 창립 102주년 기념 등이 가능한 부산엑스포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실사 기간에 부산의 여러 강점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데 힘써 리야드를 압도하는 호평을 이끌어 내길 바란다.
엑스포 행사장의 뛰어난 접근성과 국민의 유치 열기를 인상 깊이 보여 주는 일도 중요하다. 현지 실사의 중요 평가 사항이어서다. 엑스포 전인 2029년 12월 개항하는 가덕신공항과 시속 180km로 달리는 부산급행철도(BuTX) 등 국내외 교통망의 우수성을 잘 설명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부산 실사에 맞춰 민관과 재계가 합심해 부산시민을 비롯한 전 국민의 유치 열망과 응원 열기를 알리는 다채로운 행사를 대거 마련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특히 부산시민의 주도적인 참여와 눈물겨운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실사단이 한국과 부산의 매력에 흠뻑 취하고 감동해 좋은 평가를 내리도록 만반의 준비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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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남북 긴장 최고조 속 흔들리는 외교안보라인
윤석열 정부의 초대 ‘외교 안보 사령탑’을 맡아 온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전격 사퇴했다. 김 실장은 윤 대통령과 50년 지기이자 후보 시절 ‘안보 과외교사’로 현 정부의 외교 안보 정책을 총괄해 왔다. “외교와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사퇴의 변이 있었지만, 사실상 경질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번 사퇴는 정상외교 최대 이벤트인 윤 대통령의 4월 미국 국빈 방문을 불과 한 달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어서 예사롭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16일엔 한·일정상회담을 엿새 앞두고 김일범 의전비서관이 사퇴했고, 이문희 외교비서관도 교체됐다. 이 모두 불과 3주 사이에 벌어진 전례가 없는 일이다.
4월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이 제안한 문화 행사 관련 중요 일정이 제때 보고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등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외견상의 이유일 뿐 외교안보 사령탑인 국가안보실장의 경질은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배상 해법 등 외교 현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외교부, 안보실 내부의 손발이 맞지 않은 알력설, 조직 내부 비밀주의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한국의 외교안보를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가 사분오열돼 오히려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 고조와 함께 4~5월 한·미·일 안보 공조 등 국가의 존망을 다루는 핵심 일정을 줄줄이 앞두고 있다. 북한이 전술핵탄두 ‘화산-31’ 사진을 전격 공개하고, 잠수함발사순항미사일(SLCM)과 핵어뢰 ‘해일’ 실험을 벌이는 등 고강도 도발을 이어 가면서 미군 해군 원자력추진 항공모함 니미츠가 한반도에 전개하고, 3월 한·미의 상륙훈련, 4월 한·미·일 대잠수함전 훈련이 실시되는 등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4월 말 한·미 정상회담, 5월 일본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 및 한·미·일 정상회담이 연속적으로 열리고, 핵 위협 대응 확장 억제 강화부터 반도체 규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경제안보 분야까지 핵심 의제가 한두 건이 아니다. 철저한 계획과 사전 준비를 담당할 탄탄한 외교안보 진영 구축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삐걱거리는 외교안보라인에 대한민국의 국익과 안위를 맡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떤 이유라도 혼란이 장기화해선 안 된다. 국내적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국정 운영 신뢰도 추락으로 엄중한 시국에 대한민국이 표류할 우려마저 높다. 대외적으로 적대국들은 우리의 혼선과 분열을 약점으로 활용해 그 틈을 파고들게 되고, 우방국들조차 외교안보라인의 대화 파트너 자격과 지속성에 의구심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다. 신속한 인적 쇄신과 내부 결속으로 혼란을 최대한 빨리 수습해 국민의 불안을 덜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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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동서고가로 ‘공원화 vs 철거’, 누구 이익이 우선?
부산의 동서를 잇는 핵심 도로인 동서고가로 중 사상~진양 램프 구간의 폐쇄는 결정됐지만, 이 구간의 활용 방안을 놓고 이견이 노출되면서 동서고가로 논란이 2라운드로 접어드는 모양새다. 7㎞에 달하는 사상~진양 램프 구간은 사상과 해운대 지역을 잇는 대심도(터널 공법으로 지하 40m 이하 깊이에 건설하는 도로) 구간과 겹쳐 결국 폐쇄로 가닥이 잡혔다.
남은 과제는 이 폐쇄 구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인데, 최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하늘 공원화’ 방안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폐쇄 결정으로 향후 이 구간이 철거될 것으로 믿고 있던 지역 주민들과 부산진구는 이 같은 방안이 떠오르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앞으로 사안의 진행 방향에 따라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간 본격적인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 “세계적인 ‘하늘 공원’ 가능”
동서고가로 사상~진양 램프 구간의 보존과 공원 조성이라는 아이디어는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부산그린트러스트를 주축으로 관련 포럼이 구성되면서 논의의 불길을 지피는 중이다. 올가을에는 정식 기구로 발족해 본격적인 논의를 펼치겠다는 계획이다.
논의의 요체는 이 구간을 철거하는 대신 도심 공중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도심의 폐쇄된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조성해 성공한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 그리고 서울 등의 사례를 본보기로 내세운다.
특히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보존하면서 조성한 ‘서울로 7017’과 비교할 때 동서고가로의 하늘 공원 조성은 훨씬 유리한 점이 많다고 한다. 서울로 7017의 경우 실질적인 너비로 보면 2~3개 차로에 불과한 데 반해 동서고가로는 4개 차로에 12~15m 정도를 확보할 수 있어 굉장히 넓은 편이다. 활용할 수 있는 실제 면적이 넓기 때문에 공원으로 조성한다면 자전거 도로와 산책 전용로 등도 함께 설치할 수 있어 복합적인 기능 수행이 가능하다. 충분한 논의를 거친다면 동서고가로는 세계적인 선형 휴식·녹지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그동안 피해 감내, 꼭 철거해야”
동서고가로 폐쇄 구간에 대한 하늘 공원화 논의가 제기되자 인근 주민들과 부산진구는 즉시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밝히며 발끈했다. 부산진구는 즉각 보도자료를 통해 부산그린트러스트 등의 하늘 공원화 추진에 대해 주민들의 뜻을 모아 강력히 저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부산진구의 반대 이유는 그동안 동서고가로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고가도로와 인접한 부산진구의 개금·당감·부암동 등은 대부분 주거 밀집 지역으로, 그동안 소음과 분진, 조망권 상실로 인한 피해를 온전히 감내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다 도시 중심지와의 단절로 지역 발전마저 지장을 받아 온 마당에 다시 동서고가로를 보존해 하늘 공원으로 만들자는 발상은 지역 발전의 염원은 물론 주민들의 삶까지 짓밟는 일로 받아들인다.
또 시민사회단체들이 언급하는 파리나 뉴욕 그리고 서울로 7017의 사례는 주변 지역이 대부분 상업 지역으로, 동서고가로가 지나는 부산진구의 여건과는 매우 다르다는 입장이다. 부산진구는 앞으로 주변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서명 운동 추진, 궐기대회 등 동서고가로의 완전 철거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 주민 여론이 결정 기준 돼야
도심 휴식 공간이 크게 부족한 부산의 현실을 고려하면 폐쇄될 동서고가로에 하늘 공원을 조성하자는 제안은 충분히 나올 만한 발상이다. 실제로 하늘 공원이 조성되면 부산을 대표하는 도심 휴식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탁 트인 하늘 공원 위를 걷는다면 북쪽으로는 백양산의 늘어선 산줄기를 감상하고, 남쪽으로는 수정산, 엄광산에 이어 승학산의 풍광까지 즐기면서 낙동강 변의 삼락생태공원에까지 자연스럽게 다다를 수 있다. 정말 기막힌 코스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부산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해도, 고가도로 주변 주민들의 여론을 무시한 채 하늘 공원을 강행하기는 어렵다. 고가도로로 인해 수십 년 동안 감수해야 했던 소음과 분진, 조망권 상실 등과 같은 피해를 또다시 이들 주민에게 떠넘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변 주민들과 지자체가 하늘 공원화 방안에 대해 즉각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반발하고 나선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들에게 무작정 전체의 편익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고통을 감내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주민 여론의 향배가 관건이다. 부산시와 시민단체가 하늘 공원을 조성하려고 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고가도로 인근 주민들의 이해와 동의를 얻는 과정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들 외 다수가 하늘 공원을 원한다고 해서 이를 등에 업고 서둘러 추진하려 해서도 곤란하다. 다수의 편익이 소수의 고통 위에 기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적인 하늘 공원을 조성하고자 한다면 주민 설득과 동의 과정에 드는 시간과 공력은 아까운 것이 아니다. 하늘 공원이 필요한 만큼의 진통과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그런 뒤에도 여의찮다면 결국 주민 여론이 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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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율 차량 2부제 동참, 엑스포 유치 ‘성공 열쇠’
부산은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여간 지속된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피난민들로 부산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후 1963년 직할시 승격을 거쳐, 1970년대에는 신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의 비약적 성장을 토대로 국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급격한 산업 패러다임 변화를 겪으며 도소매업, 운수업 등 내수형 서비스업이 지역을 견인했다. 하지만 서비스업은 부산의 신성장 동력이 되지는 못했고, 이제는 인구 감소 등 각종 도시 문제를 겪고 있다.
어쩌면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교통난일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부산 이외에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도로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자동차의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문제일테다. 우리나라가 교통 혼잡으로 낭비하는 비용은 2018년 기준 연간 6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지난해 국방예산(55조 원)보다 24%나 더 많다.
부산의 도로 여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시민들이 출·퇴근에 소모하는 시간은 평균 89분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28분보다 61분, 그러니까 1시간 이상을 더 소모하고 있어, 교통이 일과 삶의 균형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부산이 지닌 특별한 지형도 주요 원인이다. ‘삼포(三抱) 지향의 도시’ 부산은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모두 품고 있다. 산업단지도 도시 중심지보다는 주로 근교와 외곽에 위치하다 보니 동서 횡단을 위해 도심을 관통해야 하는 교통량이 상대적으로 많다. 외곽 순환도로, 내부 순환도로망 등으로 간선도로 교통량을 우회시켜 교통혼잡을 해소하고 있지만, 도로 위 차량의 증가 속도가 훨씬 빨라 획기적인 개선에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지난 13일 월요일 새벽 동서고가로에서 발생한 추돌사고를 떠올리면, 부산의 교통혼잡 현주소가 곧바로 느껴진다. 이날 동서고가로에서 발생한 사고 수습을 위해 교통 통제가 이뤄졌고, 이로 인해 서면, 연산동, 심지어는 안락동까지 연쇄 정체가 발생했다.
부산 시민의 염원인 2030월드엑스포 유치를 위한 국제박람회기구(BIE) 현지실사를 앞두고, 부산의 교통정책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날의 사고는 아찔한 기억이었다. 코 앞으로 다가온 BIE 실사단의 부산 시내 이동 동선 중에는 교량, 고가도로, 터널, 지하차로 등을 지나가는 구간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상습 정체구간인 대남지하차도와 동서고가로 또한 실사단이 탑승한 차량의 통과가 불가피한데, 이곳에서는 갓길과 같은 비상차로도 없어, 자칫 사고가 발생하면 차량 운행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부산시는 경찰·소방·보험사 등 관계 기관 합동으로 주요 지점에 ‘현장 신속대응 조치반’을 운영할 계획이지만 사후 대처보다 예방이 중요한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교통은 일상과 가장 밀접한 분야로 실사단이 이동 중 도로에서 받는 인상은 도시 전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수 있다.
부산시는 현지실사 기간인 4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시민 스스로 차량을 격일 운행하는 ‘자율 차량 2부제’를 시행한다. 실효성 확보를 위해 대중교통 운행을 확대하고 2부제 적용 차량의 공공기관 부설 주차장 출입도 제한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도 시민의 공감과 협조가 없다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이번 ‘자율 차량 2부제’도 수준 높은 부산 시민의 행동이 뒤따라야 의미가 있다.
‘자율 차량 2부제’는 단순히 원활한 교통 확보라는 의미를 넘어 부산과 대한민국의 품격을 한 차원 더 높일 소중한 실천이다. 물론 시행 중에는 적잖은 불편도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의 터전인 부산의 성공적인 월드엑스포 유치를 위해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는 아름다운 희생을 보인다면, 2030월드엑스포 유치는 희망이 아니라 현실로 곧 다가오게 될 것이다. 정임수 부산시 교통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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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봄날의 불청객 해무, 안전의식부터 챙기자
봄이다. 따뜻한 기운에 언 땅이 녹고, 산과 들은 화사한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해양경찰은 설렘보다 걱정이 앞선다. 봄날 찾아오는 불청객 ‘해무’ 때문이다. 해무는 바다에 끼는 안개다. 차가운 해수면 위로 따뜻한 공기가 유입되는 3~ 4월에 국지적・산발적으로 발생한다.
해무가 낀 바다를 지나는 선박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다. 작은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 곧 사고로 이어지는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
작년 이맘때 통영시 비산도 인근에서 항해 중이던 선박이 해무로 다른 선박을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했다. 또 오곡도 인근 해상에서 해무에 방향을 상실한 레저보트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례도 있었다.
때마침 행락객도 집중되는 시기인 만큼 해양 종사자는 평소 레이더 등 항해 장비 작동상태 점검하고 기상정보를 수시로 확인해 운항 계획 세워야 한다.
출항 전 또는 운항 중 해무가 끼면 무리한 운항을 자제하고 불가피하게 선박을 운항해야 할 땐 항법을 준수해야 한다.
레저‧소형 선박은 위치송신 가능 앱 설치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승객은 안전관리에 적극 협조하고 출발 전 안내방송을 듣고 비상 대피로와 구명 장구류 위치를 확인하는 등 기본 안전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한 번 더 고민하고, 철저히 확인하고, 함께 실천한다면 모두가 즐겁고 안전한 해양 활동이 보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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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롱패딩 입은 교황
최근 수갑 찬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사진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확산돼 미국 사회가 들썩였다.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투옥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표현한 사진들로 하루 4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물론 가짜 이미지였다. 디지털 자료 분석업체 대표가 이미지 생성 AI(인공지능) ‘미드저니’를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이 사진은 트럼프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배우와의 과거 성관계를 숨기기 위해 회삿돈을 합의금으로 지급하고 장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와 더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논란이 커지자 트위터는 해당 이미지가 게시될 때마다 ‘가짜’라는 공지문을 달고 있다.
AI 기술의 진화로 진짜 같은 가짜의 등장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즘이다. 딥페이크 기술로 사람과의 구분이 어려운 가상인간이 활동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기술이 진화를 거듭해 누구나 맘만 먹으면 진짜 같은 조작된 이미지를 손쉽게 대량 생산할 수 있다. 허위 영상과 이미지 범람이 정보 자체에 대한 전반적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경고도 이런 흐름을 거스러지 못한다. 사실과 허위 정보가 혼란스럽게 공존하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AI를 이용한 이미지 생성 기술이 산업적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되는 이면에 조작이 야기할 부정적 파급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지난달 트위터에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현장에서 ‘아이를 구조하는 소방관’ 사진이 등장해 모금 사기에 이용되기도 했다. 해당 사진은 AI가 만든 가짜 소방관이었고 모금에 이용된 가상화폐 지갑 주소도 과거 사기 행각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점점 더 어렵게 할 것이다.
트럼프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난 주말 명품으로 보이는 롱패딩을 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셜미디어에 등장해 화제였다. 교황은 순백의 패딩 위로 은색의 십자가 목걸이를 걸었다. 사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트위터 계정의 사진 조회수만 2540만 회를 기록했다. 네티즌들은 ‘진짜 힙하고 멋있다’ ‘스타일리쉬한 교황’ 등의 반응을 보였다. 미국 대학 교수가 ‘교황이 입고 있는 패딩 브랜드 이름은 무엇일까’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 역시 ‘미드저니’로 만든 가짜 이미지로 드러났다. 모든 현상에 의문을 던져야 하는 힘든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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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212. 꿈과 현실 사이 기록한 빛나는 초상, 임영선 ‘Banteay Srey/The sky and The earth’
임영선(1968~)은 몽골, 캄보디아, 티벳 등 동아시아 변방의 아이들을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1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3년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미술학원 대학원에서 판화를 배웠고, 1995년 베이징에 있는 중국당대미술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귀국 후 2000년대 중반까지는 ‘다른 그곳’ ‘바다는 하늘이 되고’ 등을 주제로 안식처이자 치유처로서의 푸른 바다를 표현했다. 작가에게 바다는 현실이 반영된 공간이자 미지의 공간인 ‘거대한 초월적 자연’이다. 바다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자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희망을 상징한다.
임영선은 2009년 개인전 ‘온 더 어스’에서부터 변방의 가난한 아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발표했다. 꿈과 현실, 그 사이를 기록하는 초상으로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구축했다. 변방의 아이들은 작가가 2008년 캄보디아 난민 캠프를 방문한 뒤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하지만 변방의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1993년 베이징 유학 시절, 몽골 방문이 계기가 됐다. 이후 작가는 캄보디아, 네팔 등에서 벽화 프로젝트와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그들의 현실에 스며드는 예술적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초월적 자연에서 동아시아라는 현실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 작가는, 바다로 안식처를 제공했듯이 동아시아를 다룬 작품에서도 ‘현실의 그들이 버틸 수 있는’ 희망의 터전을 발견한다.
임영선은 변방의 아이들과 실질적인 교감을 이어오고 있지만, 이방인의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작가는 그런 시선을 그대로 두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환경과 삶을 화면에 꾸밈없이 투영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화면 가득 채워진 어린이의 밝은 얼굴은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하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두 개의 상황이 혼재한 화면은 세상과 마주한 아이의 태도를 발견하게 만든다.
‘Banteay Srey/The sky and The earth’(2008)는 넓게 펼쳐진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메마른 땅을 딛고 서 있는 두 명의 여자아이를 표현했다. 다른 작품에서의 밝은 모습과는 달리 아이들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정면으로 서 있는 아이와 자전거를 잠시 멈춘 아이는 이방인과의 만남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메마른 땅과 땅을 딛고 있는 맨발은 척박한 현실을 반영하고, 왼쪽의 손가락 끝을 만지는 모습은 긴장한 아이의 심정을 나타낸다.
아이들의 옷에는 그들의 추억과 기억, 꿈의 자락들이 기록되어 있다. 정면으로 선 아이에게는 높이 솟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자전거를 탄 아이에게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리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하늘과 오버랩된 인물, 아이들에게 반영되어있는 또 다른 모습, 그리고 땅바닥에 널린 낙엽 사이로 아스라이 피어나는 옅은 초록 새싹. 이것은 아이들의 가슴에 품은 추억과 꿈이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닌,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은정 부산시립미술관 소장품자료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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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산은 이전 반대 민주당, 내년 부산 총선 포기했나
더불어민주당에게 묻는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 반대’가 민주당의 당론인가. 최근 민주당 정책위의장으로 임명된 김민석 의원이 첫 메시지로 산업은행 부산 이전 준비 작업에 대해 “사실상 법을 위반하고 정치적 선거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밝히는 등 반대 움직임을 노골화해 질문하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자신의 지역구에 있는 김 의원은 산은 이전이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던 시절부터 반대 목소리를 내고, 산은 노동조합과 보조를 맞춰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의원 개인과 제1야당 정책위의장이 내는 말의 무게감은 전혀 다르다. 민주당 이수진 원내대변인까지 “막무가내 산은 이전은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고 가세했으니 산은 이전 반대를 당론으로 정하기로 했는지 궁금하다.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국가 균형발전을 추진해 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대선 후보 시절에 수도권 공공기관 200여 곳을 일 년 안에 지방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도 오래전 민주당이 먼저 요구한 것인데, 이제는 그 사실마저 잊은 모양이다. 산은 본사를 서울로 명시한 산은법을 바꾸려는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민주당의 비협조로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부산시민들 눈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추진하기 때문에 민주당이 입장을 바꿔 산은 부산 이전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에 편중된 기능을 꾸준히 지방으로 이전해 온 민주당의 노무현·문재인 정신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민주당 김민석 의원은 2010년 부산이 고향이라면서 부산시장에 출마했다. 이랬던 그가 산은 부산 이전 반대를 주도하는 현실은 시쳇말로 ‘웃프다’고 하겠다. 당시 김 의원은 “부산을 바꿔 서울을 능가하는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고 외쳤다. 부산과 서울의 격차는 당시보다 말도 못 하게 커졌는데, 김 의원의 생각은 왜 180도로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한때 부산시장까지 꿈꿨던 김 의원의 산은 이전 반대에는 명분이 없다. 김 의원의 개인 의견이던 산은 이전 반대가 정책위의장 임명 이후 당론이 된다면, 내로남불을 민주당의 정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총선을 일 년가량 앞두고 여야는 이미 총선 모드로 들어간 분위기다. 지금 민주당 소속 부산 의원들과 부산지역 출마 예정자들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것이다. 박재호·전재수·최인호 의원이 김 의원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당내 갈등도 본격화되고 있다. 부울경에서 열세인 민주당은 명심해야 한다. 산은 부산 이전 문제에 대해 국민의힘이 찬성하고 민주당이 반대하는 선거 구도가 되면 민주당은 필패할 수밖에 없다. 산은 이전 반대가 민주당의 당론이라면 부울경 유권자의 호된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주당은 내년 부산 총선을 진정 포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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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노후 고리2호기, 재가동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부산 기장군에 있는 원전 고리2호기 가동이 다음 달 8일 중단된다. 40년의 운영허가 기한이 이날 만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조기 재가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원전의 경우 운영허가 만료 이후 재가동하려면 안전심사와 설비개선 절차가 필수다. 그런 절차를 이행하는 데만 못해도 3~4년이 걸린다. 현 윤석열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등 고리2호기의 조기 재가동을 요구하는 쪽은 이 기간도 아깝다고 여긴다. 원전 가동 중단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한수원은 2025년 6월 고리2호기의 재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고리2호기 가동 중단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연간 1조 50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산정해 29일 발표했다. 고리2호기의 예상 발전량을 액화천연가스(LNG)로 대체하는 경우를 가정해 그렇게 산정했다고 한다. 일종의 기회비용인 셈인데, 굳이 고가의 LNG를 가정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든다. 또 지난해 4월 한수원이 고리2호기 수명 연장으로 얻는 이익을 1600억 원으로 추정한 사실을 돌아보면 견강부회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거기다 설계수명이 다 된 원전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유·무형의 손실까지 고려하면 정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노후 원전에는 사고의 위험성이 운명처럼 따라다닌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가 우리나라라고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고리2호기에는 지난해 6월 발전소 내부 차단기가 불에 타 원자로가 정지하는 등 1983년 운영 이후 60여 차례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2018년 한국전력이 고리2호기에서 후쿠시마의 경우와 비슷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피해 배상액을 예측한 바 있는데, 무려 1667조 원이었다. 사고는 차치하더라도 원전 가동으로 발생하는 핵폐기물 처리에는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인가. 인체에 치명적인 핵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명이 끝난 원전의 재가동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 추진해야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리2호기 반경 30km 이내에만 400만 명의 국민이 살고 있다. 이들의 안전에는 한 치의 오차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안전을 전제로 고리2호기 재가동을 추진한다지만, 선뜻 신뢰하기 어렵다. 지난해 고리2호기 관련 공청회를 독선적으로 진행해 요식행위에 그쳤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고리2호기는 안전하지 않다. 재가동은 위험요소를 완전히 제거한 뒤라야 비로소 가능해야 한다. 돈을 앞세우며 졸속으로 추진할 일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