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걷기는 아픈 사람 운동? 엘리트 러너도 챙기는 훈련입니다” [맨발에 산다] ⑤

[부산 PTR 이한기 감독]

마라톤 풀코스 서브스리 20여 회 기록
7회는 맨발로 달성한 ‘한국의 아베베’

발바닥에 아치 없는 평발에 부상 고통
맨발 훈련으로 이겨 내고 다시 길 위에

산과 들 질주 트레일 러닝 지도자 변신
“맨발 100km 언더텐 기록 남기고 싶어”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2025-01-16 07:40:00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이 테이블 위에 자신의 맨발을 올려 보여 주고 있다. 발바닥 아치가 없는 평발인 그는 발가락 훈련을 통해 맨발 강자로 거듭났다. 김희돈 기자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이 테이블 위에 자신의 맨발을 올려 보여 주고 있다. 발바닥 아치가 없는 평발인 그는 발가락 훈련을 통해 맨발 강자로 거듭났다. 김희돈 기자

"엘리트 마라토너들도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훈련 과정 중 하나가 바로 맨발걷기입니다. 맨발걷기가 아픈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많은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트레일 러닝 클럽인 부산 파워트레일러닝(PTR) 이한기(61) 감독은 맨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산길이나 숲길 등 포장되지 않은 자연 길을 질주하는 트레일 러닝에 푹 빠져 지도자까지 하는 이 감독이지만, 사실 그는 ‘맨발 마라토너’로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원조 맨발인 중 한 명이다.

이 감독이 처음 마라톤에 도전한 건 2004년 무렵. 당시까지 부산진구의 한 사회인 축구 동호회에 소속돼 있던 그는 탁월한 순발력과 스피드를 앞세워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맹활약했다. 워낙 잘 달리는 그를 보고 주변에선 마라톤해도 되겠다고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그는 덜컥 광안대교 위를 질주하는 부산바다하프마라톤대회 출전을 감행했다. 강한 지구력이 요구되는 장거리 달리기에 대한 정보와 준비 없이 나선 대회에서 그는 속된 말로 숨이 차 죽을 뻔했다.

하지만 마라톤 하프 코스 첫 도전에서 1시간 40분대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얻은 그는 곧이어 출전한 대회에서 1시간 30분대를 찍으며 기록을 단축하는 재미에 깊게 발을 들였다. 이왕 시작한 마라톤을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에 알음알음 부산체고 지도자를 찾아가 두 달간 전문적인 코칭을 받기도 했다. 물론 그의 발에는 마라톤화가 신겨져 있었다.

마라톤에 빠져 한동안 축구를 멀리하던 그가 어쩌다 한번 나선 축구 경기에서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 2011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부상 회복을 위해 축구화를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지면에 닿는 맨발의 감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이한기 감독. 트레일 러닝 클럽을 지도하고 있는 그는 훈련 전후로 맨발걷기를 하며 힘을 키우고 있다. 이한기 제공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이한기 감독. 트레일 러닝 클럽을 지도하고 있는 그는 훈련 전후로 맨발걷기를 하며 힘을 키우고 있다. 이한기 제공

타고난 운동 마니아인 그는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하자마자 다시 달리기에 나섰다. 그때부턴 이전과 달리 신발을 벗어 던진 맨발 차림이었다. 맨발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자 언론은 그를 두고 ‘맨발의 마라토너’니 ‘한국의 아베베’니 큰 관심을 보였다. 아베베는 맨발로 나선 로마올림픽(1960년)과 도쿄올림픽(1964) 마라톤에서 연거푸 우승한 에티오피아 출신 전설의 마라토너.

이 감독 역시 2012년 서울국제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58분 31초 만에 주파해 서브스리를 달성했다. 서브스리(sub-3)는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것을 일컫는데,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겐 꿈의 기록으로 불린다. 이 감독은 맨발로 이 기록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부산일보> 주최 부산바다하프마라톤대회에서도 맨발로 달려 당당히 3위(1시간 23분 45초)로 시상대에 오르며 또 한 번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은 2012년 <부산일보> 주최로 열린 부산바다하프마라톤대회에 맨발로 나서 당당히 3위를 차지하며 '맨발 마라토너'로서 명성을 얻었다. 부산일보DB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은 2012년 <부산일보> 주최로 열린 부산바다하프마라톤대회에 맨발로 나서 당당히 3위를 차지하며 '맨발 마라토너'로서 명성을 얻었다. 부산일보DB

맨발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한 그의 질주엔 거침이 없었다. 2004년 이후 10여 년간 전국의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 40대부터 50대 중반까지 중년을 거의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30회에 달하는 풀코스 완주 중 서브스리도 20회 이상 달성했다. 그중 7회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달려 얻은 타이틀이다. 첨단 스포츠 과학이 접목된 전문 마라톤화를 신고도 정복하기 쉽지 않은 서브스리 고지를 그는 어떻게 맨발로 올랐을까. 그것도 일곱 차례나.

“신발을 신고 달리는 전문 러너들에게도 맨발 관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특히 맨발걷기를 통해 발 부상을 극복했기에 더더욱 중요성을 잘 알죠.” 이 감독이 맨발로 마라톤 도전에 나선 것도 부상 회복 과정에서 단련한 맨발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맨발로 로드(아스팔트)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도 끄떡없을 만큼 관리가 잘 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이 손가락을 이용해 발가락 근력을 강화하는 밴딩 요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감독은 이 방법을 통해 평발과 발목 부상이라는 난관을 딛고 마라토너로 거듭날 수 있었다. 김희돈 기자 부산 PTR 이한기 감독이 손가락을 이용해 발가락 근력을 강화하는 밴딩 요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감독은 이 방법을 통해 평발과 발목 부상이라는 난관을 딛고 마라토너로 거듭날 수 있었다. 김희돈 기자

이 감독은 사실 평발이다. 발바닥에 가해지는 하중을 지탱하고 분산시키는 아치(오목하게 들어간 부분)가 전혀 없는 그로서는 발가락에 그 기능을 나눠 맡기기 위해 남모를 노력을 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고무 밴드를 각 발가락에 두른 뒤 몸쪽으로 잡아당겨 저항력을 키우는 밴딩 운동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트레일 러닝 클럽을 지도하고 있는 요즘도 맨발에 대한 철학엔 변함이 없다. 곧 전국 곳곳에서 트레일 러닝 대회가 열리는 시즌이 다가온다. 아스팔트를 벗어나 산과 들을 종횡무진 내달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 PTR은 한겨울에도 주중 하루(수요일)와 주말 이틀 등 매주 세 차례 기초훈련과 실전훈련을 반복하는 고된 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도 그의 맨발걷기는 빠지지 않는다. “맨발 단련은 험한 길을 잘 달리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사전 준비 과정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잘 달린 후 정상 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에도 꼭 필요한 절차이고요. 엘리트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발 마라토너로 이름을 알린 부산 PTR 이한기 감독. 그는 요즘 트레일 러닝에 푹 빠져 산과 들을 질주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맨발 마라토너로 이름을 알린 부산 PTR 이한기 감독. 그는 요즘 트레일 러닝에 푹 빠져 산과 들을 질주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맨발 마라토너로서 이름을 알린 이 감독이지만, 스스로 다짐했던 ‘맨발 풀코스 서브스리 10회 달성’이라는 목표는 접어야 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후 자연스럽게 다가온 근력 부족을 실감하며 7회에서 멈췄다. 다양한 지형을 달리며 전신 근력을 보강할 수 있는 트레일 러닝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전이 일상인 그의 삶에 새 목표는 없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맨발로 쉬지 않고 100km를 주파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감독은 “세계 기네스 기록(8시간 42분 11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언더텐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의욕을 밝혔다. 언더텐(under-10)은 100km를 10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으로, 마라톤 풀코스 서브스리에 준하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감독은 후원 등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되면 즉각 도전에 나설 각오라고 말했다. 이한기의 ‘맨발 인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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