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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산불 예방 포스터와 대형 산불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당시 단골처럼 주어진 그리기 주제는 ‘산불 예방 포스터’였다.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산을 초록빛으로 칠하고, 때론 라이터나 담배, 때론 성냥개비나 부탄가스를 그려 넣으며 강력한 산불 예방 메시지를 담으려 고심했다. 토끼, 다람쥐가 뛰어놀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풍경이 빨갛게 번지는 산불로 지옥으로 변하는 장면을 담은 한 친구의 포스터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달 초 가족의 주말 출장에 동행해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 있는, 조선 시대 유교 문화의 중심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안동에 접어들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 안에 있던 아이들은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차창 밖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1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신록을 준비하고 있던 산림은 불에 타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산자락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집과 농막,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날씨까지 더해지며 마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만난 관계자는 “산불로 수련원에 이어지던 이용 예약이 취소됐고 문의도 끊겼다. 지역 경제도 모두 무너질 판”이라며 말했다. 수련원 주변 나무들이 모두 잘려 나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산불이 유구한 역사가 켜켜이 쌓인 안동 곳곳의 문화유산과 관련 시설을 위협해, 불이 옮겨붙을까 산 중턱부터 나무들을 죄다 베어버렸다고 했다.
2023년 초에도 취재 차 찾은 경북 울진에서 대형 산불이 남긴 상흔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22년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검게 탄 나무들은 산불이 꺼진 지 1년이 가까이 됐지만, 생채기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산불을 직접 겪은 이들의 경험과 아픔에는 비할 바가 안 되지만, 화마로 까맣게 타버린 자연과 송두리째 사라진 주민들의 일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형 산불 이후, 우거진 산림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야생 동물들이 다시 터전에서 뛰어놀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 지 예상하기 힘들다. 2000년 발생한 동해안 산불 피해 지역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인공 조림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말 발생한 대형 산불의 피해는 최근 산림청 조사 결과, 기존 발표치의 배 이상인 10만 4000ha(축구장 145만 개 면적)로 집계됐다. 역대급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피해 면적에서 종전 역대 최대였던 2000년 동해안 산불과,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2022년 울진·삼척 산불의 5배를 넘어섰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봄 날씨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흐린 날과 비가 잦았다. 겨울 날씨는 춥고 습했다. 그랬던 봄은 건조하고 강풍이 부는 날이 빈번해졌고, 겨울은 따뜻하고 건조해졌다. 인간이 주도한 기후 변화로 수십일씩 이어지는 대형 산불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됐고, 어느 특정 지역에 한정된 재난이 아닌 국가적 재난이 됐다. 부산의 경우에도 지난달 경남과 경북 지역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부산 금정산과 기장군 경계까지 접근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역대 최악의 산불을 경험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산불을 두고, 우리나라 토종·대표 수종인 소나무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며 소나무를 책망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우리나라 생육 환경에 맞게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고 있는 소나무까지 소환해 유무죄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결국 산불을 내는 것도 사람이고, 기후 위기를 가속화시킨 것도 사람이다.
산불로 소실된 산림의 가치는 단순히 나무의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다. 산림은 건강한 생태계 유지, 집중 호우 시 토사 유출 방지, 대기 정화 등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한다. 산불 피해 지역은 당장 올여름 집중 호우가 걱정이다. 산불은 앞으로 더욱더 우리 삶을 위협하겠지만, 우리 주변의 경각심은 너무 낮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학교마다 열렸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이제는 산림청이나 산지가 많은 소방서, 학교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1980년대~90년대에 흔했던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 대회는 산불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역대 산불 피해 순위(1~10위)에서 2000년 이전 산불이 한 건도 없었던 것만으로도 그 효과는 충분히 입증된다. 대형 산불이 일상화된 지금, 과거 산불 예방 포스터 그리기와 같이 산불 안전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범국민적인 캠페인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이대성 사회부 차장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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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전국 술집 최단경로 시간
올여름 유럽 여행을 계획 중인 A 씨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3개국의 8개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그는 최소한의 비용과 시간으로 이들 도시를 한 번씩 들른 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꿈꾸고 있다. 과연 어떤 경로가 가장 효율적일까? 외국 여행을 계획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이 문제는 수학에서는 흔히 ‘외판원 문제’로 불린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조합 최적화 분야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대표적 문제 중 하나다. 간단히 말해, 주어진 여러 도시를 모두 한 번씩 방문하고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가장 짧은 경로를 찾는 것이 핵심이다. 소위 점과 점을 잇는 ‘한 붓 그리기’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겉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방문 장소가 늘어날수록 가능한 경로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최적경로를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여행지 4곳만 있는 때는 3가지 경로가 가능하지만, 8곳이라면 2520개의 경로가 생성된다. 수천, 수만 개의 여행지를 고려해야 한다면 대형 컴퓨터를 동원해 풀어야 할 정도로 복잡해진다. 이런 이유로 사실상 정답을 찾기보다는 근삿값으로 가장 가까운 경로를 찾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이 문제는 18세기 ‘수학계의 모차르트’라 불린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1759년에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판원 문제는 컴퓨터 과학, 수학, 운영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본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실생활과 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적용되고 있다. 특히 택배 물품을 전달할 최적의 경로를 찾거나, 컴퓨터 기판에 구멍을 뚫을 때 드릴이 움직여야 할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결정하는 데도 활용된다. 실제 미국 아마존에서는 택배 배송 트럭의 경로 최적화에 외판원 문제를 적용해 동선을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수학자 윌리엄 쿡 교수는 최근 한국 경찰청의 술집 위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국 8만 1998개 술집을 모두 걸어서 방문하는 최단경로를 계산해 화제가 됐다. 3개월간 여러 대의 컴퓨터를 병렬로 돌려 얻은 결과, 최단경로에 드는 시간은 178일 1시간 56분 17초였다. 이제 외판원 문제는 택배 차량 운전자, 여행 일정을 짜는 이, 외근 나가는 직장인까지, 우리의 생활 속에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외판원 문제를 통해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이 진정 효율과 질서를 찾아가는 최적의 방식인지를 우리 모두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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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트럼프의 관세 폭탄과 한일의 대응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 행사에서 “오늘은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칭하며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관세 정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모든 국가의 대미 수입품에 일률적으로 기본 관세 10%를 부과하고 ‘최악의 침해국’(대미 무역 흑자국)을 지목해 중국에 34%를 시작으로, 영국 10%, 유럽연합(EU) 20%, 한국 25%, 일본 24%, 인도 26%, 태국 36%, 베트남 46% 등 차등 관세를 책정했다. 이와 함께 ‘우선 협상 대상국’으로 기본 관세 10%만을 부과한 영국·호주에 더해 한국·일본·인도를 지정하고 상호 관세 유예 기간인 90일 사이에 미국과의 협상을 끝낼 것을 종용했다. 이들 5개국 중 영국은 미국의 전통적 우방 국가이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두 나라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려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존재다. 인도와 호주 또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비공식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의 핵심 국가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안보와 통상을 연계해 유리한 합의를 빠르게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등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세계 각국이 대응에 분주한 가운데, 미국의 목적이 단순한 무역 재균형이 아니라 중국의 경제를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려는 것으로 인식하는 중국은 보복 관세는 물론 희토류의 수출 통제 조치를 하는 등 미국과 관세 전쟁에 나섰다. 결국, 지난 17일 백악관은 중국 관세율을 최대 245%까지 인상했다. 이에 양대 경제 대국인 미중 두 국가 간의 교역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우선 협상 대상국’ 중 가장 먼저 미국과 협상에 나선 나라는 일본이다. 이미 일본은 트럼프 2.0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발 빠르게 미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호의를 얻고자 했으나, 결국 24%의 관세를 부과받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관세와 방위비를 별도로 다루면서 장기간에 걸쳐 협상을 추진하는 이른바 분리·장기 협상전략을 준비했다. 그러나 지난 1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1차 협상에 예고도 없이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와 방위비를 연계해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상반되는 전략으로 협상이 탐색전으로 끝난 후 일본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우리 방위비는 일본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것”이라면서, 일본의 국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인 19일 백악관은 일본 측 관세 협상 대표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에게 트럼프의 상징인 빨간색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씌운 사진을 공개했다. ‘게임의 규칙’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본과 국제사회에 재차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모습은 리더십 결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과 다르게 한국과 미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관세가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을 ‘최대한 침해국’으로 상정해 25%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고, ‘우선 협상 대상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이번 주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2+2 통상협의’가 시작된다. 미국이 일본에 이어 추진하는 관세 협의이다. 한국 측에서는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참여한다. 한국의 경제·통상 구조는 물론 안보 틀까지도 흔들 수 있는 미국과의 협의가 국가적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지적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머니 머신 한국, 돈 한 푼 안 내”라는 인식에 근거해 방위비와 관세를 혼합시킨 ‘원스톱 쇼핑 협상’을 추진하며, 일본과의 협상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빠르게 가시적 성과를 손에 넣고자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본과의 협상 때처럼 깜짝 등장할 수도 있다. 또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이어진 국내 정치의 불안정성을 미국이 이용하거나, 더 나아가 주한미군의 철수와 북한과의 교섭을 협상 카드로 꺼낼 수도 있다. 따라서 관세가 상징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로부터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일본처럼 안보와 관세를 분리하고 협상을 장기화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6월 3일 출범하는 새 정부는 보다 전략적으로 협상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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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 밥 딜런
한 편의 시(詩)가 노래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기타 소리에 맞춰 높이 멀리 날아올라 나에게로 온다. 노래가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우리는 밥 딜런을 통해 보았다. 세상과 불화하는 듯한 표정.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한 무심한 말들은 한 시대와 만나 예술이 된다. 1961년, 스무 살이 된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에 입성한다. 희귀 유전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위해 밥 딜런이 수줍게 노래한다.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전기 영화다. 슈퍼스타인 그의 이야기와 노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딜런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노래가 아득해지고, 어느새 그는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달아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음악적 행보와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의 감정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다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물이 내가 아는 그가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이면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컴플리트 언노운’처럼 밥 딜런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임을 확인한다.
뉴욕에 도착한 밥 딜런은 노래하기 위해 클럽을 전전한다. 드디어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하자 객석이 고요해진다. 기존의 음악들과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적인 음악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평단과 대중이 열광한다. 이때 밥 딜런의 노래 실력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당시는 대중문화의 격변기였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선두에는 청년들과 대중문화가 있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욕망했고, 미술,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저항적 기조를 담아낸다. 정치적으로는 핵전쟁 공포와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반전 운동, 인권 문제, 페미니즘 논의로 관심이 확장된다. 밥 딜런은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사회참여적 음악을 발매하는 등 그 누구보다 시대와 깊이 조우한다. 그러면서도 “괴로운 시대,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열창한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20대 초반 시절을 조명한다. 그러니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밥 딜런이 음악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음악적 변화를 꾀하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까지를 다룬다. 지금까지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대비하며, 그의 업적을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젊은 날의 밥 딜런의 모습, 음악을 향한 고민과 변화,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에 중심에 두며 갈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때 밥 딜런을 노래하게 한 인물이 우디 거스리였다면, 음악적 성장에는 포크송 가수로 유명한 피트 시거와 조안 바에즈가 있다. 밥 딜런의 뮤즈인 첫사랑 실비는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다. 밥 딜런이 만나고 관계 맺은 사람들 덕분에 그의 음악 또한 빛날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유시인, 음악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밥 딜런의 이야기는 영화의 오프닝과 같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우디 거스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인생 2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밥 딜런을 연기한 배우에 있다. 티모시 샬라메는 밥 딜런이 되기 위해 무려 5년 동안 준비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밥 딜런 그 자체이며, 읊조리고 숨을 삼키는 듯한 창법, 기타 연주와 노래는 모두 그가 직접 소화하고 있음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마치 밥 딜런의 젊은 날과 마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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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허구한 봄꽃 중에 그 꽃만이 의미 있는 이유
가장 비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림 중 하나인 ‘아이리스’(1889)는 붓꽃을 그린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게티미술관 소장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고통 가득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예술을 향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작품에 매긴 숫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알아야 행복이라는 꿀맛을 안다. 고흐는 성공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안다.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림 공부를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16살(1869)에는 화상인 큰아버지 추천으로 ‘구필화랑’에 취직했다. 여기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여러 물의를 일으켜 해고되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1879년엔 보조 목사를 하던 중 조울증이 도져 아버지는 정신병원까지 물색하며 고흐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이후 목사 보조, 노동자의 삶과 광부 생활을 거쳐, 1880년 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1881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또 중간에 그만둔다. 아카데미의 가르침보다 자신만의 창조성을 찾으려 했다. 고흐가 사망한 해가 1890년이니까, 불과 10년 만에 위대한 창조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칙칙했다. 1885년 동생 테오가 주선해 전시했지만 실패했다. 고흐는 영업을 더 잘해 보라고 했지만, 테오는 인상파처럼 밝지 않고 너무 어둡다고 되받아쳤다. 부실한 식사와 과도한 폭음·흡연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1886년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색채를 연구한다. 특히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항구에서 일본화 우키요에를 만나면서 이국적인 구도와 색채에 심취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1886년에는 파리로 이사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생을 마감하는 계기가 되는 고갱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러나 2년 만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888년 요양을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난다. 여기서 고갱과 두 달을 함께 작업하다 싸우고 헤어진다. 여러 설이 있지만, 이를 자책해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선물하는 등 기행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고흐는 아를에서 30㎞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고는 1주일 만에 마음을 다잡고 정원에 핀 붓꽃을 그린다. 게티미술관 소장품도 이때 그린 것이다. 테오도 이 작품을 알아보고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지금도 위대한 작품인 것은 예술을 향한 도전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삶과 예술을 알아본 우리가 진정한 삶의 표상일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 오늘만이라도 위안받고 싶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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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송소희 [키워드로 트렌드 읽기]
올해 1월 초 페이스북에서 한 이용자가 “이 곡은 꼭 한번 들어보라”며 노래 한 곡을 추천했다. 송소희가 지난해 12월 자신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Not a Dream(낫 어 드림)’이라는 미발표 자작곡을 부르는 실황 영상이었다. 당시 유튜브에 올라온 지 사흘만에 이미 10만 조회수를 훌쩍 넘겨 ‘인기 급상승 영상’ 순위권에 올라 있었다. 영상 속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구성진 장단에 맞춰 타령을 부르던 ‘국악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한결 편안한 의상을 입은 채 몽환적인 밴드 연주에 어울려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댓글에는 “소리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듣고 보는 나도 기분이 좋다”는 등의 찬사와 함께 정식으로 음원을 발매해 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입소문을 탄 영상은 공개 10일 만에 100만 조회수를 기록한 걸 넘어 2월 말에는 1000만 조회수도 넘어섰다. 지난해 로제의 ‘APT.(아파트)’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해 화제가 됐던 개그맨 곽범이 이번엔 ‘Nak a Dream(낚 아 드림)’이라는 제목의 콘텐츠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라인에서 먼저 불러일으킨 폭발적인 반응 속에 ‘Not a Dream’은 마침내 지난 3월 음원 사이트에서 정식으로 대중에 선보였다. 송소희가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담은 '공연 직캠' 영상들도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불과 100여 일 사이 라이브 클립은 어느덧 1500만 조회수 달성을 앞두고 있다.
송소희는 신곡 ‘Not a Dream’에 대해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이 많기를 바라며 열심히 달려온 나를 위한 위로와 행복할 용기를 담은 곡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그의 음악 행보를 되짚어보면 납득이 갈만한 설명이다. 만 7세에 출연한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얻은 ‘국악 신동’이라는 호칭에 머물지 않고 꾸준히 변화와 융합을 모색했다. 대학교에서 경기민요를 전공하면서도 경연 예능에 출연해 가요 명곡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넘나들었다. 민요 기반의 크로스오버 음반을 내거나 다른 장르를 내세운 밴드와의 협업도 선보였다. 록과 디스코를 접목한 자작곡을 시도한 뒤 지난해에는 ‘싱어송라이터’로서 4곡을 채운 미니앨범도 냈다.
송소희는 소리꾼으로서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은 계기에 대해 “민요라는 클래식은 정답을 향해 가야만 하는 장르여서 정해진 틀이 있는데, 그 틀 안에서는 저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서양 음악을 공부하면서 미디(작곡 프로그램)로 곡도 써보니까 (감정이) 해소되더라”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원래 하던 경기민요에 대해 ‘정말 멋진 음악이구나’라는 자부심도 생겼다”면서 국악하는 ‘본캐(본 캐릭터)’와 싱어송라이터라는 ‘부캐(부 캐릭터)’를 병행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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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승리의 기운이 지역에 활력소가 되길
부산 시민의 야구에 대한 애정이 워낙 크다 보니 흔히 부산을 야구도시, ‘야도’라 부른다. 그래서 롯데 자이언츠 야구는 부산에서 낭만과 추억의 대명사다. 1980년대 식당과 대합실, 택시 안에서도 팬들은 야구에 울고 웃었다. 그 시절 롯데 야구는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이었고 우승도 선사했으며 그래서 그런지 지역 경기도 호시절이었다.
희로애락이 담긴 롯데 야구가 오랜 기간 침체되고 있다. 우승은커녕 가을야구를 한 지도 까마득하다. 그러다 보니 롯데 야구를 응원하는 부산은행의 ‘가을야구정기예적금’마저 고객들의 비난을 받아 급기야 올해부터 ‘롯데자이언츠 승리기원예적금’으로 상품명까지 바꿨다. 지역금융의 수장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런데다 그룹의 BNK썸 여자 프로농구단도 지난 시즌 최하위를 기록해 팬들과 시민들께 송구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꽤 상했다. 야구를 비롯한 타 종목 성적도 좋지 않은 상황이라 남다른 각오로 이번 시즌을 임했다. 우승은 아니더라도 ‘지역의 자존심을 세우자’는 마음으로 감독과 선수단도 자주 격려하고 구단 차원의 지원도 늘렸다.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BNK썸이 기어이 일을 냈다. 강력한 경기력으로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더니 주축 선수들의 부상에도 정규시즌 준우승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파죽의 3연승으로 우리은행을 꺾고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작년 꼴찌라는 아픔을 딛고 매 경기 시원하고 파이팅 넘치는 경기력은 물론 악착 같은 플레이로 일궈낸 우승이라 더 드라마틱했다.
언니 리더십, 여성 사령탑 첫 우승, 지역 연고팀 첫 홈 우승 등 여러 뒷이야기도 남겼다. 구단의 지원, 감독의 용병술과 리더십도 우승의 밑바탕이었다. 상대팀 감독은 “얘를 막으면 쟤가 터지고, 쟤를 막으면 얘가 터지더라”며 BNK 선수들의 탄탄한 개인기와 강한 팀워크를 패인으로 분석했다. 결국 감독과 선수들의 유기적인 소통과 단합,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의 농구 팬과 시민 여러분의 하나된 응원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지역에도 승리의 기운이 절실하다. 경기침체로 인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절망, 전국 최고 저출생 지역을 등지려는 청년과 기업,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는 물론 최근 트럼프 2기의 관세 정책 여파까지 덮쳤다. 긍정적 지표라고는 찾기 힘들다. 지역의 어려움에 적극 공감하고 강한 연대와 팀워크가 필요한 시기다.
BNK썸 우승이 팬들과 지역에 작은 기쁨이 되었다면, BNK는 지역에 ‘승리의 기운’을 전하고자 한다. BNK는 지난달 창립 14주년 기념행사를 대신해 전통시장을 찾아 상품 구매와 착한 선결제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어려움을 경청했다. 부산은행은 부산시가 추진하는 ‘부산 신발 한켤레 사기’ 캠페인에 노사가 한마음으로 동참해 지역 신발산업 부흥도 응원했다. 부산은행과 경남은행 긴급구호대는 지난달 경남 산불 피해 지역을 찾아 복구작업을 도왔다. BNK가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금융 본연의 역할은 물론, 지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역과의 팀워크와 원팀정신이 절실한 시기라는 생각에서다.
나비의 날개 짓이 날씨를 바꾸듯, 작은 기운이 때론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배려와 격려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BNK썸이 쏘아 올린 작은 ‘승리의 기운’이 위안과 활력소가 돼 지역에 긍정적 ‘나비효과’를 불러오길 기대해 본다.
사직체육관에 우승 축포가 터지고 전설적인 락밴드 ‘퀸’의 ‘We are the Champions’가 흘러나왔다. 최근 상승세를 탄 롯데자이언츠를 포함 지역의 다른 스포츠 구단에게도 챔피언의 기운이 전해지길 응원한다. 기업은 물론 지역사회 곳곳으로 승리의 기운이 퍼져 낭만과 추억이 서린 그 시절 야도 부산의 명성을 되찾길 희망한다. 필자와 BNK 역시 지역을 가슴 설레게 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늘 고민할 생각이다. BNK의 비전인 ‘세상을 가슴뛰게 하는 금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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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사상~하단선 대형 싱크홀 부실시공 탓이라니
부산도시철도 사상∼하단선 구간 공사 현장은 상습 싱크홀 발생 지역이다. 연약 지반에서 지하 굴착 작업을 하기 때문에 침하 사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때마다 점검을 하고 대책을 발표했는데도 불구하고 2023년부터 최근까지 모두 14차례 땅꺼짐이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발생한 땅구멍은 트럭 2대를 집어삼킬 정도로 초대형이어서 충격을 줬다. 사고 직후 부산시는 부산교통공사와 시 철도시설과를 대상으로 감사를 진행했다. 감사 결과, 시공과 감독은 부실했고 일부 위법도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시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싱크홀이 결국은 인재였다는 것인데, 부산시민 입장에선 참담할 따름이다.
부산시 감사위원회가 22일 발표한 특정 감사 결과를 들여다 보면 사상∼하단선 구간에서의 땅꺼짐은 부실시공이 초래한 예견된 결과였다. 감사위원회는 발주처인 부산교통공사가 건설사업관리단에 부진 공정 대책을 수립해 제출하라고 지시만 하고 대책이 수립·이행되는지 제대로 지도·점검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건설사업관리단은 차수 품질시험 자격이 없는 하도급업체가 시험·작성한 품질시험 보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시공사에 굴착 공사를 진행하도록 해 결국 지하수와 토사 유출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런 부실한 공정관리가 기습적인 큰비를 만나면서 결국 초대형 싱크홀 사고로 이어졌다는 게 감사 결과다.
부산교통공사는 싱크홀의 원인이 집중호우 탓이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감사위원회 판단은 부실시공이다. 배수로 접합부 마감을 기준에 맞지 않게 시공하거나 흙막이 가시설에 안전 설비가 설치되지 않고 제대로 고정되지 않는 위법 사실이 드러났다. 감사위원회는 이러한 부적정 시공이 시공사와 건설사업관리단의 관리 소홀 탓이라고 봤다. 앞선 지난해 8월 두 건의 싱크홀 사고 뒤 이뤄진 부산시와 지하사고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차수 기능 저하와 빗물을 가두는 우수박스 부실이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원인이 규명된 뒤에도 제대로 된 시공 관리가 되지 않았던 점이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은 격이다.
올 들어서 멀쩡한 도로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 동서고가도로 교각과도 지척이어서 아찔할 지경이다. 운전자건 보행자건 불안감 때문에 이 곳을 오가기가 두렵다. 당장 사고 현장 인근의 부산새벽시상 상인들은 “마음놓고 장사할 수가 없다”며 상권 침체까지 호소하고 있다. 시민들의 불안감이 오죽 심각했으면 공사 중단 여론까지 일고 있겠나. 싱크홀 사고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련의 사고를 우연으로 고집한 결과다. 부산시는 15일 비상대책을 발표하고 상설 전담조직(TF)을 꾸려 지반과 하수도 전수 조사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시민 안전, 도시 안전이 최상의 가치다. 땅꺼짐 사고를 근절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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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트럼프 관세전쟁 직격탄 현장 중소기업 아우성
한미 재무·통상 장관이 참여하는 ‘2+2’ 고위급 통상협의가 24일부터 미국 현지에서 시작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발 관세전쟁에 따른 양국 의견 조율이 본격화하는 것이다. 이번 관세전쟁이 언제, 어떤 결론을 맺을지는 현재 누구도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부산 기업들은 이미 큰 피해를 입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호소 중이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지난 21일 ‘부산 지역 대미 수출기업 관세 대응 TF 회의’를 개최한 결과 부산 기업의 상당수가 미국 현지로부터 불공정 거래 압박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 기업들은 현재 한미 통상협의 중인 데다 90일 유예 기간도 부여됐지만 현장에서는 벌써부터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부산 기업들은 이번 관세전쟁에 자체적으로 적극 대응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부산상의 TF 회의에서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기계·부품, 자동차, 제약, 식료품, 전기전자, 조선·기자재, 철강, 해운·물류, 화학 업계 관계자들은 이미 미국 바이어로부터 단가 인하 요청 등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이는 관세전쟁으로 미국 물가가 오르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진 것과 관련, 관세 인상 부담을 가급적 현지 소비자들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국 관세 부과에 따른 비용을 수출국 기업들에 부담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부산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와 지역 경제 침체로 이어질 우려가 높은 만큼 좌시해서는 안 된다.
부산 기업들은 정부 차원에서 관세 협상 정보를 기업들과 적극 공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덩치가 큰 대기업은 자체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지만 지역 중소기업들은 그런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부산상의 설문조사에서 부산 기업들이 정부나 지자체에 바라는 가장 시급한 지원책으로 ‘대미 관세, 무역 규제 등에 관한 정부 대응력 강화’를 꼽은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글로벌 마케팅을 추진하는 부산 기업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이 미국과 진행 중인 관세 협상 정보도 필요하다. 타국 경쟁 기업들이 더 낮은 관세 조건에서 대미 수출에 나설 경우 이에 대한 전략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업 현장의 이런 애로사항을 즉각 해소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정부는 미국과의 통상협의를 큰 틀에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지역 중소기업의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여 협상안과 정책에 즉시 반영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미국 현지 수입업체 등이 무리한 단가 인하 등 불공정 요구를 못 하도록 강력하게 주문해야 한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정보력 부족으로 현지에서 억울한 피해를 입는 일은 없는지도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최근 관세청 수출입현황에 따르면 이달 1~20일 대미 수출액은 61억 8200만 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4.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전쟁의 후폭풍이 본격화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한 현장 중소기업들을 위한 발빠른 정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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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카지노'를 꿈꾸는 부산시민은 없다 [이상윤의 세상톡톡]
10년 전 세계 최대 카지노 그룹 ‘라스베이거스 샌즈’(이하 샌즈)는 부산시장실을 찾아와 공공연하게 이런 소리를 했다.
“지구상에서 부산에 5조 원 이상 투자를 곧장 할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샌즈 측의 이 말은 자신감을 과장하는 일종의 블러핑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곧이어 제시한 복합리조트 카드는 부산시로서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들이 마이스와 비즈니스,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엮어 제시한 북항재개발 부지의 밑그림은 당장 부산을 국제적 컨벤션 도시로 띄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샌즈 측이 개발한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가 전 세계 관광객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구심력까지 떠올린 부산시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장밋빛 기대도 잠시. 곧장 복합리조트의 핵심 시설로 꼽힌 오픈카지노가 논란에 휩싸였다. 강원랜드 카지노의 사회적 부작용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샌즈 측이 오픈카지노 대신 자격을 제한하는 형태의 세미오픈카지노를 제시했음에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샌즈가 입맛을 다시고 물러간 지 10년. 그 사이 엠지엠 등 다른 카지노 그룹들이 샌즈의 뒤를 이어 다녀갔을 뿐 북항재개발 부지는 아직도 대부분 잡초 무성한 공터로 남아 있다.
북항재개발의 뿌리는 노무현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 북항의 기능을 부산 신항으로 대거 옮기고 난 빈 자리를 개발해 부산시민에게 돌려준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을 이었던 문재인 정권은 그럼 이 부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문 정권 시절 국무위원을 역임한 부산의 한 인사는 퇴임 때쯤 사석에서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대해 “카지노 기반 복합리조트는 꿈도 꾸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카지노는 입밖에 낼 수조차 없으니 다른 친수공간 활용 방안이나 서둘러 모색하라는 권고도 곁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가 이런 말을 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부산과 비슷한 시기 복합리조트 사업 추진을 전국 곳곳에 타진하고 나선 일본이 변수로 부각했다.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부러워하던 일본 아베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4000만 시대를 열겠다며 복합리조트를 국가사업으로 내걸자 오사카를 비롯해 전국 7곳에서 너도나도 유치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후 일본은 복합리조트 사업 관련 비리가 터지는 바람에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되는 등 큰 진통을 겪었으나 결국 오사카 복합리조트 개발 사업은 돛을 달았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3월 인천 영종도에 인스파이어 복합리조트가 공식 개장했다. 부산 북항에서 벌어진 만큼의 복합리조트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부 차원의 외면이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인스파이어가 개장 1년도 안 돼 천문학적 적자로 인해 사모펀드로 넘어가고 후속 투자 여부가 불확실해졌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부산의 입장에선 그나마 첫 발이라도 내디딘 인천의 사례가 부러운 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게 사그라드는 듯했던 복합리조트에 대한 논의에 부산 상공계가 또다시 기름을 붓고 나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조금씩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최근 토론회까지 열면서 여론 환기에 앞장서는 모양새다.
혹자는 왜 사행성 사업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리조트에 대해 부산지역이 끈질기게 미련을 갖고 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비아냥을 받는 부산이 ‘노인과 카지노’가 될 판이라는 우려도 쏟아진다.
하지만 엑스포 유치에라도 기대어 텅빈 부산 북항재개발 부지를 어떻게든 채우고 부산의 발전 동력으로 삼아보려 했던 부산시민들의 열망이 처참하게 좌절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대통령이 부산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을 약속하며 화려한 청사진을 뿌리고 갔지만 원내 1당의 무관심 혹은 배제로 인해 여지껏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다. 조기대선을 맞아 다시 장밋빛 공약이 난무하기 시작한 게 그나마 위안일 정도다.
다행히 지난해 말 부산시는 북항재개발 랜드마크 부지에 지적재산권 기반 복합 콤플렉스 개발을 위한 대규모 외자 유치 방안을 발표하기는 했다. 시민들은 부산항만공사와의 의견 차이로 아직 불확실성의 범주에 속한 이 계획에마저도 조그만 희망을 건다. 시민들은 이 계획이 숱하게 청사진만 뿌렸다가 흐지부지 발을 뺀 부산지역 기존 사업들의 재판이 되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노인과 카지노’를 애써 꿈꾸는 부산시민은 없다. 마리나베이샌즈를 딛고 선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보며 북항에 벤치마킹이라도 하고 싶은 부산시민만 있을 뿐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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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교황의 와인
지난 21일(현지 시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간 재임 내내 검소하고 청빈한 면모를 보였다. 교황은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데, 와인만큼은 즐겼다. 교황은 2013년 선출 뒤 추기경들과 첫 만남에서 고령인 자신을 오래된 와인에 비유하는 등 와인 사랑이 각별했다. 교황이 사랑한 와인은 모국 아르헨티나의 ‘알타 비스타 클래식 토론테스’였다. 산뜻하고 복숭아와 살구 향이 나는 화이트 와인이다. ‘교황의 와인’이라고 해서 엄청 비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가격은 1만~2만 원대. 화려하지는 않지만 신선하고 향긋한 토론테스의 풍미는 검소함 속에 더욱 빛나는 교황의 모습과 닮았다.
원래 교황들이 즐겨 마시던 와인은 프랑스 남부 론 지방에서 생산되는 ‘샤토네프 뒤 파프’(교황의 새로운 성)였다. ‘샤토네프 뒤 파프’는 14세기 아비뇽에 유폐됐던 교황의 여름 별장이 있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됐다. 이 와인 가격은 20만~30만 원대에 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의 와인’마저 소박하게 바꾼 셈이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답게 교황은 소박한 행보를 보였다. 즉위 이래 역대 교황이 기거한 호화로운 사도궁 관저를 두고, 교황청 사제들의 기숙사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 거주했다. 교황 전용 방탄차를 타지 않고, 이탈리아 국민차인 ‘피아트’를 애용했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명품 시계로 구설에 올랐던 것과 달리, 50달러짜리 손목시계를 찼다.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차를 타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기아차 ‘쏘울’이 한국 내 전용 차량으로 선택됐다. 그는 방한 내내 교황의 상징인 금제 십자가 목걸이 대신 20년간 착용한 철제 십자가 목걸이를 했다. 낡은 검은색 구두를 신었고, 이동 중에는 오래된 가죽 가방을 직접 들며 신선한 충격을 줬다.
교황의 장례식 역시 소박하게 치러진다. 교황청은 21일 교황의 유언장을 공개하고 “교황이 별다른 장식 없이 바티칸 밖 성당 지하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밝혔다. 교황은 묘비에도 특별한 장식 없이, ‘프란치스쿠스’(Franciscus·프란치스코의 라틴어명)만 새겨 달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바티칸 밖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지하에 안장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을 안치하는 관도 삼중 관에서 아연으로 내부를 덧댄 목관 1개로 줄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빈자의 성자’다웠다. 교황의 평안한 영면을 기원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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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살아남기
경북, 경남, 울산 지역의 산림을 잿더미로 만든 이번 산불은 규모와 피해 면에서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강한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산 전체로 퍼졌다. 수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됐지만, 결국 불길을 잡은 건 잦아든 바람과 내린 비 덕분이었다. 불의 시작은 사람의 실수였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달라진 기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년보다 훨씬 더 건조했던 날씨는 불을 키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요즘 날씨는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단순히 계절이 어긋나는 정도가 아니라, 날씨 자체가 더 극단적이고 강렬해졌다. 이런 날씨의 변화는 지구온난화와 관계가 있을까? 단일 사건을 기후 변화와 직접 연결 짓는 것은 쉽지 않지만, 기본적인 물리 현상만으로도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구 대기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공기는 온도나 압력 차이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가 아는 고체의 움직임과는 아주 다르다. 고체는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지만, 공기처럼 이어진 연속체는 한쪽에서 변화가 생기면 그 영향이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도 퍼져나간다. 대기의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현상이 바로 ‘대류’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가 라면을 끓일 때의 냄비 속 물이다. 냄비 바닥에서 뜨거워진 물은 가벼워져서 위로 올라가고, 상대적으로 차가운 물은 아래로 내려온다. 이처럼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서로 자리를 바꾸며 일어나는 순환 운동을 ‘대류’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며 ‘레일리-버나드 대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대류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수많은 셀로 구성되어 반복되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특히 육각형 모양의 패턴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집이나 제주도의 주상절리처럼,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는 육각형 구조들도 이와 비슷한 물리적 원리와 관련이 있다.
대류의 중요한 특징은, 어느 한 지역에서 운동이 강해지면 다른 지역도 함께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기나 물처럼 연속된 물질에서는 한 쪽만 유별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냄비의 한쪽만 더 뜨겁게 해도, 그 영향은 전체로 퍼져나간다.
대기 속 대류는 여기에 지구 자전, 수증기, 열 교환까지 더해지며 훨씬 복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어느 지역에서 공기가 강하게 상승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에 반대되는 하강 운동이 강하게 형성된다.
지구온난화는 지표면의 온도를 높인다. 따뜻해진 땅 위의 공기는 가벼워져 더 빨리 위로 올라가고, 이는 대류를 전반적으로 강화한다. 또한, 따뜻한 공기는 더 많은 수증기를 품을 수 있는데, 이 수증기가 상승하면서 차가운 상층에서 물방울로 변할 때 주변에 열을 방출한다. 이 열은 다시 상승을 더욱 가속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강한 폭우가 일어나고 지역적으로는 홍수가 일어날 수 있다.
어딘가에서 상승 운동이 강화되면, 그 주변에는 반드시 하강 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하강 운동이 일어나는 지역은 구름이 거의 없고, 날씨는 더욱 건조해지게 된다. 산불은 이렇게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퍼진다. 시작은 인간의 실수였지만, 이후의 확산은 기후 변화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온난화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 위해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인 물리 원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지금처럼 한반도의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조만간 비가 오는 날조차도 극단적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예전처럼 보슬보슬 내리는 장맛비 대신,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폭우가 홍수를 일으키고, 또 다른 형태의 재난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상기후’라는 이름 아래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을 바꾸고 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기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한 과학 지식을 넘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 속도에 비해 우리가 대처하는 속도는 여전히 느려 보인다. 탄소 배출을 줄이고, 기후 정책을 세우고, 산불 같은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은 거창한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에서, 정책의 작은 조각들에서, 교육과 기술을 통해 우리는 이 거대한 흐름을 조금씩 바꿔 갈 수 있다. 지금의 이 변화는 단지 날씨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전체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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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대저를 지나며
아침이면 구포다리 위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곤 했다. 늘어선 차들은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다리 옆 통행로를 따라 걸었다. 바쁜 일은 없었지만 나도 가끔 다리를 따라 걸었다. 산꼭대기의 햇빛 받아 반짝이는 강에서 물고기들이 튀곤했다. 햇빛 등지고 대저로 들어서면 봄꽃 향기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길가 양철 지붕 작은 집 옆엔 버드나무 그림자 드리워진 물길이 있었고 시멘트 다리 옆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이따금 마을버스가 서는 정류장 가로수에서 참새들이 쉬어가곤 했다. 버드나무 그림자로 덮여 햇빛 잘 들지 않는 물길은 늘 깊고 어두웠지만 나는 고인 물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연두색 개구리밥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도 버스를 타고 가다 물 위에 고요히 떠 있는 개구리밥들을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그녀가 시멘트 다리와 오래된 간판을 단 가게와 늙은 나무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동안 햇빛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따뜻하게 비추어주었을 것이다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 (2020) 중에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지요. 북구와 강서구를 잇는 구포다리는 종종 정체 구간이 되곤합니다. 정체 구간은 삶에도 있겠지요. 이 시에서 조용한 상태라는 순우리말, 고요에 머물러봅니다.
담담한 서술을 불러내는 고요는 현실이어도 좋고 환상이어도 좋습니다. 늘 지나치던 풍경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라고 차들이 가다 말고 섰을까요. 낙동강 가에 펼쳐진 풍경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이름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봄볕. 바다로 가는 풍경이 강물처럼 이야기가 되어 흐릅니다. 우린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는 버스를 탄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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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농촌 살리면 농산품 물가 안정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요즘 실감난다.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올랐지만, 농산물은 특히 비싸져서 농작물 생산량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국가 차원에서 농촌을 살리는 정책을 펼치면 도시인의 생활도 자연스레 안정될 수 있다.
귀농귀촌만 해도 그렇다. 전국 군단위 혹은 시단위 농촌에서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귀농귀촌을 장려하는 지역임을 밝히고 있지만 농촌 살리는 법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귀농귀촌은 철저한 계획 하에 이뤄져야 하고, 농사 짓는 법과 특수작물 재배법 등을 가르치고, 열매 쏙기, 농약 치는 법, 밭이랑 만들기 등 구체적인 영농교육까지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특용작물재배 기술 등을 제 영농에 적용하게 해야 한다. 상주 마늘, 풍기 인삼, 밀양 딸기, 영양 고추 등 기존 특용작물을 잘 살리면서, 망고, 파프리카, 블루베리, 파인애플 같은 신품종도 재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해야 한다. 농어촌공사가 여기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필요도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덴마크는 농촌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다른 산업 못지 않게 농촌을 부유하게 만드는 농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이런 점을 배워서 우리도 농촌지역 지자체가 정책을 다수 만들고 중앙 정치인도 이를 공약하고 실천해야 한다.
귀농귀촌 하는 분들도 그 지역에서 성실히 영농기술 교육을 받아 책임지고 자신의 농업을 성공시키길 바란다. 더불어 특수작물 재배기술을 널리 전수할 필요가 있다. 귀농귀촌 하는 분들이 정착하는 지역에서 소외되지 않게 공동체를 강화하고, 농촌지역 부동산도 쉽게 사고팔 수 있게 개선해야 한다. 설진설·부산 해운대구 청사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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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소멸 위기 부산, 인구 문제 해결해 지속 가능 도시 만들자
부산 인구가 10년 뒤 300만 명 선이 붕괴된다고 한다. 통계청의 시도별 장래인구추계결과(2022~2052년)에 따르면 부산 인구는 2035년에 299만 명으로 300만 명 선이 무너지고, 2052년에는 245만 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초고령화, 학령인구 감소, 청년 유출이라는 삼중 파고에 직면한 부산에는 가혹한 미래다. 이런 가운데 부산시, 부산시교육청, 부산일보사가 21일 공동 개최한 ‘2025 부산인구미래포럼’은 시의적절하다. 이 포럼은 저출생이 촉발한 인구 구조 변화 속에서 지역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국내 인구·교육·도시 분야 전문가들과 기업인이 모여 부산을 지속 가능한 도시로 만드는 다양한 해법을 내놓았다.
부산은 저출산·초고령화로 원도심을 중심으로 공동화와 빈집이 확산하는 중이다. 부산의 빈집은 11만 4000호에 달한다. 중구, 동구, 영도구 등 원도심에서 노후공동주택의 빈집 발생이 두드러졌으며 고령자 1인 가구비율도 높다. 전문가들은 단독주택 위주의 빈집 대응책으로 인해 노후공동주택 빈집에 적용 가능한 정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공공재정 투입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빈집과 민간에서 적극 활용 가능한 빈집 등 정책 대상 선별 기준을 마련하고, 차별적·전략적 대응을 강조한 부분은 새겨들을 만하다. 빈집의 도시재생사업 활용, 활용 가능한 빈집의 임대주택 제공 등도 유효한 지적이었다.
부산의 학령인구 감소도 심각하다. 올해 29만 4000만 명으로 2010년 46만 7000명에서 37%나 줄었다. 2033년에는 10만 명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지금이 교육 체제 전환의 골든타임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초중고를 연계한 통합운영학교 확대 제안이 인상적이다. 행정과 시설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핀란드와 영국처럼 교직원 인사와 교육과정까지 단일화된 완전 통합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폐합보다 지원 중심의 소규모학교 정책, 지역 전략산업과 연계한 고졸 취업 생태계 조성 제안도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성장하고 정착하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수도권 일극체제에서 부산은 아이들이 사라지고 빈집은 늘고 기업은 일할 사람을 찾지 못하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빈집과 지역소멸 문제를 넘어설 열쇠는 결국 ‘행복한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는 중앙대 마강래 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도시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단계적으로 채워주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일자리, 주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관계, 존중받는 경험 등이 충족될 때, 시민은 도시를 ‘내가 머물 이유가 있는 곳’으로 인식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이 지역 소멸을 넘어 지속 가능 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이 어느 정도 잡혔다고 본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역 사회가 면밀한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