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9-09 09:00:00
“보물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으니, 한국의 보물들이 쓰레기로 사라지고 있죠. 안타까워서 다시 나섰습니다.”
조선 유학자 142명의 간찰을 번역해 <간찰, 붓길 따라 인연 따라>라는 책을 출간한 고문헌 연구가 석한남 씨. 그는 옛 문서와 문집, 전각, 서화 등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보물이 쓰레기 취급받는 현실을 토로했다.
이번 책은 이상준 더프리마 회장이 모은 간찰첩과 간찰을 번역한 것이다. 이 회장은 미술계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컬렉터인데, 간찰을 비롯한 옛 글씨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석 씨는 “간찰은 조선 선비의 정신 세계와 생활 양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라며 “우리 조상들의 친필을 엿볼 귀한 기회가 된다”라고 강조했다.
책에 실린 선비들의 문체는 간결하고 깍듯하게 예절을 갖추고 있다. 제자 혹은 아이에게 보낸 글에도 존대할 정도이며 위아래로 몇 살 차이가 있어도 친구가 되기도 한다. 글 한 자 한 자에 정중하면서 배려가 느껴진다. 인터넷 서점의 독자 후기에 “책을 읽고 난 후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굉장히 정중하게 말하게 된다”라는 글이 많이 보일 정도다.
부모와 가족에게 전하는 애틋한 심정, 기근으로 인한 백성의 피해를 걱정하는 관리의 한탄, 사모하는 마음을 시와 빗댄 낭만까지 석 씨의 해석으로 옛 편지는 새롭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모든 글이 다 소중하지만, 석 씨는 홍희와 남구만의 간찰이 유난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고 한다.
앞서 석 씨는 지난해 <건축가의 서재>라는 책을 냈다. 부산 출신 유명 건축가 김원 씨가 가진 서화 작품의 그림과 글씨(한자)를 일일이 해석한 책이다. 이 책에 앞서 김 건축가의 전각 작품을 소개한 <전각, 세상을 담다>라는 책도 낸 적이 있고, 이 책은 완판될 만큼 많이 이들이 좋아했다.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을 끝내고 외국 금융회사에 취업한 후 지점장까지 지낸 금융인이다. 30대 후반, 서울 인사동 인근에서 근무할 때 우연히 본 초서 글씨에 반해 액자를 샀다. 그런데 액자에 쓴 글씨의 뜻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에게 찾아갔지만 역시 헛걸음이었다.
결국 “내가 직접 공부해야겠다”라고 나섰다. 직장인이었기에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매일 책을 파고들었다. 외국 출장을 갈 때도 공부 거리를 가져갈 정도로 열심히 했고, 15년 정도 세월이 쌓이니 모든 문체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박물관과 기관의 잘못된 해석이 보였고 수정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니 어느새 그 기관에서 옛 문헌에 대한 탈초,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학 박물관이 특강을 부탁했고, 대학 연구자와 학자들도 배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결과들을 모아 꾸준히 책으로 냈고 20여 권이 된다. 보물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니,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진 귀한 문헌과 글씨들이 모였다. 나라가 보관해야 할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작품 168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아직도 석 씨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고문헌이 있지만, 대학 연구소와 박물관조차 이젠 예산을 이유로 탈초, 번역하는 걸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다산 정약용의 책마저 고물상의 수레에서 나왔다고 한다.
석 씨는 “선조들이 남긴 귀한 문헌들이 폐지가 돼 버릴 판”이라고 연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