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6-10-09 09:00:00
오늘은 한글날 제정 100주년이자,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경기도 여주시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주를 목적지로 택한 이유는 세종대왕을 좀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주에는 세종과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를 모신 왕릉인 영릉(英陵)이 있다. 여주는 영릉의 고장답게 오늘날까지도 곳곳에 세종의 이름을 넣어서 기리고 있었다. 간선 도로는 ‘세종로’, 수도권 전철 경강선 역 이름은 ‘세종대왕릉역’, ‘세종초·세종중·세종고’가 있다. 심지어 2021년에는 영릉이 있는 능서면 이름을 ‘세종대왕면’으로 바꿨다. 세종을 만나러 여주에 갔지만 물론 영릉만 보고온 것은 아니다.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은 바로 앞에서 봉분과 석물들을 볼 수 있다.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 생가부터
여주에는 명성황후 생가도 있다. 여주IC에서 5분 거리로 가까워 여주 여행을 시작하기에 적당했다. 훗날 왕비가 되는 민자영은 태어나서 여덟 살 때까지 여주에 살았다. 부친이 타계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감고당(感古堂)에서 지냈다. 감고당은 숙종의 비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다. 1865년 민자영의 꿈에 인현왕후가 나타나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성황후 생가는 단아한 모습으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생가에 걸린 명성황후의 어진을 만났다. 명성황후는 열여섯 살에 왕비가 되어 고종과 함께 개화 정책을 추진한 보기 드문 여장부였다. 하지만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해, 비운의 인물로 역사 속에 남고 말았다. 여성으로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외교력을 발휘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향년 43세로 짧은 삶을 살고 갔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 15개 가운데 첫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라고 밝혔다.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교명도 명성황후가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황학산 수목원의 항아리정원.
여주에 갔으면 황학산 수목원도 빼놓을 수 없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부담 없이 산책하며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황학산 수목원의 매력은 특색화한 14개의 테마정원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인 <양화소록>에 소개된 식물과 괴석을 전시한 ‘양화소록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에 나오는 식물 가꾸는 법을 벽화로 소개했다. 저자 강희안의 어머니가 소헌왕후와 자매이니, 세종의 처조카였다.
황학산 수목원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미로원’도 들러볼 만하다. 서양측백나무를 일정한 높이와 간격으로 촘촘하게 심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배치했다. 방향을 잃고 헤매다 출구를 찾아가도록 만들어서 미로원이다. 나도 모르게 길을 잃었지만, 그게 이곳의 재미였다. ‘항아리 정원’은 전통 항아리나 도자기에 수생식물과 분재를 심어서 조성했다. 여주는 국내 도자기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도자기의 고장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목원이 아니라, 여주만의 지역성을 정원에 잘 표현한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마침 메밀꽃도 지금 한창이다.
■신륵사 앞 황포돛배 지나가고
다음 일정은 남한강을 바로 접한 신륵사였다. 부산 기장 바닷가에 용궁사가 있다면, 여주 남한강변에는 신륵사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고,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여기서 입적했다. 영릉이 1469년(예종 1년) 여주로 이장되며 신륵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왕실이 신륵사를 영릉의 능참사찰로 정하며 1472년부터 대규모 중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치며 사찰의 규모는 커지고 조선 전기의 왕실 건축 양식이 반영됐다. 박헌영의 아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원경 스님이 1987년부터 신륵사 주지를 지냈다. 당시 신륵사는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찾아오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여주 남한강변 신륵사는 영릉의 능참사찰이었다.
신륵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 넘은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굵은 가지 틈으로 보이는 작은 가지 모양이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생겼다.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이 나투신 것이라고 해석하며 이 은행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은행나무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이 꽤 운치가 있다. 조선 시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황포돛배 유람선도 유유히 지나간다. 여주시에서 운영하는 황포돛배의 이름도 ‘세종대왕호’다.
조선 시대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유람선을 운행한다.
은행나무 옆 신륵사 다층전탑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보물이다. 남한강 나루터 방향에 솟아 있어 배를 타고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담한 규모의 신륵사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을 8점이나 보유한 문화재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신륵사 옆에는 여주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남한강 출렁다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신륵사 관광지와 반대편의 금은모래 관광지구를 연결하는 보행 전용 현수교다. 낮에는 강바람을 맞으며 주변 풍경을 즐기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 및 미디어파사드 야경을 감상할 수 있어 산책 코스로 인기가 높다. 인근의 여주 도예 단지에서는 매년 여주 도자기 축제가 개최된다. 경기도자비엔날레는 11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남한강 출렁다리는 여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위대한 스승, 세종을 만나다
우리나라에 ‘신들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 왕릉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남아 있는 조선 왕릉 40기(북한 소재한 2기 제외)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찾아보니 조선 왕릉은 압도적으로 경기도에 많다. 경기도 32개, 서울 8개이다. 왕릉은 도성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만들어야 했다. <경국대전>에는 능역을 도성에서 10리(4㎞) 밖, 100리 이내에 두는 원칙이 제시돼 있다. 왕실이 제사를 지내고 참배해야 했기 때문에 한양에서 접근하기 좋은 거리가 중요했다.
영릉까지 올라가는 길에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세종을 모신 영릉(英陵)은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이다.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천하의 대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을 여기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최소 100년은 연장되었다는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영릉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먼저 훈민정음을 들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만났다. 이렇게 쉽고 편한 한글을 쓰고 있음에 잠깐 감사 인사를 드렸다.
간의, 소간의, 혼천의, 혼상,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자격루, 옥루, 측우기, 수표…. 세종 때 만들어진 과학·천문 기구들이 실물 또는 고증 복원품으로 나와 있다. 기능성은 물론이고 예술성까지 뛰어나 조각품이자 공예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장영실을 비롯한 조선 최고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작품이다. 장영실은 원나라 출신 외국인 아버지와 관기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비였다. 장영실은 세종의 뜻에 따라 명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조선 실정에 맞는 발명품들을 만들어 냈다.
영릉 주변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다.
조선 왕릉을 제대로 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보호를 위해 멀찌감치 떨어진 정자각에서 보도록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릉은 능침(능 바로 앞)까지 올라가 봉분과 석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능침 위에 올라가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 봉분, 그리고 수호하는 석물들을 지근거리에서 만났다. 뒤돌아보니 주변을 에워싼 울창한 소나무 숲과 탁 트인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래서 명당이라고 하나 싶었다.
여주에는 또 하나의 영릉이 있다. 효종이 잠든 영릉(寧陵)이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 생활을 했다. 왕위에 올라 청나라를 향해 북벌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묶여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영조,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해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의 숲길’을 따라 효종이 잠든 영릉(寧陵)까지 700m 남짓 좀 더 걸었다.
돌아와 세종에 대해 좀 더 찾아보게 되었다. 세종은 1426년 노비 출산 휴가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관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줬다. 1430년에는 출산 전 한 달을 추가해 130일의 휴가를 보장했다. 1434년에는 아이를 낳은 여종의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어 산모를 돌보게 했다. 배우자 출산 휴가가 이미 600년 전에 이 땅에 있었다. 세종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말했다. 이런 선각자가 세상에 또 있었나 싶다. 세종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알고 보니 스승의 날 5월 15일도 세종의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에서 유래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