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2025-01-13 15:10:18
“주민협의회 활동은 여기까지지만, 비슷한 위기가 발생하면 우리가 또 뭉쳐야죠.”
구덕운동장 아파트 건립 반대 주민협의회가 시민운동을 통해 난개발을 막고 도심 공원을 지켜낸 경험을 아카이브화한 <도시를 지킨 힘>(효민디앤피)이 출간됐다. 부산 서구 구덕운동장 복합재개발 사업은 당초 국토교통부 도시재생혁신지구 공모사업 신청 후보지 중 최우선지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8월 발표 결과 탈락해 아파트 건설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책은 주민협의회가 국토교통부와 부산시, 서구청 같은 골리앗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도시를 지킨 방법과 참고자료를 담은 시민운동 백서로, ‘시민운동의 교과서’라고 부를 만하다.
책은 1부 구덕운동장 재개발 논란 점화, 2부 주민 자치 활동 태동기, 3부 구덕운동장 시민운동 확산, 4부 공공재 사유화 공론화, 5부 구덕운동장 시민운동 전국 확산, 6부 민주주의의 힘 주민소환제, 7부 시민들의 목소리 등 총 216쪽으로 구성됐다. 그동안의 경과는 물론이고 관련 사진, 표물, 포스터, 가상 조감도, 집회 시나리오, 보도자료, 신문과 방송 기사까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집대성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주민협의회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 결과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민운동은 온라인에서 시작했다. 서구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서다방’ 회원들은 지난해 1월 자발적으로 구덕운동장 재개발에 대한 찬반 설문조사를 시작한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온라인에서 모인 이들은 오프라인 주민 홍보 캠페인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반려인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체육공원 일대를 걸으며 SNS 인증샷을 올리는 ‘구덕댕댕 밤산책’처럼 눈길을 끄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서구 최대 카카오톡 채널인 ‘우리는 하나다! 대신동♡’도 부산 항일학생운동 알리기와 3·1운동 행사를 이끌어 오던 임병율 씨를 중심으로 주민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러자 구덕운동장을 지키기 위한 아이디어가 단톡방 채팅창을 통해 쏟아졌다. 주민협의회 인스타그램에서는 영화 ‘파묘’를 패러디한 ‘파면’과 민희진 신드롬에 현실을 빗대 ‘맞다이로 들어와 구덕재개발’이라는 재치 있는 문구를 넣은 포스터가 화제를 낳았다. 웹툰 형식의 ‘너의 구덕은’이라는 카드뉴스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아파트 난립 가상 조감도를 만들어 큰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주민협의회 회원들의 재능 기부로 만든 창작물은 다른 커뮤니티 공유와 언론사 보도로 이어져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시민운동이 확산되면서 언론 보도도 봇물을 이뤘다. 지난해 6월부터 8월까지 보도된 신문 기사는 건수가 가장 많았던 <부산일보> 32건을 비롯해 총 306건, 방송 보도는 78건에 달했다. 이 책 말미에는 보도자료 작성법 및 언론사 기자 접촉 방법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시민운동의 하이라이트는 지난해 8월 7일에 열린 구덕운동장 시민촛불집회였다. 구덕운동장 앞 광장에 모인 주민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부산시장과 서구청장의 결단을 촉구했다. 책에는 어깨띠나 현수막 작성 요령 같은 깨알 정보도 담겼다.
이 책을 엮은 주민협의회 김성일 씨는 “초창기부터 기록을 잘 남기자고 서로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구덕운동장을 지켰다는 사실만 알고 그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기부로 만들어진 이 책이 시민운동의 길잡이가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도시를 지킨 힘>은 오프라인 서점은 남포문고와 영광도서에서, 온라인 서점에서는 전자출판을 통해 15일부터 판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