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녀들’ ‘히트맨2’ ‘브로큰’ ‘스트리밍’…. 올해 현재까지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들입니다. 3월 개봉한 ‘승부’를 제외하면 관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을 찾기 힘듭니다. 지난 16일 개봉한 ‘야당’은 이 부진한 흐름을 끊을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요. 극장에서 직접 관람해 봤습니다.
마약, 검찰, 브로커, 형사…. 영화 ‘야당’의 소재입니다. 익숙하다 못해 물리는 재료입니다. 왠지 뻔하디 뻔한, 그저 그런 작품일 것 같다는 선입견이 생깁니다. 하지만 실력 좋은 셰프는 늘 먹던 재료로도 훌륭한 맛을 내죠. ‘야당’ 역시 어딘가 익숙하긴 하지만, 볼 맛이 나는 작품입니다.
영화 제목인 ‘야당’은 수사 기관에 마약 범죄 관련 정보를 알려주고 돈을 받는 브로커를 가리키는 은어입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이강수(강하늘)는 검사 구관희(유해진)로부터 감형을 해줄 테니 야당 일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어차피 앞날이 막막했던 강수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준 관희의 야당 노릇을 합니다. 출세 욕망이 강한 관희는 강수 덕에 실적을 쌓아 승진을 거듭합니다. 잘 나가는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며 호의호식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잘 나갈수록 피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약수사대 형사 오상재(박해준)는 마약사범들 사이에서 유명한 베테랑이지만, 강수의 야당질이 시작된 이후로 굵직한 실적들을 번번이 빼앗깁니다. 세 사람의 관계는 유력한 대선 후보의 아들인 조훈(류경수)이 마약 사건에 연루되면서 꼬이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킬링타임용치고 스토리가 짜임새 있습니다. 최근 한국 영화들이 혹평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부실한 시나리오였습니다. 사건 흐름이나 인물의 동기에 개연성이 부족해 몰입을 크게 해치는가 하면, 지나치게 뻔하고 단조로워 지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야당’은 달랐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과 결말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지만, 자세한 과정에선 변주를 적절히 줘 예상을 깨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우연이나 조력자에 의존해 손쉽게 위기를 타개하지 않는 점도 좋았습니다. 일이 풀리겠다 싶을 때 다른 위기가 찾아와 등장인물들을 압박합니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난이도를 적절히 조절해 클리어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인물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어 개연성이 약간 떨어지기도 했지만, 몰입을 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개연성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동맹과 야합, 배신 등 범죄영화 단골 소재인 등장 인물들 간 수싸움이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캐릭터마다 동기가 있어 이들이 손을 잡거나 뒤통수를 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전개와 편집도 장점입니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리듬감 있는 편집으로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액션의 완성도와 비중도 적당했습니다.
정치 검찰, 뒷거래 등 현실 비판적인 요소도 스토리와 대사를 통해 자연스레 담았습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오마주한 장면은 극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여러모로 오락 영화로써 갖춰야 할 장르적 재미에 충실했습니다. 다만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인 만큼 다소 선정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마약 범죄 현장을 묘사한 장면의 경우 신체 노출 수위가 아주 높은 건 아니지만, 가족과 함께 보기엔 조금 민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제외하면 크게 불편하거나 거슬릴 만한 대목은 없습니다.
주연들의 연기는 압권이었습니다. 유해진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음흉한 정치 검사 역할에 잘 어울렸습니다. 극 초반에는 기시감이 드는 전형적인 연기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후반부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연기를 펼쳐 ‘역시 유해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해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저는 가능하면 인물을 전형적으로 그리지 않으려 한다”고 했는데, 실제 극 중 관희 캐릭터는 권력에 취한 부패 검사와 ‘찌질’한 보통 사람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강하늘의 연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강하늘은 제작발표회에서 강수 캐릭터에 대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살아간다”며 “너무 선하지도 너무 악랄하지도 않은” 인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강수는 야당으로 활약할 때는 소위 ‘양아치’스러운 면을 보이지만, ‘선’을 넘지는 않는 인물입니다. 불의를 보고 정의구현에 나서는 의협심도 있습니다.
사실 강하늘 역시 초반 연기는 살짝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배우에 대한 이미지 탓인지, ‘양아치’스러운 연기가 착 달라붙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반부를 거치면서는 몰입할 수밖에 없는 열연을 보여줬습니다. 마약 중독자, 재활을 거쳐 후유증을 겪는 연기까지 소화해냈습니다. 관객들이 강수의 감정선에 이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조연급 캐릭터들도 개성이 너무 강하지 않아 극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고, 각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사건에 휘말린 여성 배우 엄수진 역을 맡은 신예 채원빈이 눈에 띄었고, 박해준과 류경수도 각각 열정 넘치는 형사와 안하무인 대선 후보 아들 캐릭터에 들어 맞았습니다. 조연 캐릭터 활용이 조금 아쉽다는 평가도 나오는데, 존재감이나 역할이 더 컸다면 오히려 극이 산만해졌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연출은 ‘나의 결혼원정기’(2005), ‘특수본’(2011) 등을 만든 황병국 감독이 맡았습니다. 황 감독은 ‘부당거래’(2010)의 국선 변호인 등 다수 작품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황 감독은 이번 작품에 대해 “마약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이야기하면서 영화 보는 내내 숨 쉴 틈 없이 몰입하고, 끝나면 통쾌함이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경쾌하고 속도감 있고 통쾌하게 전한 점이 관전 포인트”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설명대로 ‘야당’은 최근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선 가장 볼 만한 오락 영화였습니다.
제 점수는요~: 80점(100점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