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이지후 작가 mi3131mi@naver.com
1
침묵의 소리가 그곳을 잠식했다. 십만 마력의 메인 엔진이 토해내는 저주파 진동. 그것은 선체의 강철 뼈대를 타고 올라와, 침대에 누운 선원의 척추를 24시간 내내 갉아먹는 거대한 압력이었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웅웅거리는 울림은 고막이 아니라 두개골 안쪽을 직접 두드렸다.
새벽 2시. 인도양의 수면은 검은색이었다. 길이 400미터, 폭 61미터. 2만 4천 개의 강철 상자를 싣고 적도를 가로지르는 자이언트 블루호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자, 쉼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부산항을 출발한 지 닷새째. 배는 권태로운 항로를 따라 기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등 항해사 강민우는 선교의 방탄유리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유리는 차가웠지만, 그 너머의 어둠은 끈적했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낯설었다. 눈 밑은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움푹 패어 있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34번 베이, 가봐.”
당직 사관인 2등 항해사가 지시했다. 그는 의자에 파묻힌 채 시선은 스포츠 중계에 고정한 상태였다.
“센서가 자꾸 튀네. 오차 범위 내긴 한데, 알람 뜨는 거 거슬려서 못 해 먹겠네. 가서 육안으로 팬 돌아가는지 보고 와.”
“알겠습니다.”
“대충 보고 오지 마라. 저번처럼 먼지 낀 거 가지고 불난 줄 알고 설레발치지 말고. 너 때문에 자다가 빤스 바람으로 뛰쳐나온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2등 항해사가 혀를 찼다. 민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항해 때 냉각기 과열 경보를 화재로 오인해 비상벨을 눌렀던 실수. 그날 쏟아졌던 욕설과 시말서의 모멸감이 아직도 명치 끝에 얹혀 있었다. 이번 항해는 죽은 듯이, 없는 사람처럼 마쳐야 했다. 서울에 있는 어머니의 항암 치료비, 그리고 아직 원금도 건드리지 못한 학자금 대출. 이 배에서 내리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바다보다 더 차가운 도시의 독촉장들이었다. 민우는 손전등을 챙겨 무거운 수밀문을 밀었다. 훅, 하고 뜨거운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적도의 밤바다는 거대한 한증막이었다. 벙커C유 타는 매캐한 냄새와 바다의 비릿한 소금기, 그리고 달궈진 철판이 내뿜는 열기가 뒤섞인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민우는 난간을 잡고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10단 높이로 까마득하게 쌓여 있는 컨테이너 타워들이 달빛 아래서 거대한 묘비처럼 보였다. 저 수만 개의 강철 상자 안에는 누군가의 욕망과 자본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양옆으로 솟아오른 강철 벽들이 시야를 차단했다. 안전화가 철판 바닥을 때릴 때마다 텅, 텅, 하는 공허한 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 거대한 미로 속에는 오직 기계 소음뿐이었다. 수천 개의 냉동 컨테이너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벌떼가 우는 소리 같았다. 34번 베이에 도착했을 때, 민우는 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붉은색 컨테이너 벽면을 비췄다.
영하 20도. 디지털 온도계의 초록색 숫자는 정상이었다. 냉각팬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2등 항해사의 말대로 단순한 센서 오류인 듯했다.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였다.
쿵.
규칙적인 기계 소음 사이로, 아주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었다. 민우는 걸음을 멈췄다. 배가 파도를 탈 때 화물이 흔들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더 작고, 더 둔탁하고, 무엇보다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그는 숨을 죽이고 차가운 컨테이너 벽에 귀를 갖다 댔다. 달궈진 갑판의 열기와 달리, 냉동 컨테이너의 표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안쪽에서 누군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려다 힘이 빠져 미끄러지는 소리. 혹은 필사적으로 손톱을 세워 강철 벽을 긁어내리는 소리.
이 둔탁한 진동을 만들어내려면 적어도 수십 킬로그램의 질량을 가진 물체가 움직여야 했다. 민우는 손전등으로 컨테이너의 봉인 상태를 살폈다. 은색 봉인에는 고유 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겉보기엔 완벽하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철판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미세한 진동. 이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었다. 절박함이 묻어있는 리듬이었다.
“......”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규정대로라면 무전기를 들어야 했다. 보안팀을 호출하고 당직 사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이번에도 잘못 들은 거라면? 또다시 과민반응으로 몰려 조롱거리가 된다면?
확인해야 했다. 이 차가운 강철 벽 너머에 있는 것이 기계의 오작동인지, 짐승인지, 아니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 불길한 소리를 잠재울 수 없었다. 민우는 허리춤에서 펜치를 꺼냈다. 손에 땀이 차 금속 손잡이가 미끈거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잡았다. 이 얇은 쇠막대 하나가 합법과 불법을 가르고 있었다. 이것을 끊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로 남을 수 없게 된다.
탁. 경쾌한 파열음이 엔진 소음에 묻혔다. 잘려 나간 봉인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소리였다. 민우는 묵직한 잠금 레버를 양손으로 잡고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고막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민우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쏟아져 나온 것은 단순한 냉기가 아닌 압축된 지옥의 숨결이었다. 덥고 습한 적도의 공기가 영하의 냉기와 충돌하며 하얀 안개를 만들어냈고, 그 안개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훅 끼쳐왔다. 좁은 공간에서 배설물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을 때 나는 암모니아 냄새. 썩은 과일이 내뿜는 에틸렌 가스의 들척지근한 단내. 그리고 씻지 못한 인간의 몸에서 나는 기름진 땀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민우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옷소매로 코를 막았다. 손전등을 들어 안개 속을 비췄다. 빛줄기가 춤을 추며 어둠을 갈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깔린 축축하게 젖은 골판지 박스들이었다. 그리고 그 쓰레기 같은 더미 위에, 짐승처럼 웅크린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빛이 닿자 그림자 중 하나가 움찔했다. 민우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남자는 바닥에 모로 누운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얼어붙어 있었고,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팔을 뻗어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작은 존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품속에서, 털모자를 쓴 깡마른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눈을 뜨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의 폭력 앞에 소년의 동공이 급격하게 수축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럴 힘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앙상하게 드러난 쇄골만이 얕은 숨을 쉴 때마다 파들거렸다. 소년의 속눈썹에는 하얀 성에가 맺혀 있었고, 볼은 동상으로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
소년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하얀 입김만이 피어올랐다. 아이의 시선이 민우의 얼굴을 지나, 그의 제복 가슴에 달린 3등 항해사 견장에 머물렀다가, 다시 민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살려달라는 애원도, 왜 이제야 왔느냐는 원망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저승사자를 바라보듯, 깊고 고요한 눈동자였다.민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거기 누구야!”
등 뒤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고함이 민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1등 항해사였다. 순찰을 돌던 그가 굳은 표정으로 좁은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민우는 황급히 열린 문을 등으로 가리려 했지만, 이미 쏟아져 나온 하얀 냉기와 지독한 악취는 숨길 수 없었다. 1등 항해사의 손전등 불빛이 민우의 얼굴을, 그리고 민우의 등 뒤로 열린 컨테이너 틈새를 비췄다.
“이게 다 무슨 냄새야? 너 지금 뭐…”
1등 항해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불빛이 안쪽의 참상을 훑었다. 쓰러진 남자, 그 품에 안긴 소년.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오물들. 1등 항해사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는 뒷걸음질 치며 무전기를 들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브리지. 여기 34번 베이. 선장님… 선장님 좀 호출해 주십쇼. 당장.”
최 선장은 연락을 받은 지 7분 만에 나타났다. 그는 잠이 덜 깬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었다. 다림질된 흰색 제복 셔츠, 칼 주름이 잡힌 바지. 그는 방금 침대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라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하러 가는 임원처럼 보였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침묵을 두르고, 선장은 1등 항해사가 비켜선 자리에 섰다.
그는 민우의 손에서 손전등을 뺏어 들고 컨테이너 안쪽을 비췄다. 하얀 빛줄기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와 그 품에 안긴 소년을 훑었다. 소년은 빛을 피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속눈썹을 떨면서도,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 거대한 시스템의 관리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선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혐오도,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선적 서류와 일치하지 않는 오배송 화물의 파손 상태를 진단하는 검수원처럼 건조한 눈빛이었다. 잠시 후, 선장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악취 때문이 아니었다. 이 비위생적인 상황이 자신의 완벽한 배를 오염시키는 것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 반응이었다.
“상태가 안 좋군.”
“동상에 저체온증입니다. 호흡도 얕습니다. 당장 의무실로 옮기고, 해사기구에 타전해야…”
“그리고?”
선장이 말을 잘랐다. 그는 손전등을 끄고 민우를 돌아보았다. 역광을 받은 선장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다음 절차는?”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인계해야 합니다.”
“틀렸어.”
선장은 혀를 찼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 불꽃이 치익, 하고 일렁였다.
“단순 밀항자라면 네 말이 맞아. 밥 먹여서 데리고 가다가 다음 기항지에 넘기면 그만이다. 그건 운송 지연 사유가 안 돼.”
선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컨테이너 안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저것들은 달라. 숨만 붙어 있지 의학적으로는 시체나 다름없어. 우리가 의무실로 옮기는 순간, 본선 항해 일지에는 응급 환자 발생이 기록된다. 선내에 의사가 없으니, 그 즉시 국제 해상법상 의료적 항로 이탈 의무가 발생해. 응급 회항이 발동되면 우린 선택권이 없다. 무조건 가장 가까운 항구로 뱃머리를 돌려야 해. 지금 좌표면 스리랑카 콜롬보항이나 싱가포르로 회항해야 한다. 전속력으로 달려도 왕복 닷새는 공중에 날리는 거야.”
“비용… 때문입니까?”
“비용?”
선장이 피식 웃었다.
“기름값 몇 푼, 항비 몇 천만 원… 그런 건 보험으로 퉁치면 그만이야. 진짜 문제는 신뢰다.”
선장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지금 우리 배에 실린 화물의 40퍼센트가 반도체 장비와 긴급 부품이야. 화주들은 정시 도착을 조건으로 비싼 운임을 냈다. 그런데 밀항자, 그것도 다 죽어가는 송장 두 구 때문에 배를 돌렸다? 화주들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나. 리스크 관리가 안 되는 선사라고 낙인찍겠지. 그 클레임과 계약 파기… 그건 돈으로 환산이 안 돼.”
“그렇다고… 죽게 둡니까? 사람이잖아요.”
“산 사람은 그렇지.”
선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비벼 껐다. 검은 재가 바닥에 문대어졌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달라.”
“네?”
“살아있으면 우리가 환자를 태운 순간부터 회항 의무가 생긴다. 하지만 죽어서 발견되면? 그땐 회항할 필요가 없어. 시체는 응급 환자가 아니니까. 그냥 냉동고에 넣어뒀다가 목적지까지 운송해서 당국에 신고하면 된다. 그게 규정이다.”
“봉인은요… 이미 뜯었습니다.”
민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록이 남을 텐데요.”
선장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작업복 주머니를 뒤적거려 새 봉인을 꺼냈다.
“봉인 번호? 내가 수정한다.”
선장은 새 봉인을 민우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떠밀었다.
“선장 권한으로 전산망에 접속하면 화물 로그 수정할 수 있어. 항해 중 봉인 파손 우려로 교체함. 이 코멘트 한 줄이면 끝이다. 네가 뭘 본 건지도, 몇 시에 문을 열었는지도 내가 다 바꿀 수 있어. 검수원이 와도, 보험사 조사관이 와도 서류상으론 완벽해.”
민우는 손에 쥐어진 차가운 봉인을 내려다보았다. 묵직한 쇳덩어리가 손바닥을 짓눌렀다. 안에서는 소년이 여전히 민우를 보고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는 애원도 없었다. 그저 깊고 검은 눈동자가 민우의 선택을, 아니 어른들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문을 닫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너도, 나도, 회사도. 그리고 쟤들도… 어차피 가망 없잖아.”
선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지금 열어 두면… 우리 모두는 끝이다.”
민우는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문을 닫으면 살인자가 된다. 하지만 닫지 않으면? 선장의 말대로 모든 책임과 비용, 그리고 파산한 미래가 그들을 덮칠 것이다. 1등 항해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민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안 닫아!”
선장의 일갈에 민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조건반사적인 복종. 민우는 비틀거리며 육중한 철문을 잡았다. 녹슨 경첩이 끼이익, 비명을 질렀다. 문이 닫히는 순간, 틈새로 보이던 소년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잘려 나갔다.
쾅.
거대한 쇳덩어리가 맞물렸다. 지옥의 입구가 닫혔다.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레버를 돌려 잠갔다. 그리고 선장이 준 새 봉인을 끼웠다. 구멍에 맞추는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 두 번이나 빗나갔다.
딸각. 선장은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우의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로그는 내가 지금 바로 수정하마. 34번 베이는 이제부터 점검 제외다.”
선장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민우는 홀로 남겨졌다. 다시 봉인된 컨테이너는 완벽하게 침묵했다. 서류도, 봉인도, 목격자도 조작된 세계. 거대한 자이언트 블루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용 효율적인 최적 항로를 따라 맹목적으로 파도를 갈랐다. 민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름때 묻은 장갑 위로 보이지 않는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삽화=이지후 작가 mi3131mi@naver.com
2
민우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뼛속까지 파고든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수세미에 비누를 묻혀 손을 문질렀다. 손바닥 피부가 붉게 벗겨지고 쓰라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코끝에 눌어붙은 그 냄새, 34번 베이의 틈새에서 새어 나왔던 암모니아와 썩은 과일의 단내가 비누 향을 뚫고 계속해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민우는 구역질을 참으며 손톱 밑을 파내듯 닦았다. 기름때는 씻겨 내려갔지만, 조금 전 자신이 끼워 넣은 은색 봉인의 차가운 감촉은 낙인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딸각. 뼈가 부러지는 듯했던 그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선실로 돌아온 민우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에 검은 점을 찍었다.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 민우는 사진을 엎어버렸다. 그들의 웃음이, 그 평범한 행복이 지금 자신의 비겁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곱씹었다. 그는 단순히 문을 닫은 것이 아니었다. 구조 의무를 방기했고, 회항 비용이라는 계산기 앞에서 생명을 지웠다. 선장의 말대로라면 그는 자신의 미래를 지킨 것이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이미 살인 방조범의 그것이었다.
잠들 수 없었다. 민우는 작업복을 다시 꿰입고 복도로 나갔다. 배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당직자가 아닌 선원들은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거렸고, 배의 심장부에서 울리는 엔진 진동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민우는 홀린 듯 선교로 향했다. 확인해야 했다. 선장이 말한 완전범죄가, 그 서류 조작이 정말로 실행되었는지. 선교는 어두웠다. 자동 항법 장치와 레이더 모니터들이 내뿜는 초록색, 붉은색 불빛만이 유령처럼 일렁였다. 당직을 서고 있는 1등 항해사가 민우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안 자고 왜 왔어?”
1등 항해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고 날카로웠다. 그의 눈 밑은 퀭했고 손에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가 들려 있었다. 선교 내 흡연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규정을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등 항해사는 민우의 시선을 피하며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공범이었다. 선장의 논리에 굴복하고, 민우가 봉인을 채우는 것을 침묵으로 동의했던 조력자. 두 사람 사이에는 끈적하고 불쾌한 공기가 흘렀다. 민우는 말없이 화물 관리 시스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선박 관리 프로그램 화면에 수천 개의 격자무늬가 떠 있었다. 민우의 손가락이 떨리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좌현 34번 베이. 클릭.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눈은 그 아래, 작업 이력 란을 찾았다.
02시 15분. 봉인 파손 우려로 인한 예방적 교체 완료. (식별 번호 KR-2025-8821 → KR-2025-8822)
선장은 약속대로, 아니 예고대로 기록을 완벽하게 조작해 놓았다. 밀항자 발견도, 문 개방도 없었다. 그저 낡은 봉인이 끊어질까 봐 새것으로 갈아끼운 일상적인 정비 작업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한 줄의 코멘트로 인해, 민우가 뜯어냈던 봉인과 새로 채운 봉인의 번호 차이는 합법적인 근거를 얻었다.
“선장님은...”
민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려가셨어. 로그 수정 끝났으니까 신경 끄고 자래.”
1등 항해사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우야.”
“......”
“알잖아. 선장님 말이 맞아. 지금 신고하면 메디컬 디비에이션 걸려. 배 돌리는 순간 회사 뒤집어지고 우리 다 옷 벗어야 된다고.”
1등 항해사는 민우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그저 과도한 비용 발생을 막기 위해 규정대로 움직인 회사원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의 흔들리는 동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었다.
“안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민우는 선교를 빠져나왔다. 갑판으로 나가는 철문 앞에 섰다. 문을 열면 바로 34번 베이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문손잡이를 잡지 못했다. 두려웠다. 그곳에 가서 귀를 댔을 때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두려웠고, 반대로 아직도 소리가 들릴까 봐 두려웠다. 침묵은 죄책감을 낳았고 소음은 공포를 낳았다. 어느 쪽이든 민우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가 얼어붙을 듯 차가웠지만 속에서 타오르는 열기는 식지 않았다. 식당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로테르담까지 남은 시간.
10일.
이는 화물이 운송되는 기간이었지만, 동시에 34번 베이 안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선장의 계산대로라면, 그들은 10일 안에 자연스럽게 시체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회항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야 단순 사고사가 되니까. 민우는 자신이 앞으로 240시간 동안, 매분 매초 그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실로 돌아온 민우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자마자 어둠 속에서 소년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초콜릿 포장지를 쥐고 있던 앙상한 손. 왜 나를 버렸느냐고 묻지 않던 그 고요한 체념.
민우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머리 속에서부터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웅크렸다. 태아처럼, 혹은 34번 베이 안에 갇힌 소년처럼. 이 거대한 강철 감옥 안에서, 민우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조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밤은 길었고, 배는 무심하게 적도를 향해, 가장 효율적인 죽음의 항로를 따라 나아갔다.
삽화=이지후 작가 mi3131mi@naver.com
3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 동안 민우의 시간은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고 흘렀다. 선교의 전자시계는 정확히 1초 단위로 숫자를 바꿨지만, 민우가 체감하는 시간은 썩어가는 진흙처럼 질척거리고 늘어졌다. 그는 근무 시간 내내 레이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미 없는 해도를 폈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그의 시선은 자석에 이끌리듯 주기적으로 화물 모니터링 시스템의 한 구석으로 쏠렸다.
좌현 34번 베이. 영하 21도.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설정 온도는 영하 20도였다. 낡은 냉동 컨테이너의 센서가 오차 범위 내에서 춤을 추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민우는 그 마이너스 1도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해독해냈다. 내부의 열원이 사라지고 있다.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내뿜던 체온이, 생명의 에너지가 서서히 꺼져가며 냉각기의 효율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항사, 안색이 왜 그래? 어디 아파?”
교대하러 들어온 2등 항해사가 물었다. 민우는 황급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적도 지나니까 더워서 그렇지. 식당 가서 얼음물이나 좀 마셔.”
민우는 도망치듯 선교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식당으로 가지 못했다.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사흘 전부터 민우의 후각은 고장 나 있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환각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벙커C유의 매캐한 기름 냄새도, 바다의 짭짤한 소금기도 아닌, 아주 미세하지만, 끈적하게 점막에 달라붙는 단백질이 상해가는 냄새였다. 썩은 과일의 들척지근한 단내와 암모니아의 톡 쏘는 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선내의 공조 시스템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밤 12시. 모두가 잠든 시간. 민우는 정수기에서 받은 온수를 페트병에 담았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기가 낯설었다. 그는 작업복 안주머니에 물병을 숨기고 그림자처럼 복도를 걸었다. CCTV 카메라가 회전하며 붉은 적외선 눈동자를 번득일 때마다 숨을 죽였다. 자신이 이 배의 항해사가 아니라 배에 기생하는 쥐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갑판으로 나오자 거친 바람이 들이닥쳤다. 어제와는 달랐다. 바람의 결이 날카로워졌고 습도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저기압 덩어리가 대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민우는 캣워크를 기어가듯 걸어 34번 베이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우뚝 솟은 붉은 강철 벽. 냉각팬이 돌아가는 윙윙거리는 소음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민우는 주위를 살피고 컨테이너 측면에 붙은 환기구 덮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좁은 틈.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유입시키기 위한 이 작은 구멍이 안과 밖을 연결하는 유일한 탯줄이었다.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덮개를 밀어 올렸다.
훅.
틈새가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민우는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며칠 전 맡았던 냄새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땀이나 배설물의 악취는 희미해졌고 그 자리를 훨씬 더 원초적이고 무거운 냄새가 채우고 있었다. 단백질이 분해되면서 내뿜는 들척지근한 가스 냄새. 차가운 공기 속에 섞여 있어도 분명하게 구별되는, 명백한 죽음의 향기였다.
아버지는 죽었다.
민우의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냄새는 살아있는 자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는 이미 부패하고 있었다. 민우는 눈물이 고이는 것을 참으며 물병 주둥이를 환기구 틈새로 밀어 넣었다.
“아미르...”
나직하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민우는 물병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이야. 따뜻한 물.”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와 물병을 낚아챘다. 민우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물병을 놓지 않았다. 좁은 구멍 안에서 힘겨운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아이였다. 굶주림과 갈증에 미쳐버린 아이가 짐승처럼 물병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민우는 천천히 물병을 밀어 넣어주었다. 플라스틱 병이 찌그러지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꼴꼴꼴. 물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지만 냉각팬 소음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빈 물병이 다시 틈새로 밀려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하얗고 가느다란 것이 틈새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손가락이었다. 껍질이 벗겨져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동상으로 검게 변색된 손톱.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소년의 검지였다. 소년의 손가락은 허공을 휘적거리다 민우의 손등을 찾았다. 차가웠다. 얼음장보다 더 차갑고 강철보다 더 딱딱한 감촉이 민우의 피부에 닿았다. 소름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아주 미약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소년은 민우의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환기구 틈이 너무 좁아 손을 맞잡을 수는 없었지만, 아이는 검지 하나만으로 민우의 손등을 필사적으로 긁고, 누르고, 문질렀다. 물을 더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이 차가운 어둠 바깥에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여전히 존재하는지, 자신이 아직 살아있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민우는 자신의 다른 손으로 소년의 차가운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그 순간, 틈새 안쪽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이의 손가락이 민우의 온기를 빨아들이려는 듯 파고들었다.
민우는 상상했다. 지금 아이는 어떤 자세로 있을까. 이미 썩어가기 시작한 아버지의 시체 옆에 웅크리고 앉아, 한 손으로는 죽은 아비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벽 틈새로 내밀어 이름 모를 타인의 온기를 구걸하고 있는 모습. 죽음과 삶 사이, 아버지와 민우 사이에서 소년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로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미안하다... 꺼내주지 못해서... 미안해...”
소년의 손가락이 민우의 손등을 톡, 톡 두드렸다. 괜찮다는 용서였을까, 아니면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달라는 구조 신호였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규칙적인 리듬은 민우의 심장 박동과 공명하며 죄책감이라는 둔기로 가슴을 후려쳤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크게 휘청거렸다. 민우의 몸이 균형을 잃고 쏠렸다. 그 바람에 맞잡고 있던 손가락이 떨어졌다. 소년의 손가락이 허공을 휘저었지만, 민우는 다시 잡아주지 못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 때문이었다. 민우는 황급히 환기구 덮개를 닫았다. 탁. 그 작은 소리가 소년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안쪽에서 무언가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우는 도망치듯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선실로 돌아오는 길, 민우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 남은 미세한 온기가, 아이가 넘겨준 생명의 불씨처럼 느껴졌다. 배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복도의 소화기가 덜컹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엔진의 진동이 거칠어져 있었다. 바다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정오, 하늘이 멍들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번져온 검푸른 색조는 단순한 먹구름과, 누군가 하늘의 목을 졸라 울혈이 터진 듯한, 병적이고 불길한 보랏빛이었다. 기상 팩스로 전송된 등압선 지도는 촘촘한 동심원을 그리며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이 고립된 강철 요새를 향해 조여오고 있었다.
파도의 주기가 길어졌다. 너울이 시작된 것이다. 바람이 일으키는 잔파도와 달리 너울은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거대한 에너지의 덩어리였다. 자이언트 블루호의 선수가 아파트 10층 높이의 파도 언덕을 타고 천천히 솟구쳤다가, 내장이 쏠리는 부유감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처박혔다.
쿵.
10만 톤의 강철이 수면을 때릴 때마다 선체 전체가 거대한 짐승의 갈비뼈처럼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용골부터 마스트까지, 배를 구성하는 수백만 개의 리벳과 용접 부위가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지며 내는 고통의 신음이었다. 철판과 철판이 비틀리며 내는 그 날카로운 마찰음은 민우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두개골 안쪽을 긁어댔다. 오후 2시. 선교의 경사계 바늘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현 35도! 좌현 35도!”
조타수의 외침은 건조했지만 그의 손은 타륜을 꽉 쥐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롤링이 시작되었다. 중력의 방향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바닥이 벽이 되고 벽이 천장이 되는 기이한 회전 속에서 고정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흉기로 돌변했다. 선교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머그잔이 미끄러져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튀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민우는 항해 계기판의 안전바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버텼다. 멀미가 위장을 쥐어짜는 듯했지만 그가 토하고 싶은 이유는 흔들림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눈앞의 파도보다 더 끔찍한 시뮬레이션이 자동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4번 베이. 그곳에는 안전벨트도, 에어백도, 충격을 흡수할 완충재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강철 벽과 미끄러운 바닥, 그리고 날카로운 모서리들뿐이었다. 민우는 상상했다. 아니, 보았다. 배가 좌현으로 30도 기울어지는 순간, 34번 베이의 내부 풍경을.
쿵. 강철 벽에 부딪히는 소리. 살과 뼈가 차가운 쇠에 짓이겨지는 소리. 아이는 비명을 질렀을까. 아니면 이미 얼어붙은 성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왔을까. 배가 다시 우현으로 30도 기운다. 이번에는 반대쪽이다. 중력은 공평하고 잔인하게 그들을 반대편 벽으로 내동댕이친다. 바닥을 긁으며 미끄러지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 그리고 다시, 쾅.
2만 개의 컨테이너 중 오직 하나, 34번 베이만이 생명을 갈아넣고 있었다. 민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청각은 더 예민해져 환청을 만들어냈다. 선체를 때리는 파도 소리 사이로, 34번 베이 안에서 쿵, 쿵, 하고 시체가 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미 죽은 아비의 몸뚱이가 흉기가 되어 살아있는 아들의 몸을 짓누르고 타격하는 잔인한 물리법칙. 아버지는 살아서는 아들을 추위로부터 지켰지만, 죽어서는 얼음덩어리가 되어 아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큰일났어요! 파도랑 선체 주기가 공진하고 있습니다! 롤링!!”
1등 항해사가 모니터를 붙잡고 소리쳤다. 가장 치명적인 재난이었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이 진동은 배를 오뚝이처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어 컨테이너를 바다로 쏟아내거나 심하면 배를 전복시킨다.
“복원력이 떨어집니다! GM 값이 한계치예요!”
1등 항해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배가 기울었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는 탄성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한번 기울어진 배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최 선장은 흔들리는 지휘 의자에 앉아 핏발 선 눈으로 파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의자 팔걸이를 꽉 쥐고 있어 가죽이 하얗게 일그러져 있었다. 안면근육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자연이 감히 자신의 무사고 항해 기록에 흠집을 내려는 것에 대한 오만한 분노.
“각도 유지해.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
선장의 명령은 침착했다. 하지만 민우는 보았다. 선장의 시선이 아주 잠시 모니터 속 화물 적재 현황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그리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한 구역, 좌현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34번 베이에 머무는 것을. 그 눈빛은 불안이 아니었다. 이는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이 폭력이, 이 혼란이 어쩌면 성가신 화물을 처리할 완벽한 알리바이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계산이 폭풍우 치는 바다보다 더 검게 선장의 동공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거워... 갑판 화물이... 너무 무거워.”
그 나직한 목소리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민우의 귀에 박혔다. 단순한 화물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선장은 지금 죄책감의 무게가 아니라 증거 인멸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바다가 뒤집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악의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감속해! 5노트!”
“이미 감속했습니다! 그래도 롤링이 안 잡힙니다!”
“갑판 화물 무게중심이 너무 높아. 특히 좌현 쪽 스택 중량이 과다해. 이대로면 다음 롤링 때 배가 안 돌아올 수도 있어.”
선장은 붉은 펜을 들어 화물 적재도 위의 한 구역을 거칠게 동그라미 쳤다.
“좌현 34번 베이.”
민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붉은 펜 자국이 조준경의 십자선처럼 보였다.
“가장 바깥쪽 7단 높이. 여기가 모멘트를 가장 많이 받고 있어. 여기 무게를 덜어내야 배가 산다.”
선장은 고개를 들어 민우를 보았다. 그 눈빛은 차가운 계산기였다. 그는 지금 살인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선박 구조역학을 이용해 가장 골치 아픈 부채를 털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제티슨을 준비해.”
화물 비상 투하. 선박과 선원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 선장의 고유 권한으로 화물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만드는 조치. 공동해손의 법리가 그를 보호해 줄 것이다.
“선장님! 제티슨이라니요! 다른 방법이...”
1등 항해사가 기겁하며 외쳤지만 선장은 단호했다.
“당장 무게 줄이지 않으면 2분 안에 전복이다. 다 죽고 싶어?”
선장이 고함을 지르자 선교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선원들은 본능적으로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34번 베이 하나를 버려서 우리가 살 수 있다면. 그 무언의 동의가 붉은 조명 아래서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강민우. 갑판장 데리고 나가. 34번 베이 턴버클 풀어. 래싱 해제해.”
“못 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네가 저걸 버리지 않으면 이 배에 탄 선원 24명이 다 수장돼. 네 놈의 그 알량한 도덕심 때문에 동료들을 죽일 셈인가?”
민우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며 벽에 걸린 공구함으로 향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소방 도끼 같은 건 없었다. 대신 그는 녹슨 스패너와, 지렛대 역할을 할 1미터 길이의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것들은 배를 고치는 도구였지만 오늘 밤에는 생명을 끊거나 지키기 위한 무기가 될 터였다.
민우는 수밀문 레버를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굉음과 함께 폭풍이 그를 덮쳤다. 그는 어둠 속으로, 미쳐 날뛰는 갑판 위로 발을 내디뎠다. 민우는 우비가 걸린 벽면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공포심 때문인지, 배가 좌우로 30도씩 요동치는 파라메트릭 롤링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노란색 우비를 꺼내 입었다. 방수 재질의 뻣뻣한 천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마치 수의를 걸치는 것처럼 서늘했다. 안전모를 쓰고 턱끈을 조였다. 플라스틱 버클이 딸각하고 잠기는 소리가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3항사! 뭐 해! 빨리 안 나가고!”
갑판장이 수밀문 앞에서 소리쳤다. 그는 이미 커다란 스패너와 쇠지렛대가 든 무거운 공구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비장했다. 선장의 명령을 배를 살리기 위한 성전으로 받아들인 자의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민우는 대답 대신 바닥에 놓인 1미터 길이의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녹슨 턴버클을 돌릴 때 지렛대 역할을 할 도구였지만, 지금 민우의 손에 들린 것은 단순한 공구 그 이상이었다.
“그건 왜 챙겨?”
갑판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턴버클이 녹슬어서 안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민우가 얼버무렸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 파이프를 턴버클이 아니라, 그것을 돌리려는 누군가의 손목을 향해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했다.
“빨리 나와! 롤링 더 심해지기 전에!”
갑판장이 수밀문의 레버를 돌렸다.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마자, 세상이 굉음으로 뒤덮였다. 선교 안에서 듣던 소리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강풍이 안면을 강타했다. 숨을 들이켜려던 민우의 입안으로 짠물과 기름 섞인 빗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빗줄기가 수평으로 날아와 피부를 때렸다. 비가 아닌 허공에서 쏟아지는 자갈무지.
민우는 갑판장의 뒤를 따라 캣워크로 나갔다.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배가 크게 요동쳤다.
쿵! 선수가 파도 골짜기에 처박히며 배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민우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철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무릎이 깨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바닥은 이미 물바다였다. 뱃전을 넘어온 파도가 갑판 위를 강물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하얀 거품이 민우의 허리까지 차올랐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안전 고리 걸어! 날아가!”
앞서가던 갑판장이 고함쳤지만, 바람 소리에 묻혀 입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안전 로프에 고리를 걸었다. 철커덕. 생명줄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이 줄이 자신을 34번 베이로, 그 잔인한 살인의 현장으로 끌고 가는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 떼기가 힘들었다. 바람이 민우를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바다가, 혹은 자연의 거대한 의지가 이 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그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갑판장의 헤드랜턴 불빛은 망설임 없이 어둠 속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 불빛이 향하는 곳, 좌현 끝자락에 34번 베이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번개가 쳤다. 찰나의 섬광 속에서 34번 베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붉은색 컨테이너는 파도에 흠씬 두들겨 맞아 검붉게 변해 있었다. 배가 기울 때마다 컨테이너 타워 전체가 삐걱거리며 뒤틀렸다. 34번 베이는 가장 바깥쪽, 파도를 정면으로 받는 최전선에 있었다.
‘아미르.’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빗물이 헬멧을 타고 흘러내려 눈앞을 가렸다. 아직 따뜻했다. 어젯밤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던 그 미약한 온기가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살아있다. 반드시 살아있다.
“도착했어! 작업 시작해!”
갑판장이 34번 베이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공구 가방에서 육중한 스패너를 꺼내 들었다. 그의 망설임 없는 동작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그는 34번 컨테이너를 고정하고 있는 턴버클에 스패너를 끼웠다. 턴버클은 컨테이너를 붙잡고 있는 엑스 자 모양의 강철 래싱 바를 팽팽하게 조여주는 나사 장치였다. 이것을 풀면 장력이 사라진다. 그러면 다음 롤링이 올 때, 헐거워진 래싱 바가 풀리고 30톤짜리 강철 상자는 무게중심을 잃고 바다로 미끄러져 떨어질 것이다. 중력과 관성. 너무나 간단한 물리학이었다. 나사를 몇 바퀴 돌리는 단순 노동이, 한 우주를 심해로 수장시키는 살인 행위가 되는 순간이었다.
“강 3항사! 파이프 줘! 녹슬어서 안 돌아가!”
갑판장이 민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냥 힘으로는 쩔어붙은 턴버클이 돌아가지 않았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억지로 돌려야 했다. 민우는 손에 든 쇠파이프를 내려다보았다.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쇠막대. 저걸 건네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선장이 보고 있다. CCTV가 보고 있다. 내가 돕지 않으면 나는 명령 불복종으로, 선상 반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들의 목숨을 위협한 이기적인 놈으로 낙인찍혀 매장될 것이다. 민우는 천천히 파이프를 내밀었다. 갑판장이 그것을 낚아채 스패너 자루에 끼웠다. 길어진 손잡이가 강력한 지렛대가 되었다. 갑판장은 체중을 실어 파이프를 눌렀다.
끼기긱. 녹슨 나사가 돌아가는 소리가 폭풍우 소리를 뚫고 민우의 귓가에 박혔다. 팽팽했던 강철 바가 퉁, 하고 튕기며 느슨해졌다. 그 순간, 배가 우현으로 40도 가까이 크게 기울었다. 34번 컨테이너 안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화물도 아니었다. 분명히, 사람의 몸뚱이가 부딪히는 둔탁하고 끔찍한 소리였다.
민우의 손이 멈췄다. 아이는 아직 살아있다. 방금 그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밖에서 아이를 바다로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갑판장이 다시 파이프를 들어 올려 반대편 턴버클로 향했다. 저것마저 풀리면 끝이다. 민우의 손가락이 쇠파이프 대신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렌치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녹슨 나사가 돌아가는 소리는 고막을 찢는 비명 같았다. 갑판장이 쇠파이프에 체중을 실어 누르자 34번 컨테이너를 지지하던 강철 턴버클이 천천히 회전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엑스 자 모양의 래싱 바가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아이를 붙잡고 있던 마지막 생명줄이 풀리는 소리였고 민우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더 눌러! 파도 온다!”
갑판장이 빗물에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는 민우가 돕지 않고 멍하니 서 있자 답답한 듯 욕설을 내뱉으며 혼자서라도 파이프를 누르려 끙끙거렸다. 그 순간, 민우의 몸이 튀어 나갔다.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근육을 지배했다. 그는 갑판장이 쥐고 있는 쇠파이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힘껏 밀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놓으세요. 제발.”
민우가 으르렁거렸다. 빗물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지만 짠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풀면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돼요.”
“미쳤어? 너 돌았냐? 이거 안 풀면 배 넘어간다고! 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갑판장이 민우를 밀쳐내려 했다. 그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평소 순박하고 성실한 가장이었던 그였지만 생존 본능 앞에서는 그 또한 맹수처럼 변해 있었다. 그의 눈에 민우는 배를 전복시키려는 미치광이로 보일 뿐이었다.
“이 안에! 아이가!”
갑판장의 동작이 멈칫했다. 그는 흠뻑 젖은 눈을 깜빡이며 민우와 34번 컨테이너를 번갈아 보았다. 사람? 이 쇳덩어리 안에?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단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의 눈빛,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의 살기였다.
“무슨... 소리야...”
“선장도 알고 1항사도 알아요! 다 알면서 버리는 거라고요! 이거 사고 아니야!”
민우는 잡고 있던 쇠파이프를 뺏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챙강. 파이프가 갑판 위를 굴러 빗물 배수구 쪽으로 사라졌다.
“아미르! 들려? 내 말 들려?”
민우가 컨테이너 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폭풍우 소리가 너무 컸다. 하지만 민우는 확신했다. 조금 전 배가 기울 때 들렸던 그 둔탁한 충돌음. 아이는 안에서 듣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자신을 위해 싸우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를. 그때였다. 선교 윙 쪽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강민우!”
확성기를 통해 증폭된 목소리. 선장이었다. 그는 비바람을 피해 처마 밑에 서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 작업 재개해! 이건 명령이다!”
선장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CCTV를 통해 민우가 갑판장을 방해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민우가 떠들어댈수록 완전범죄의 시나리오에 금이 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못 합니다!”
민우가 고개를 처들고 소리쳤다.
“3항사...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갑판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려 했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민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방금 끔찍한 짓을 저지를 뻔한 것이다. 하지만 선장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또한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공포였다.
“오지 마요.”
민우는 뒷걸음질 쳤다. 그의 등 뒤로 34번 컨테이너가 버티고 있었다. 배가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쿠웅! 거대한 파도가 뱃전을 넘어와 갑판을 덮쳤다. 민우와 갑판장은 안전 로프에 매달려 휘청거렸다. 물살이 무릎을 치고 지나갔다. 34번 컨테이너가 삐걱거리며 기우뚱했다. 반대쪽 턴버클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이미 풀려버린 한쪽 때문에 고정력은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수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선장이 나타났다. 그는 우비도 입지 않은 채 젖은 제복 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셔츠가 그의 왜소한 몸뚱이를 드러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결코 왜소하지 않았다.
붉은색 권총 형태의 물건. 신호탄 발사기였다. 망망대해에서 조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화약식 신호총. 저것을 사람이나 화물을 향해 쏘면 섭씨 2천 도가 넘는 고열의 불덩어리가 뼈와 살을, 그리고 강철마저 녹여버린다. 선장은 총구를 민우가 아닌, 34번 컨테이너의 환기구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배를 침몰시킬 셈인가? 너 땜에 24명이 다 죽는꼴 볼래? 이건 사고야. 화재 사고.”
선장이 신호탄 발사기를 흔들어 보였다.
“내가 이걸 환기구 안에 쏘면 어떻게 될까? 안쪽의 단열재에 불이 붙겠지. 그럼 쟤들은 타 죽거나 질식해 죽어. 아주 깔끔하게. 익사체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워. 어차피 버릴 화물, 불타서 버렸다고 하면 그만이야.”
선장의 협박에 갑판장이 벌벌 떨며 바닥에 떨어진 스패너를 다시 집어 들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무력으로 선장을 제압할 수는 없다. 민우가 달려들기 전에 선장은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불덩어리가 환기구로 들어가면 안은 순식간에 가스실이 된다. 민우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공포가 아드레날린을 펌프질했다. 이길 수 없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 미친 살인극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선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총보다 더 무서운 것. 태풍보다 더 무서운 것. 바로 그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비용과 책임. 민우는 갑판장을 막아서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선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쏘십시오.”
“뭐?”
“쏘세요. 불태우고 버리십시오. 어차피 늦었으니까.”
민우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선장님. 제가 나오기 전에 어디 들렀는지 아십니까?”
선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통신실.”
민우가 피식 웃었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1항사님이 비상 키를 서랍에 두셨더군요.”
선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호탄 발사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단말기로 조난 신호 보냈습니다. 응급 환자 발생.”
민우는 또박또박 말했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씹어 뱉었다.
“동상 및 저체온증 환자 2명. 선내 의약품 부족으로 긴급 후송 요망. 전송 완료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민우는 통신실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선장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기록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 0.1퍼센트의 리스크였다.
“거짓말.”
선장의 입술이 비틀렸다. 빗줄기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경련하는 입꼬리를 적셨다.
“통신실은 잠겨 있어. 키는 내가 가지고 있다.”
“비상 키는 1항사님도 가지고 계시죠.”
민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의 심장은 갈비뼈를 부러뜨릴 듯이 뛰고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폭풍우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살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차가운 진실처럼 들렸다. 해적이나 테러가 아닌 선내 응급 환자 발생이라는 코드가 해경 상황실 모니터에 뜨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지금 방아쇠를 당겨 민우를 죽이고 화물을 태운다 해도 이미 전송된 데이터는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시체가 발견되면 완벽한 살인의 증거가 된다.
“이제 전 세계가 압니다. 이 배에 환자가 있다는 걸. 지금 신호탄 쏘고 화물을 버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환자 발생으로 기록됐으니까요.”
민우가 선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총구가 미세하게 아래로 처졌다. 그 찰나의 틈. 의심이 확신을 갉아먹는 그 1초의 정적. 민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갑판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판장님! 스패너 버리세요!”
갑판장은 멍하니 선장과 민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스패너가 덜덜 떨렸다.
“제가 신고했습니다. 해경이 올 겁니다. 지금 저거 풀면 갑판장님도 공범이에요! 선장님은 혼자 죽지 않아요. 시키는 대로 했다고 변명해봤자 사람 죽인 건 당신 손이 된다고!”
갑판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선장의 명령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와 살인자라는 끔찍한 낙인 사이에서 그는 갈등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스패너가 갑판 위로 떨어졌다. 쇳덩어리가 구르는 소리가 선장의 신경을 긁었다.
“이... 이 개븅신 새끼들이... 내가 어떻게 했는데.”
선장이 이를 갈았다. 그는 다시 총구를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갑판장이 스패너를 버린 순간 선장은 고립되었다. 그의 왕국이 일순간 무너져내렸다. 목격자가 생겼고 내부의 균열이 생겼고 외부의 시선이 개입했다.
민우는 선장이 방아쇠를 당길 용기마저 잃었음을 직감했다. 선장의 손에 들린 것은 신호탄 발사기였다. 망망대해에서 우리를 살려달라고 쏘아 올리는 그 붉은 구조의 불꽃이, 지금은 가장 약한 생명을 태워 죽이려는 살인의 총구가 되어 민우를 겨누고 있었다. 구조 신호가 살인 무기로 변질된 이 배의 모순을, 선장은 들고 있는 총구의 무게로 감당하고 있었다. 민우는 선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이는 것은 도박이었지만 지금 민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34번 베이.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녹슨 잠금 레버가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민우는 기합과 함께 파이프를 내리찍었다.
깡! 불꽃이 튀었다. 손목이 부러질 듯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민우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는 미친 사람처럼 쇠붙이를 내려쳤다. 단순히 문을 열기보단 행지난 일주일간 자신을 짓눌러온 침묵과 비겁함, 그리고 이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으아아아!”
민우의 비명 섞인 기합 소리가 천둥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찌그러진 레버가 마침내 튕겨 나갔다. 민우는 파이프를 내던지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열려라... 제발...”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문을 잡아당겼다. 안쪽의 기압 차이와 얼어붙은 고무 패킹 때문에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배가 다시 한 번 크게 기우뚱했다. 그 반동을 이용해 민우는 몸을 뒤로 던지듯 문을 열어젖혔다.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그 순간, 폭풍우 치는 적도의 밤바다 위로 하얀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고장 난 냉동기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30도의 덥고 습한 대기와 만나 만들어낸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하얀 안개 속에서 민우는 손전등을 비췄다.
빛이 닿은 곳에, 기이한 형상의 조형물은 얼음으로 지어진 돔이었다. 남자는 등을 둥글게 말고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세상의 모든 냉기를 자신의 등판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아니, 이미 돌이었다. 생명 반응은 없었다. 남자의 심장은 오래전에 멈췄고, 근육은 수축된 채로 영원히 굳어버렸다. 오직 하나의 목적,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작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벽으로서의 기능만이 그 시신에 남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우는 울먹이며 남자의 팔을 억지로 벌렸다. 우드득. 관절이 꺾이는 끔찍한 소리가 났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얼어붙은 아버지의 품, 그 견고한 감옥이자 요새를 부수지 않으면 안쪽의 생명도 꺼져버릴 터였다. 품이 벌어지자, 그 안에서 작은 짐승 같은 것이 툭 떨어져 내렸다. 아이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 아버지의 체온과 외투 속에 파묻혀 있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몸 역시 차가웠다. 의식은 없었고,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만이 그가 아직 이승에 붙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민우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아이를 감쌌다. 그리고 이미 사물이 되어버린 남자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아이를 안고 뛰었다. 컨테이너 밖, 적도의 습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선원 침실. 민우는 히터 온도를 최대로 올리고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갑판장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30년을 배를 탔지만, 이런 몰골은 처음 보는 듯했다.
“미지근한 물… 수건 가져오세요. 빨리요!”
민우는 아이의 몸에 달라붙은 젖은 옷을 가위로 잘라냈다. 드러난 소년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푸른색이었다. 손끝과 발끝은 이미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동상이었다. 갑판장이 떠온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냈다. 단순히 몸을 녹이는 행위가 아닌 멈춰 있던 혈관을 강제로 펌프질하여, 응고된 피를 다시 돌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과정이었다.
“으… 으으윽…”
아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동상 환자에게 해동은 축복이 아니었다. 마취 없이 살 가죽을 벗겨내는 것과 맞먹는 형벌이다. 혈관이 확장되면서, 세포 하나하나가 터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뇌를 강타하는 것이다.
“으아아아악!”
마침내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어린아이 목소리라기보다 덫에 걸린 짐승이 발목을 끊어낼 때 내지르는, 원초적인 삶의 절규였다.
“아파! 아파요! 끄아아악!”
아이는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며 발작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이는 자신의 허벅지를 손톱으로 쥐어뜯으려 했다. 민우는 황급히 아이의 양팔을 결박하듯 눌렀다.
“참아야 돼. 아가, 조금만 참아. 제발…”
“죽여줘! 아파! 아빠! 아빠아!”
아이는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음 조각이 되어 컨테이너 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이는 고통을 멈춰달라고 빌었다. 민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다시 돈다는 것. 죽었던 신경이 되살아난다는 것. 혈관 속에 수천, 수만 개의 잘게 부순 유리 조각을 쏟아붓고 펌프질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 예리한 유리 조각들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안쪽부터 살을 긁어내는 감각. 살아난다는 것은 이렇게나 아픈 일인가. 죽음은 차갑고 고요했지만, 삶은 뜨겁고 요란하며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아이는 민우의 팔뚝을 물어뜯을 듯이 버둥거렸다. 민우의 뺨을 타고 땀과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그는 아이를 살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고문하고 있는 것인가.
“진통제… 진통제 없습니까?”
“없어. 아스피린이랑 소화제밖에 없다고!”
갑판장이 구급상자를 뒤집으며 소리쳤다. 이 거대한 쇳덩어리 안에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줄 그 어떤 자비로운 약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깡으로 버텨야 했다.
삽화=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절규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차 쉰 소리로 변해갔다. 격렬했던 발작도 잦아들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에 지쳐 기절한 것이었다. 아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축 늘어졌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침실 안에는 비릿한 땀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민우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검게 죽어가던 손가락 끝에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살았어…”
갑판장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민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 한 컵을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미지근한 물이, 아이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그 유리 조각들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살려냈다.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그 0.1톤의 생명을, 기어이 이쪽 세상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수 없었다. 아이가 눈을 뜨면 마주해야 할 현실은, 육체의 고통보다 더 잔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없다. 그리고 이 배는, 여전히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다. 민우는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선장은 아직 이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고통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귀환했을 뿐이었다.
“펴지지… 않습니다.”
갑판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다시 34번 베이, 그 지옥의 입구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를 선원 침실에 숨겨둔 뒤, 남은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시신 수습. 민우는 남자의 어깨와 다리를 잡고 힘을 주어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하 20도의 냉기는 남자의 관절과 근육을 강철처럼 용접해 버렸다. 남자는 죽는 순간 취했던 자세 그대로, 마치 태아처럼, 혹은 세상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려는 방패처럼 둥글게 말린 채 굳어 있었다.
“그냥 옮기시죠.”
민우가 짧게 말했다. 관절을 펴려면 뼈를 부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죽어서까지 자식을 지키려던 그 숭고한 형태를, 편의를 위해 부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남자의 몸을 양쪽에서 들어 올렸다. 묵직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 혹은 조각상을 드는 느낌이었다. 축 늘어지는 시신 특유의 섬뜩함은 없었지만, 대신 비인간적인 딱딱함이 주는 서글픔이 손끝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폭풍우 치는 갑판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좁은 선내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둥글게 굳은 남자의 등은 좁은 문을 통과할 때마다 문틀에 쿵, 쿵 부딪혔다. 그때마다 민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살리지 못한 죄, 그리고 죽은 자를 짐짝처럼 옮겨야 하는 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선미 쪽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였다. 선원들이 먹을 부식과 고기를 보관하는 대형 냉동고. 육중한 철문을 열자, 하얀 냉기와 함께 비릿한 생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안쪽 선반에는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참치와 돼지고기 블록들이 쌓여 있었다. 민우는 냉동고 한구석, 성에가 낀 바닥을 발로 치워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갑판장과 함께 남자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남자는 수십 마리의 냉동 참치들 사이에 웅크린 채 놓였다. 상품과 인간. 죽어서 화물이 되어버린 남자와, 처음부터 식량으로 실린 물고기들. 그 차가운 냉동고 안에서 둘의 차이는 모호했다. 자본의 논리로 보자면 둘 다 선적된 고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민우는 주변에 있던 방수포를 가져와 남자의 시신을 덮었다. 둥글게 솟은 등 때문에 방수포가 불룩하게 튀어 올랐다. 마치 작은 무덤 같았다.
“이제… 어쩌냐.”
냉동고 문을 닫고 나온 갑판장이 물었다.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선내 금연이라는 규칙이 생각난 듯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희뿌연 연기가 좁은 복도에 깔렸다.
“선장이 알면… 우린 끝이야. 시신 유기에 공범이 되는 거라고.”
“유기가 아닙니다. 안치한 겁니다. 그리고 선장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뭐?”
“34번 베이 문이 열려 있었잖아요. CCTV가 꺼져 있어도, 센서 경고등은 떴을 겁니다. 지금쯤 브리지에서 고민하고 있겠죠. 내려와서 확인을 할지, 아니면 모른 척 덮을지.”
갑판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럼 우린 죽은 목숨 아니냐? 그 양반, 성질머리 알잖아. 자기 앞길 막는 건 가차 없는 인간이라고.”
“반대입니다. 갑판장님.”
민우는 냉동고 문에 등을 기댄 채 갑판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에겐 증거가 있습니다. 시체만 있었다면 우린 불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생존자. 이 아이는 말하는 증거이자, 걸어 다니는 폭탄이었다. 아이는 증언할 것이다. 누가 컨테이너 문을 잠갔는지, 누가 자신들을 짐짝 취급했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장이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정황들을.
“선장도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지금 내려와서 우리를 죽여봤자, 아이까지 처리하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걸 알 겁니다. 실종자가 셋이나 생기면 해경 조사가 빡빡해질 테니까요.”
“그럼… 그냥 둔다고?”
“협상할 겁니다. 아니, 해야만 할 겁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을...”
그때였다. 선내 방송용 스피커에서 ‘지직’하는 노이즈가 들렸다. 갑판장이 화들짝 놀라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3등 항해사 강민우. 그리고 갑판장.”
선장의 목소리였다. 건조하고 차분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폭풍우 소리도, 엔진의 굉음도 스피커 너머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이 더 섬뜩했다.
“지금 즉시 브리지로 올라와라.”
명령은 짧았다. 갑판장이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가시죠. 가서 계산서를 내밀어야죠.”
민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냉동고 안에 잠든 아버지, 침실에 잠든 아들. 두 사람의 운명이 이제 민우의 혀끝에 달려 있었다. 브리지의 문이 열리자, 싸늘한 정적이 민우와 갑판장을 맞이했다. 선장은 창가에 서서 칠흑 같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야간 조명등만이 그의 뒷모습을 기괴하게 비췄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치웠나?”
주어조차 없는 질문. 그에게 34번 베이의 존재들은 그저 처리해야 할 오물에 불과했다. 민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살았습니다.”
선장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그 안의 눈동자는 여전히 소름 끼칠 만큼 맑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살았다고.”
“열 살 쯤 된 아이입니다. 지금 선원 침실에 있습니다. 동상이 심해서 응급 처치를 했지만,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대로 2주 넘게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죽으면, 우리는 시신 두 구를 싣고 입항하는 꼴이 됩니다.”
선장은 대답 대신 조타석 옆의 전자 해도로 걸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항로와 거리, 그리고 연료비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싱가포르.”
선장이 낮게 읊조렸다.
“여기서 제일 가깝군. 전속력으로 달리면 12시간 안에 닿는다.”
“회항하셔야 합니다.”
“강민우. 너는 정말 계산이 빠르군. 나보다 더.”
선장은 조타기를 잡고 있는 1등 항해사를 쳐다보았다. 구석에 박혀 숨죽이고 있던 1항사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항해사.”
“네, 넵! 선장님!”
“변침한다. 좌현 15도. 싱가포르로 간다.”
선장의 입에서 떨어진 명령은 건조했다. 그에게는 생명을 살리겠다는 인도주의적 결단이 아니라,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영학적 손절매에 가까웠다.
“전속 전진. ETA 통보하고, 대리점에 구급차 대기시키라고 해.”
거대한 선체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창밖을 보았다. 뱃머리가 서서히 돌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서, 배는 처음으로 '직진'이라는 자본의 명령을 거스르고 생명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삽화=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5
폭풍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평선 너머로 거대한 불빛의 도시가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세계 물류의 허브, 수천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는 바다 위의 주차장. 싱가포르의 야경이 수면 위로 화려하게 번지고 있었다. 배는 속도를 줄이며 정박 구역으로 진입했다. 갑판 위로 습하고 더운 열대야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민우는 난간에 기대어 다가오는 도선사의 보트를 바라보았다. 그 작은 보트가 이 악몽을 끝내러 오는 사자처럼 느껴졌다.
“만족하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이었다. 그는 제복 모자를 반듯하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마당에, 그는 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아이를 살렸으니, 영웅이라도 된 기분인가?”
“….”
“그래. 넌 네 할 일을 했지. 하지만 기억해라.”
선장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라이터 불빛에 그의 주름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는, 계산서를 떠안아야 해.”
선장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민우를 쳐다보았다.
“너는 계산 머리가 잘 돌아가니, 이것까지 계산했겠지?”
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항만청 순찰정과 구급차가 부두에서 대기 중인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준비해라. 닻 내린다.”
선장이 무전기를 들고 명령했다. 싱가포르 항만청 경찰과 검역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일처리는 건조하고 신속했다. 냉동고에 있던 남자의 시신과 선원 침실의 살아남은 아이는 각각 다른 색깔의 바디백과 이동식 침대에 실려 나갔다.
죽은 자와 산 자. 배 위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운명이었지만, 내려가는 트랩 위에서는 그저 처리해야 할 사건 번호에 불과해 보였다. 민우는 갑판 난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이가 구급차에 실리기 직전, 이동 침대가 잠시 멈췄다. 구급 대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배 쪽을 바라보았다. 산소마스크를 쓴 아이의 눈이 민우와 마주쳤다. 아이는 핏기 없는 손을 들어 무언가를 쥐어 보였다. 거리가 멀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의 증언처럼 보였다.
삐뽀삐뽀.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본사에서 급파된 법무팀과 보험사 직원들이었다. 선장실은 임시 조사실로 변했다. 책상 위에는 항해 일지와 민우가 작성한 진술서, 그리고 두툼한 계산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본사 법무팀장은 땀을 닦지도 않은 채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묻어 있었다.
“본인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래요…. 싱가포르 회항에 따른 추가 연료비 1억 5천. 항만 이용료 및 도선료 3천. 화물 납기 지연에 따른 페널티 일일 5천만 원. 거기에 냉동 화물 변질 우려에 따른 보험료 인상분,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한 회사 이미지 실추와 주가 하락분까지.”
법무팀장은 계산기를 민우 앞으로 쓱 밀었다. 액정에는 ‘ERR(에러)’가 떠 있었다. 숫자가 너무 커서 표시 한도를 초과한 것이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총액까지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쉽지 않을겁니다, 사람을 살린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 건. 쉽지 않아요.”
“……”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자본주의의 법정에서 생명의 가치는 철저하게 비용으로 환산되었다. 0.1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2만 톤의 배를 돌린 대가. 이것은 민우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그때, 선장실 문이 열리고 경찰에게 연행되던 선장이 잠시 멈춰 섰다. 그의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선장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민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선장의 죄목은 유기치사 및 선박 안전법 위반이었을 것이다. 그는 밀항자의 존재를 알고도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고, 안전 수칙을 어기고 시신을 은폐하려 했다. 그는 감옥으로 갈 것이다. 잘해도 집행유예? 선장은 고개를 저으며 끌려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묘하게 당당했다.
배에서 내려오는 길. 부두의 바닥은 단단했다. 늘 울렁거리는 철판 위만 걷다가 밟은 땅의 감각이 낯설었다. 민우는 짐 가방 하나를 들고 항구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그때, 구급차가 떠난 자리에 떨어져 있는 작은 쓰레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것. 구급 대원들에게 옮겨질 때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민우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구겨진 초콜릿 포장지였다. 민우가 며칠 전, 환기구 구멍으로 몰래 넣어주었던 그 초콜릿의 껍질. 아이는 칠흑 같은 어둠과 추위 속에서, 아버지가 죽어가는 그 공포의 시간 동안, 민우가 건넨 이 작은 단맛의 흔적을 부적처럼 쥐고 버텼던 것이다.
은박지 포장지는 가벼웠다. 무게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0.1g의 가벼움. 하지만 민우의 손바닥 위에서, 등 뒤에 정박해 있는 2만 톤급 거대 선박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민우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펴서 지갑 속에 넣었다. 20억짜리 계산서 대신, 그가 받은 유일한 영수증이었다. 뒤에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우우웅―. 새로운 선장과 선원들을 태운 배는, 민우를 항구에 버려둔 채 다시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의 3년간의 항해는 끝났다. 하지만 땅 위에서의 삶, 그 더 무겁고 가혹한 항해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거대한 쇠사슬이 굉음을 내며 바다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녹슨 쇠사슬이 일으키는 붉은 녹 가루가 공중으로 흩날렸다. 쿵. 수십 톤의 닻이 해저 바닥에 박히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배가 멈췄다. 길고 길었던 항해가, 그리고 지독했던 침묵의 시간이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선장의 말대로였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땅을 밟는 순간부터, 진짜 현실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할 것이다. 민우는 선실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는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차가운 냉동고 속, 참치들 사이에 누워 있는 아버지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들을 대신해 민우가 입을 열어야 할 차례였다.
6
3년 후. 부산 감천항. 오후 2시의 항구는 전쟁터였다.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갠트리 크레인은 쉴 새 없이 쇠상자들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강 주임! 저쪽 B구역 적재 끝난나? 배 들어온디!”
작업 반장의 고함에 민우는 땀에 젖은 안전모를 고쳐 썼다.
“네, 확인했슴다! 검수 끝났슴다!”
민우는 능숙하게 수신호를 보내고 송장을 체크했다. 그의 손에는 더 이상 육분의나 해도 대신, 바코드 스캐너와 볼펜이 들려 있었다. 하얀 제복 대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었고, 파도에 흔들리는 브리지 대신 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뛰어다녔다. 그는 더 이상 항해사가 아니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 업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를 받아주는 선사는 없었다. 그는 바다를 잃고 육지로 유배되었다. 지금은 항만 물류 창고에서 화물을 관리하는 현장직 주임, 그것이 3등 항해사 강민우의 현재였다.
“어이, 강 주임. 밥무라. 저 어데고, 뭐 왔드라.”
경비실 직원이 지나가며 민우에게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넸다. 국제 우편이었다.
발신지: 캄보디아, 프놈펜. 발신인: Amir
민우의 손이 멈췄다. 3년 전, 싱가포르의 밤. 구급차에 실려 가며 자신을 돌아보던 그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민우는 컨테이너 그늘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삐뚤빼뚤한, 한글로 적힌 편지 한 장과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초콜릿 아저씨. 저 아미르예요. 기억나세요? 저는 지금 캄보디아로 돌아왔어요. 고모가 저를 데려다주셨어요.
여기서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생겼어요. 축구도 해요. 겨울이 오면 아직 조금 춥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아빠는… 천국에 계시겠죠?
아저씨가 저를 살려주셨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크면 꼭 한국에 가서 맛있는 초콜릿 사드릴게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함께 남겨요. DM 주세요.
아미르 올림
사진 속의 아이는 더 이상 죽어가던 짐승의 몰골이 아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 그리고 맑게 웃고 있는 소년. 그 뒤로 보이는 푸른 잔디밭과 학교 건물이 비현실적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민우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의 낡은 지갑 속, 가장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구겨진 은박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3년 전 아이가 쥐고 있던 그 초콜릿 포장지였다.
민우는 지갑에서 그 포장지를 꺼내 편지 옆에 나란히 놓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0.1g의 은박지.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한 아이의 인생이 담긴 편지. 지난 3년간 민우는 수도 없이 자문했었다. 그날의 선택이 옳았을까. 하지만 지금.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미르를 보는 순간, 민우의 마음속에 있던 거대한 천칭이 움직였다. 한쪽 접시에는 2만 톤급 화물선과 4천 개의 컨테이너, 그리고 20억 원이라는 돈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접시에는, 이 깃털처럼 가벼운 편지 한 장과 아이의 미소가 놓여 있었다.
기울었다. 압도적인 무게로. 아이의 미소 쪽으로. 민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선장은 감옥에 갔고, 회사는 돈을 잃었지만, 민우는 이 세계를 지켜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바다와 제복뿐이었다.
“강 주임! 뭐하노?! 트럭 온데이, 퍼뜩 올라타라!”
반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편지와 포장지를 소중하게 지갑에 넣었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죄책감도, 후회도 아닌, 단단한 자부심의 무게말이다.
민우는 항구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무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곳이 그립지 않았다. 그는 안전화를 바닥에 힘껏 굴렀다. 쿵. 단단한 땅의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흔들리지 않는 땅. 생명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곳.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적도의 바다를 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