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6-05-20 13:43:40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를 뜻하는 한자어 ‘군불견’(君不見)으로 시작하는 <증도가>(證道歌)는 선불교의 핵심 요지를 담은 대표적인 선종 문헌으로, <신심명>과 함께 선시의 백미로 취급해 오던 것이다. 부처님오신날(5월 24일)을 앞두고 지난 9일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만난 산해 정오 주지 스님은 120년 만에 얻게 된 경허(1849~1912년) 선사 ‘서첩’(1906년)을 꺼내서 보여주며 몹시 들떠 있었다.
그러잖아도 올봄부터 범어사에는 유난히 깊은 의미의 변화들이 겹쳐 있다. 지난 3월 31일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에 이어 지난달 30일 자로 대웅전 벽화 4점이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 예고됐으며(6월 11일 확정 예정), 21일 오전엔 무려 30여 년 만에 ‘범어사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 점안식’을 거행한다. 정오 스님은 이 모든 흐름을 ‘시절인연’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300년 전의 벽화가 오늘 다시 빛을 보는 것도, 삼존불이 새롭게 생명력을 얻는 것도 모두 시절인연입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때가 무르익어 드러나는 일이라는 뜻이다.
■“삼불신앙, 중생의 바람을 담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묻자, 정오 스님은 범어사 대웅전의 ‘삼불(三佛)신앙’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한 분의 부처님만이 아니라, 중생의 다양한 염원을 함께 담았습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왕생, 약사여래는 치유와 건강,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범어사 대웅전은 이러한 삼불신앙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범어사 대웅전 불단 위에는 시간적 구원을 뜻하는 석가·미륵·제화갈라 삼존불상이 앉아 있지만, 법당 내부 벽면(벽화)이나 불상 뒤쪽(후불탱화) 공간에는 동방 약사여래와 서방 아미타여래를 표현해 삼불신앙의 공간적 세계관을 동시에 보완하도록 설계했다. “불상과 벽화를 함께 활용해 삼불신앙을 완성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이번 보물 지정 예고의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범어사 관조 스님이 40여 년 전에 찍은 필름 속 혜가단비도 모습. 범어사 관조 스님이 40여 년 전에 찍은 필름 속 혜가단비도 모습. 이 사진 덕분에 원형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범어사 제공
범어사 대웅전 벽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달마대사와 혜가대사를 그린 장면이다. 혜가가 자기 팔을 끊어 구도의 의지를 보였다는 ‘혜가단비도’는 선불교의 상징적인 이야기다. “왜 300년 전에 범어사에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저는 이것이 범어사가 이미 그때부터 참선 수행 도량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봅니다.”
정오 스님 말씀처럼 달마의 면벽과 혜가의 결단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행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범어사는 선찰대본산, 즉 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입니다. 달마와 혜가가 대웅전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스님은 이 장면이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범어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보물 3종 세트’, 법당의 완성
이번 벽화의 국가지정문화유산 지정 예고는 범어사 문화재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다. 대웅전 건물(정면 3칸 측면 3칸, 1966년 2월 28일 지정)과 삼존불(정식 명칭은 부산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1건 3점, 2007년 9월 18일 지정)이 이미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된 가운데, 벽화까지 더해지며 법당을 구성하는 세 요소가 모두 국가적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건축, 불상, 불화-이 세 요소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 공간입니다. 그 전체가 온전히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정오 스님은 이를 ‘보물 3종 세트의 완성’이라고 표현했다.
보존 방식도 주효했다. “여러 차례 보수 과정에서도 덧칠 없이 원형을 유지해 왔습니다. 선대 스님들이 문화재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지켜온 결과입니다.” 현재 범어사는 정밀 조사와 보존 처리를 병행하며 ‘손대지 않는 보존’ 원칙 아래 관리하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벽화. 범어사 제공
국가지정문화유산이기도 한 범어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30여 년 만의 복장개금불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임시 불상이 놓여 있다. 21일 점안식과 함께 원래 삼존불이 돌아올 예정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점안을 통해 비로소 부처가 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진행되는 대웅전 삼존불의 복장개금불사(腹藏改金佛事, 불교에서 불상을 새롭게 단장하고 그 안에 성물을 모시는 의식)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범어사 대웅전 복장개금불사는 30여 년 만이라고 했다. 지난겨울 복장개금불사를 계획하고 올 1월 초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4월엔 마무리돼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조사 등 보존 처리 기간이 연장되면서 부처님오신날에 가까워졌고, 그 사이 대웅전 벽화가 국가지정문화유산에 지정 예고된 것이다.
“불상은 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형상에 머무릅니다. 복장과 점안을 통해 비로소 생명력이 깃들고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불상 내부에 봉안되는 복장물은 당대 신앙과 시대상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이번 불사는 문화재와 신앙의 의미를 동시에 회복하는 과정이다.
■“금정산의 자연과 범어사는 한 몸”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에도 범어사의 역할이 컸다. 스님은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정오 스님은 “그동안 범어사가 반대한 것이 아니라 소통의 부재였다”고 고백했다. 이어 “2024년 부산시, 금정구청, 범어사 ,시민 환경운동 단체가 MOU를 체결한 게 탄력을 받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강조했다. “물소리 새소리만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사람 소리도 자연에서 나와야 합니다. 시장에서 싸우는 소리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 듯하다.
예로부터 사찰은 오랜 세월 ‘산감’(山監)이라는 소임이 있어 산림을 관리해 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의 자연이 보존될 수 있었다. 국가의 산림녹화 정책과는 또 다른 결로, 스님들의 정성과 수행이 이뤄낸 결실이다.
“범어사가 없는 금정산은 상상할 수 없듯이, 금정산의 자연과 범어사는 한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700여 종에 이르는 멸종위기종과 야생생물 하나하나가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범어사는 숲길 정비와 환경보전 활동을 통해 ‘자연과 공존하는 도량’을 실천하고 있다.
■‘열린 도량’으로 변화하는 불교
오늘의 범어사는 더 이상 폐쇄된 수행 공간이 아니다. 도심 가까이에서 시민과 만나는 열린 도량으로 변화하고 있다. “불교는 이제 ‘의식의 종교’를 넘어 ‘체험의 종교’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찰음식, 템플스테이, 명상, 차담, 그리고 금정산을 잇는 ‘템플레킹’(템플스테이+트레킹)까지 수행은 일상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걸음과 호흡을 맞추다 보면 풍경보다 먼저 자기 마음이 보입니다.”
범어사가 건립하려는 국제템플스테이관과 선명상센터, 충효교육관도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 명상을 통한 치유와 인성교육, 생명 존중의 가치 회복이 핵심이다. “자살률을 낮추고 사람을 살리는 길도 결국 마음을 돌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범어사 대웅전. 범어사 제공
■3년 전 현충 시설 지정 범어사
범어사는 신라시대 호국 도량으로 창건된 이래,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해 온 사실도 직시했다. “과거의 호국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면, 오늘날의 호국은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범어사는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국가보훈부에 의해 공식 현충시설(顯忠施設)로 지정됐다. 세계문화유산이자 불보종찰(佛寶宗刹)인 통도사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최후방에서 사찰 전체를 야전병원(육군 제31야전병원)으로 개방한 이력 등으로 2021년 11월 지정됐다. 범어사는 지방학림 스님들이 주도한 부산·경남 최초의 만세 운동(범어사 학생 의거)과 경내 대성암이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회합과 자금 조달 기지였음이 명확히 인정돼 3년 전(2023년 5월) 현충 시설로 공식 지정됐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핀다”
환경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 공동체의 회복도 정오 스님은 이를 ‘평화를 위한 수행’이라 말한다. 갈등의 근본 원인을 ‘탐욕’에서 찾으며, 해법 또한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정오 스님은 혼란한 시대를 바라보며 ‘세계여일화(世界如一花)’를 강조했다. “세계는 하나의 큰 꽃과 같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때마침 최근 스님 손에 들어온 만해 한용운의 글씨 ‘세계여일화’와 경허 선사(1849~1912년) 서첩(1906년)도 기자에게 처음 공개했다. 이 두 작품은 범어사 성보박물관 기획 전시를 통해 조만간 일반 공개될 예정이다.
인터뷰의 끝에서 정오 스님은 조용히 말을 맺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납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일수록 우리 마음의 연꽃은 더욱 또렷하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범어사의 역할을 이렇게 정리했다. “범어사는 시민의 삶 가까이에서 고통을 덜고, 마음을 쉬게 하는 도량이 되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이 사회에 밝은 등불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한편 정오 스님은 벽파 스님을 은사로 1990년 수계했다. 극락암 호국선원, 서운암 무위선원에서 안거 수행했다. 가야사, 장안사, 고불사 주지를 지냈고, 제15·16대 중앙종회의원과 종립학교관리위원회 종립학교관리위원을 역임했다. 2024년 1월 13대 범어사 주지에 취임해 4년 임기의 절반을 지냈다. 중앙종회의원 당시 전국의 박물관 전수조사를 하면서 문화와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은 범어사 성보박물관 관장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