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톤에 담긴 파란만장했던 그 시절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 정범준

2014-10-04 08:56:12

쇼 프로그램의 대명사 '쇼쇼쇼' 500회 특집 장면. 알렙 제공

1978년 3월 25일 TBC(동양방송)에서 '뿌리' 첫 회가 방영됐다. 3월 26일 2회 '너의 이름은 토비'에서 노예주는 쿤타 킨테에게 미국식 새 이름을 부여한다. "너의 새 이름은 토비야. 너는 이제부터 토비야." 그러자 쿤타 킨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강하게 부정한다. "내 이름은 쿤타……, 쿤타 킨테." 쿤타 킨테는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뿌리'는 미국 ABC TV가 15개월 동안 642만 달러를 투입해 제작한 12시간 분량의 미니시리즈였다. 1977년 에미상의 14개 부문 가운데 9개 부문을 석권했고, 미국 방영 당시 시청률 51%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흑백 TV 시절 방송史를 통해
1956~1980년 시대상 회상

20년 치 편성표 확인하는 등
철저한 고증으로 추억 되살려

우리나라에서도 '뿌리'의 선풍은 대단했다. 방영 기간 8일 동안 평균 시청률이 74%를 넘었다. 다른 방송사들은 파리를 날릴 지경이었다. 시인 박목월은 '뿌리' 방영 하루 전에 타계했는데 방영 시간을 전후해서는 문상객의 발길마저 끊겼다고 한다.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는 흑백 TV와 함께한 1956년부터 1980년까지 시대상을 기록과 추억으로 되살린 책이다. 흑백 TV의 황금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저자는 흑백 TV 시절 한국 방송의 변화 과정을 정리했다. KORCAD(한국 최초 방송국)와 TBC(동양방송)를 중점으로 주요 방송 프로그램과 인물, 방송 일화를 다뤘다. 프로그램에 얽힌 사회상과 시대상을 개인적인 감회까지 버무려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논픽션 전문 저술가인 저자는 구성부터 완성까지 6년 이상 걸려 책을 완성했다. 각종 기록물과 문헌을 뒤지고, 인터뷰와 취재도 병행했다. KORCAD 방송, DBC 방송, TBC 방송 등 20년 치의 TV 편성표를 일일이 다운로드받아 들여다보고, 기사 검색을 위해 눈을 비벼 가며 마이크로필름을 넘겼다고 한다.

저자의 추억 속에 각인된 미녀와 미남 배우는 '정윤희 누나'와 '한진희 아저씨'였다. 1970년대 여성 트로이카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이었고, 남자 쌍두마차는 노주현, 한진희였다고 덧붙인다. 유명 가수들의 산파 역할을 했던 예능 프로그램 '쇼쇼쇼'에 관한 내용도 아련한 향수에 젖어들게 한다.

TV 외화 '600만 불의 사나이'와 '날으는 원더우먼'에 대한 내용도 당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1976년 7월부터 1978년 8월까지 TBC에서 방송된 '600만 불의 사나이'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애초 방영 시간은 월요일 오후 10시 40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빗발치는 요구로 일요일 '골든 아워'인 오후 8시 15분으로 변경됐다. 우주비행사였던 '스티브 오스틴'은 비행기 사고로 부상 당해 몸의 기능을 상실하지만, 축지법을 쓰며 천리안을 가진 슈퍼맨으로 탄생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600만 불의 사나이'가 방영 중이던 1977년 9월 주인공을 흉내 내려던 한 남자 아이가 다리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600만 불의 사나이'는 'TV공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77년 9월 24일 처음으로 방송된 '날으는 원더우먼'은 여자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했던 외화였다. 1977년 12월 한 초등학교 교사가 초등학생 600명을 대상으로 장래 희망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남자 어린이들은 차범근, 600만 불의 사나이, 김일, 김재박 등으로 답했다. 여자 어린이들은 혜은이, 원더우먼, 이에리사, 정윤희 등으로 답했다. TV외화의 인기와 영향력을 보여 준 사례였다.

1970년대 여자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원더우먼'. 부산일보 DB
그러나 TBC는 격변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1979년 10·26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 조치를 내린다. 1980년 11월 12일 TBC의 통폐합이 결정됐다. 11월 30일 TBC는 종일 고별방송을 내보냈다. 고별 특집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마지막으로 TBC TV의 모든 방송이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TBC라디오뿐이었다. 황인용은 당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을 맡고 있었다. 그는 TBC, 정확히는 TBC라디오의 마지막 방송을 한 아나운서다.

"이제 동양방송은 3분 남았습니다. 끝으로 동양라디오의 호출부호를 불러보겠습니다. 여기는 HLKC 639㎑ 동양…방…송입니다."

TBC는 그렇게 마지막 전파를 쏘아 올렸다. 1980년 12월 1일 통합된 KBS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컬러 TV 전파를 쏘아 올렸다. 흑백 TV 시대가 저물고 컬러 TV 시대가 왔다.

저자는 "TBC를 보며 울고 울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며 "책은 이 땅에 TBC가 있었다는 작은 증거이자 추억"이라고 했다. 정범준 지음/알렙/284쪽/1만 4천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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