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한답시고 문화재 훼손 “더는 안 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병산서원 기둥에 못 박아… 문화재 수난
지속적 발생… 단순 실수로 봐선 안 돼
문제 예방할 수 있는 지침·규제 있어야
훼손 땐 관련 방송사 ‘촬영 금지’도 필요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1-11 09:00: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 만대루 나무 기둥에 두께 2∼3㎜, 깊이 약 1㎝의 못 자국이 새겨져 있다. 못 자국은 지난해 12월 30일 KBS 드라마 제작팀이 드라마 촬영을 위해 소품용 모형 초롱을 매다는 과정에 생겨났다. 연합뉴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 만대루 나무 기둥에 두께 2∼3㎜, 깊이 약 1㎝의 못 자국이 새겨져 있다. 못 자국은 지난해 12월 30일 KBS 드라마 제작팀이 드라마 촬영을 위해 소품용 모형 초롱을 매다는 과정에 생겨났다. 연합뉴스

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소수서원을 비롯해 국내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여기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사적 제260호)도 들어 있다. 한데 최근 KBS 드라마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의 제작진이 촬영 준비 과정에서 병산서원 기둥에 등을 달려고 못을 박아 논란에 휩싸였다. 이를 본 한 시민이 안동시에 문화재 훼손 신고를 했고, 한 건축가가 SNS에 문화재 훼손 장면을 목격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공론화됐다. KBS 측은 사과했지만 시청자 청원 홈페이지에는 문화재 훼손 논란 관련 청원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청원 중에는 방영 취소 요청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국민들 역시 이런 행위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특히 드라마 촬영 등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엄격한 관리와 감독, 재발 방지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경북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은 드라마 촬영으로 몇 차례 수난을 겪은 바 있다. MBC는 1999년 드라마 ‘국희’ 촬영 때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기생파티 장면을 연출했다가 서원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부산일보DB 경북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은 드라마 촬영으로 몇 차례 수난을 겪은 바 있다. MBC는 1999년 드라마 ‘국희’ 촬영 때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기생파티 장면을 연출했다가 서원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부산일보DB

방송사 문화재 훼손 잦아

병산서원은 이전에도 드라마 촬영으로 수난을 겪은 바 있다. 1999년 MBC는 드라마 ‘국희’ 촬영 때 병산서원 누각에서 기생파티 장면을 연출했다가 서원 모독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제작진은 서원 곳곳을 드라마 속 기생집으로 그렸고, 서원 누각 만대루에서는 술판 장면을 촬영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 중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그 공간에서 물의를 빚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에는 KBS 사극 ‘왕과 비’ 제작진이 창덕궁 인정전 주변에 LPG 가스통을 묶어 놓고 가스 횃불을 설치하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해 지탄을 받았다. 2005년에는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제작진이 드라마 촬영 중 덕수궁 외벽을 훼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7년 KBS 대하사극 ‘대조영’ 촬영 중에는 문화재인 문경새재를 훼손해 논란이 됐다. 당시 방송사 측은 문경새재 제1관문과 제2관문의 성벽과 기둥에 못질하고 철사를 동여매 비판을 받았다.

영화 촬영에서도 문화재 훼손 논란은 있었다. 2011년,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최종병기 활’은 충남 태안의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말 타는 장면을 촬영해 천연기념물 보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바 있다. 2012년 MBC 드라마 ‘무신’도 신두리 해안사구 보호구역 내에서 말타기 장면을 촬영해 논란이 됐다. 이처럼 문화재 훼손은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다.


KBS 드라마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제작진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병산서원 호롱불에 초롱을 덧대고 있다. SNS 캡처 KBS 드라마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 제작진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병산서원 호롱불에 초롱을 덧대고 있다. SNS 캡처

단순 실수로 볼 수 없어

일부 문화재 관련 전문가들은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문화재 훼손을 반복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단순 실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다. 누가 봐도 상식 밖의 일이 사극 촬영장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KBS가 공공의 자산인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상업적 목적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한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공적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며 실망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국민적 신뢰를 저버린 중대한 실책으로, 그동안 KBS가 문화재 보호에 경각심을 전혀 갖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한 번 훼손되면 원상 복구가 힘들기에 함부로 취급해도 될 대상이 아니다. 사소한 실수는 물론이고 미세한 기후변화나 주변 환경 변화에도 쉽게 변형되거나 손상될 수 있다. 그렇기에 문화재를 이용하고 관리하는 쪽 모두 이를 소중히 여기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KBS 측은 “이번 사안을 계기로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침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내용이 담길지 몹시 궁금하다. 중요한 것은 문화재에 대한 방송가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달라지지 않으면 문화재 훼손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촬영 지침 필요… 훼손 시 책임 물어야

문화재 훼손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회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지 않으면 이러한 사건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방송가는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문화재 보호 기준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촬영 전후의 절차를 더 철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100여 명의 스태프와 중장비가 동원되는 촬영 현장에서 문화재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방송사들이 촬영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하더라도 그에 대한 처벌이 미미한 경우가 많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방송사들이 자율적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법적 제재를 강화하고 문화재 훼손에 대한 처벌을 엄격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문화유산법) 제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1항에는 국가 지정 문화유산을 손상했을 시 그 책임을 뚜렷이 묻고 있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지침과 규제도 필요하다. 촬영 전 문화재 관리 기관의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촬영 방식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촬영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각에서는 촬영 중 문화재를 훼손한 방송사에 대해 몇 년간 문화재에서 촬영하는 것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더 이상 촬영을 이유로 문화재가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달식 논설위원 정달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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