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6-08-27 17:26:42
동일방직 해고자 모임. 해고 후에도 계속 교류하며 서로를 응원했다. 현암사 제공
YH무역 농성장에서 강제 해산을 당하던 중 사망한 김경숙 열사 2026년 추모제 공지. 현암사 제공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일했다.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지만, 남동생이 공부하기 위해 누나가 희생해야 했다. 먼지가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공장은 환기할 창문조차 없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보였다. 말라죽을 것 같던 삶에 숨통이 트인 건 노동조합을 알고부터다.
일이 끝나고 밤이면 노조 사무실에 공부반(야학)이 열렸다. 거기서 만난 동료들과 “아플 때 쉴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은 일을 하는데 남자보다 월급이 너무 적다” “결혼해도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등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1970년대 ‘공순이’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젊은 여성들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들의 젊음은 착취당했다. 참다못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요구를 전달하면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졌다. 동일방직 여공의 맨몸 투쟁, YH무역의 똥물투척사건, 청계피복노조의 농성 등 한국 노동운동사의 상징적인 사건은 특별한 투사의 싸움이 아니었다.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최소한 인간으로 대우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은 5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난 이야기이다. 지금 그들은 요가를 가르치고, 미싱을 돌리고, 밭을 갈고, 보험 일을 하며 아파트를 청소한다. 누군가는 여전히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집회에 나가고, 누군가는 손주를 돌보며 산다.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할머니들이지만, 저자는 이들에게서 여전히 꺾이지 않는 싸움을 발견한다.
책은 노동조합, 투쟁이라는 거친 말에 가려진 여리고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의 치열한 일상을 따라간다. 흔히 노동운동이라고 말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건장한 남성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1970년대 노동 운동의 중심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장으로 향했던 20대 전후의 어리고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이들의 얼굴은 앳되고 말갛게 웃고 있다. 나훈아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즐겼다고 한다. 공장이 쉬는 날이면 한껏 꾸며 명동에 놀러 가고 싶었단다. 이들이 만든 노조의 요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식사할 시간을 보장하고 환기창을 만들어달라, 생리 휴가가 필요하다, 결혼해도 강제로 해고당하지 않고 일을 계속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회사는 이들의 요구를 철저하게 묵살했다. 노동조합 선거가 있는 날에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도록 여성노동자 기숙사 문을 못질했다. 수도와 전기까지 끊었다. 이웃이 갖다준 음료조차 전달해 주지 않았다. 한여름 여성 노동자들은 탈진했다. 참다못해 파업을 시작했지만, 기다렸다는 듯 경찰의 폭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옷을 벗으면 못 잡아간다’고 소리쳤고, 400여 명의 여성이 작업복을 벗고 맨몸을 드러냈다. 하지만 경찰은 오히려 맨몸의 여성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며 연행해 갔다. 유명한 동일방직 투쟁 사건이다.
YH무역 똥물사건 역시 노조 선거를 무마시키기 위해 투표 준비를 하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렸다.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신민당사를 찾은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자비하게 끌어냈고 그러는 사이 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미쳤고 부마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노조를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출소 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시 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더 작은 공장에서 더 나쁜 조건으로 일했지만, 저자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별 거 아니다” “적을 내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60대 후반, 70대인 이들의 기세는 여전하다. 윤석열 내란 때 매일 탄핵 시위에 참여했고 눈을 맞으며 ‘키세스 투쟁단’에 참여한 할머니도 있다.
부당함에 맞서는 기세는 밀려오는 세월에도 녹슬지 않아 노년의 현재도 여전하다. “그때는 진 싸움처럼 느껴졌지만 결국은 이겼다”라는 이들의 말을 이 시대 모든 여성 노동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변정정희 지음/현암사/228쪽/1만 8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