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 2025-02-20 17:22:36
배우 박정민은 자신의 데뷔작 ‘파수꾼’(2011)을 가리켜 ‘은인 같은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박정민이라는 걸출한 배우가 탄생하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 준 이 작품은 저예산 독립영화였습니다.
이처럼 독립·예술영화는 영화계가 굴러가게 하는 근간이 됩니다. 잘 만든 독립영화는 거대 자본을 투자받은 웬만한 상업영화보다 훨씬 나은 완성도와 작품성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이런 작품들을 평소에 만나 보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어렵사리 극장에서 개봉해도 상영관이 많지 않은 데다 홍보가 어려운 탓에 보석 같은 작품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난 7일부터 시작한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특별전’이 귀중한 이유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독립·예술영화 공공 온라인 플랫폼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kr)에 접속해 회원가입만 하면 최근 영화계에서 관심을 받은 국내 독립영화 수십 편을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행사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진행 중인데, 전반부는 지난 16일까지였고 후반부 상영은 오는 26일까지입니다. 수십 개의 작품 중 기자가 재미있게 감상한 수작 두 편 ‘해야 할 일’(2024)과 ‘장손’(2024)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노동영화 ‘해야 할 일’
한영중공업 입사 4년 차 대리인 강준희(장성범)는 인사팀으로 발령받자마자 사내에서 150명을 정리하라는 구조조정 지시를 받습니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인사팀도 결국 시키면 해야 하는 직장인들입니다. 준희를 포함한 인사팀 직원들은 최대한 공정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를 선발하려 합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회사 입맛대로 해고 대상자가 정해지고, 준희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2023년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과 최우수연기상(김도영)을 거머쥔 이 작품은 스토리도 연출도 지독하게 현실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장편 극영화지만 사실성이 다큐멘터리 못지않습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독립영화 특별전 전반부에 공개된 작품이라 현재는 ‘인디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지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인 ‘웨이브’ 등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중공업 구조조정 소식은 노사 간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구조조정을 직접 실행해야 하는 노동자의 관점으로 진행됩니다.
주인공인 준희는 해고 대상자를 정리하기 위한 블랙리스트를 만들면서도 고통을 분담해 구조조정을 최대한 피할 수는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이미 어지간한 조치는 다 취해 본 상황이고, 더 이상 월급을 깎을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 대출로 집을 구매한 준희도 처지가 다르진 않습니다.
사내에선 당연히 해고 대상자들의 반발이 입니다. 이전 부서 동료들도 준희를 찾아가 껄끄러운 말들을 합니다. 노조의 개입과 강경파 직원들의 항의 등 불편한 상황들이 인사팀을 괴롭게 만듭니다. 물론 무엇보다 괴로운 건 해고 대상자들입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잔혹한 칼바람 앞에 등불처럼 연약한 노동자들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근로자 대표를 뽑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 ‘사내정치’는 여느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법한 문제입니다. 결국 그놈의 사내정치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까지 무너뜨리자 소신파 준희는 좌절합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괴롭게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하는 가운데 ‘갑’인 사측은 한발 뒤에 물러선 채 상황을 방관합니다. 결국 약자와 약자끼리 갈등을 빚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영화 캐릭터와 대사, 연기도 아주 사실적입니다. 직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인사팀장 정규훈(김도영), 그런 팀장과 살벌하게 설전을 벌이는 부장 배호근(김영웅), 전문대학 출신이라는 뜻인 ‘전졸’ 딱지가 붙은 대리 손경연(장리우) 등 조연들이 각자 맡은 배역에 잘 어울리고 연기도 수준급입니다.
구조조정 실행의 실무를 맡은 준희 역시 감정을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입니다. 일머리가 좋아 늘 칭찬을 듣지만, 준희의 밝은 표정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화의 색감과 톤처럼 준희의 표정은 늘 어둡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압박감에 시달리는 준희와 인사팀 직원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한국 노동 환경의 모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또 직장인이라면 가슴에 팍팍 꽂힐 수밖에 없는 대사 등 공감이 가는 요소가 많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몰입을 돕는 담담한 연출은 화룡점정입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경험’ 덕입니다. 연출을 맡은 박홍준 감독은 실제로 부산의 한 조선사 인사팀에서 일할 때 영화 속 상황과 유사한 일을 겪으며 갖게 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화는 2023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장성범)과 한국영화감독조합 플러스엠상을 받았고, 같은 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장편경쟁부문 최우수작품상과 독립스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묻는 영화 ‘장손’
오는 26일까지인 독립영화 특별전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장손’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오로라미디어상과 KBS독립영화상,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한국 대가족 3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3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이 작품은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경상북도 시골 마을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대가족 이야기를 다룹니다. 언뜻 보기엔 별 흥미가 가지 않는 소재일 수 있지만, 가족 간의 연대와 갈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사실적으로 풀어내 누구나 공감하며 볼 수 있습니다.
이 집안의 최고 어른인 승필(우상전)과 말녀(손숙)는 맏딸인 혜숙(차미경), 아들 태근(오만석), 며느리 수희(안민영), 손녀 미화(김시은), 손녀사위 재호(강태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이 집안 어른들은 제사를 중요시합니다. 딸과 손녀들은 제사를 그만 지내길 원하지만, 까탈스러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전통을 고집합니다.
이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도 장손인 성진(강승호)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무명 배우로 힘겹게 살아가는 성진은 제사를 지키려고 고향 집에 옵니다. 이어 성진의 고모인 옥자(정재은)와 고모부 동우(서현철)도 집에 오면서 오늘날 보기 드문 화목한 대가족의 화합이 펼쳐집니다. 남편의 귀를 파 주는 아내, 아내에게 파스를 붙여 주는 남편 등 가족애가 샘솟는 장면들이 서정적인 음악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친척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은근한 긴장감도 감돕니다. 배우 일을 두고 ‘딴따라’라고 부르는 아빠 태근에게 정색할 정도로 꿈에 진심인 성진에게 가업인 두부 공장을 이어받으라는 압박이 지속됩니다.
‘빨갱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보수 중에 보수인 할아버지 승필은 완전히 ‘옛날 사람’입니다. ‘결혼은 언제 하느냐’ ‘독자니까 아들 셋은 낳아야 한다’ 등 성진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성진은 그런 할아버지에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다. 할아버지는 돈이 많냐’고 물어보는 당돌한 장손입니다.
이 집안의 문제는 대부분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에서 비롯됩니다. 두부 만드는 일을 넘겨받은 아들 태근에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등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참다못한 태근이 승필에게 대드는 와중에 성진은 ‘두부 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합니다.
그 밖의 사소한 일들로 가족 간 갈등이 조금씩 커지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이별이 찾아옵니다. 이를 계기로 가족은 다시 뭉치는 듯하지만, 불화와 불신이 싹트는 사건이 발생해 마찰이 갈수록 커집니다.
‘장손’은 독립영화 특유의 느린 호흡으로 전개되지만 지루하지 않고 흡입력이 있습니다. 10명의 대가족이 등장하지만 각 인물의 관계성을 적절히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섬세한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극이 흐를수록 각자 품고 있는 사연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도 재치 있습니다. 그중엔 근현대사가 각 세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에게 미치는 아픔도 녹아 있습니다. 현실적인 블랙코미디를 활용한 유머 포인트 역시 재치 넘칩니다. 그러나 가족의 오래된 비밀이 드러나는 후반부는 상당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우상전, 손숙 등 원로 배우들을 비롯한 주조연들의 연기도 감상 포인트입니다. 서현철과 같은 낯익은 배우들은 관록을 과시하고, 주인공을 맡은 신예배우 강승호의 연기 역시 눈길을 끕니다.
영화는 대단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입니다. 핵가족화에 따라 점점 사라져가는 한국 고유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겐 남 얘기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무섭도록 사실적인 리얼리즘 영화일 것입니다.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캐릭터들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저마다 서로에게 받은 상처나 아픔을 묻은 채 살아가던 가족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대립하는 사연은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친척 간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도 참으로 현실적이어서 공감이 갑니다.
섬세한 촬영을 활용한 영상미도 이 작품만의 매력입니다. 넉넉한 길이의 쇼트들에 경북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계절별로 담았습니다. 롱쇼트로 촬영한 마지막 장면은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진근 촬영감독은 이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K촬영상을 받았습니다.
오정민 감독은 한 가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제작기간을 6개월로 늘리고 여름, 가을, 겨울의 세 계절을 작품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 작품도 ‘해야 할 일’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녹여냈습니다.
독립영화 특별전에선 ‘장손’ 외에도 다양한 수작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후반부에 공개된 작품 중엔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등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딸에 대하여’(2024), 토론토국제영화제 넷팩 심사위원 특별언급을 받은 ‘미망’(2024),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인 여공의 노래’ 등에 관심이 쏠립니다.
또 로맨스와 SF가 결합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땅거미’ 등 주목할 만한 단편영화도 많습니다.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마음껏 골라 볼 것을 권합니다. 참고로 특별전 전반부 마지막 상영일인 지난 16일 오후에는 스트리밍 서비스 오류가 발생할 정도로 접속자가 몰렸다고 하니 관심 있는 작품은 미리 미리 감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