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었는데 허술한 ‘탈주’…‘중박’ 영화 탄생 쉽지 않네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2024-07-12 07:00:00

최근 한국 상업 영화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 현상입니다. 소위 말하는 ‘중박’ 영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소수의 대작이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의 개봉작이 흥행에 실패해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합니다.

올해 상반기에도 ‘범죄도시4’와 ‘파묘’ 두 편이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지만, 그 뒤를 잇는 3위는 170만 관객의 ‘시민덕희’입니다. 흥행 성적 2위와 3위의 간격이 약 1000만 명인 겁니다.

이런 가운데 올여름 개봉하는 중예산 영화들의 성적에 귀추가 주목됩니다. 앞서 지난달 21일 개봉한 제작비 140억 원의 ‘하이재킹’은 입소문을 타며 150만 관객을 넘었지만 손익분기점 달성을 위해 필요한 300만 명에는 한참 못 미치고 있습니다. 같은 달 26일 개봉한 제작비 49억 원의 ‘핸섬가이즈’는 호평 속에 손익분기점인 100만 명 초반대 관객을 넘어섰습니다.

뒤이어 지난 3일 개봉한 ‘탈주’는 순제작비가 80억 원인데, 개봉 일주일이 넘은 11일 현재 관객수가 약 94만 명으로 손익분기(약 200만 관객)를 넘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탈주’ 주연 배우들은 ‘영화가 재미없으면 환불해 주겠다’고 약속했을 정도로 자신감을 드러냈는데요. 과연 그 정도로 흥미진진한 영화일지, ‘중박’에 성공할 수 있을지 궁금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2017년 11월, 한 북한군 병사가 판문점을 넘어 귀순한 사건 기억하시나요? 이 사건은 정말 영화 같았습니다. 당시 북한 육군 운전병이었던 오청성 씨는 군용 지프차를 몰고 군사분계선 인근까지는 도착했지만 바퀴가 도랑에 빠졌고, 운행이 불가해지자 차에서 내려 남쪽으로 내달렸습니다. 죽기 살기로 뛰는 오 씨를 향해 북한군 세 명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에 맞아 쓰러진 그는 약 20분 만에 국군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총상으로 내장이 7곳이나 파열된 오 씨는 국내 최고의 외과 의사인 이국종 교수에게 수술을 받아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수술 당시 오 씨의 몸 속에는 기생충이 30마리 이상 있었다고 하니, 북한군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복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숨 걸고 귀순한 오 씨는 목숨도 건지고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도 얻었습니다.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중후반까지 쉴 틈 없는 긴장감…이제훈·구교환 열연도 인상적

영화 ‘탈주’ 역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북한군이 자유를 찾아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귀순하는 스토리를 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남측과 인접한 최전방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규남(이제훈)은 남몰래 ‘탈주’를 꿈꾸고 있습니다. 전역을 앞두고 사회로의 복귀를 앞두고 있지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반겨줄 가족도 없는데다 낮은 신분 탓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규남은 초소에서 불침번을 설 때면 라디오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면서 자유를 향한 갈망을 키웁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규남이 아끼는 같은 부대 부하인 동혁(홍사빈)이 계획을 눈치채면서 사건이 꼬입니다. 동혁이 규남 몰래 먼저 탈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고, 두 사람은 함께 처형될 위기에 몰립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파견된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은 규남과 인연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규남은 현상의 정무적 판단 덕에 구사일생하지만, 탈주 계획이 꼬여도 너무 꼬여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남은 자유를 향해 모험을 감행합니다.

영화는 중후반까지 끊임없이 긴장감을 안깁니다. 탈주를 시도하는 초반부에는 웬만한 스파이 영화 못지않은 스릴감이 있습니다. 탈주 과정에서 규남이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코너에 몰린 규남은 절묘한 임기응변과 패기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영화가 본격적인 추격물로 변하는 시점부터는 규남과 현상의 대결 구도가 몰입감을 배가시킵니다. 배우 이제훈의 이미지가 극 중 선역 캐릭터와 잘 어울립니다. 갈수록 처절해지는 몰골로 자유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열연도 인상적입니다. 구교환은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는 광적인 빌런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 메서드 연기를 펼쳤습니다. 반쯤 돌아버린 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규남을 추격하는 데 집착하는 현상과 그런 현상에게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규남의 팽팽한 대립은 이 영화만의 관람 포인트입니다.

또 차량 추격전과 총격전 등 액션 덕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사운드와 음악 활용에도 고민의 흔적이 보입니다. 개성 강한 조연들 역시 신 스틸러로서 매력을 보여줍니다.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2% 부족한 비현실적 연출…몰입감마저 해친다

‘탈주’는 여러모로 칭찬할 점이 많지만 아쉬운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비현실적인 액션과 클리셰입니다.

극 중 규남은 빗발치는 총알 세례에도 절대 피격당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북한군들 총부리와 일직선상에 있는데도 연발하는 소총 탄환에 한 발도 맞지 않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10년씩 복무하는 북한군의 사격술이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손쉽게 규남을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여유를 부리는 현상의 모습은 전형적인 클리셰에 해당합니다. 악당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여유를 부리다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는 상투적인 장면은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현상이 여유만 부리지 않았으면 규남은 서너 번은 족히 잡히거나,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또 중후반부터는 규남의 임기응변도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물품을 구해 위기에서 벗어나는 식인데, 관객 입장에선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탈주’.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성으로만 구성된 무장 단체의 등장 역시 다소 뜬금없이 느껴집니다. 이종필 감독의 전작인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한국 영화계에 여성 캐릭터와 여성 서사의 활용이 꼭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영화에 이를 녹여내는 방식이 조금 억지스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왕 등장시킨 김에 여성 캐릭터들을 적극 활용할 줄 알았는데, 주인공이 위기를 한 차례 벗어나도록 돕는 정도의 역할에 그쳐 이도 저도 아니게 됐습니다.

이처럼 ‘탈주’에는 몰입을 깨는 요소들이 있어 진한 아쉬움을 남깁니다. 특히 종반부에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느라 개연성을 잡지 못했습니다.

다만 꿈을 향해 달린다는 메시지 자체는 작은 울림을 줍니다. 특히 방황하는 청년 세대에게는 크게 와 닿을 수 있겠습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를 주제곡처럼 활용해 마무리한 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다시 노래를 듣고 싶어집니다.

영화는 11일 현재 CGV 실관람객 만족도를 나타내는 골든에그 지수가 9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수치이지만, 호오가 갈린다는 뜻입니다. 실관람평을 공감순으로 확인해보니 기자와 같은 이유로 아쉬움을 드러내는 평이 적지 않습니다. 기대 만큼의 성적을 거두기는 쉽지 않아 보이네요. ‘중박’ 영화 나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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