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격을 삽시간에 무너뜨린 괴물은…

부산 박향 소설가 신작 <희주>
장편 소설로는 7년만에 출간
유방암 투병 경험 소설에 녹여
깔끔한 구성·몰입감 커 호평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07-22 09:00:00

박향 작가가 신작 장편 소설 <희주>를 들고 있는 모습. 김효정 기자 박향 작가가 신작 장편 소설 <희주>를 들고 있는 모습. 김효정 기자

‘일상은 나를 간단하게 배반했다. 삶의 질은 떨어졌다. 자주 화장실에 드나들어야 하고, 오래 앉아 있어야 소변이 겨우 나왔다. 빈 속이나 밥을 먹은 후나 상관없이 오심을 느끼고, 설사와 변비가 번갈아 왔으며,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손톱과 발톱이 시커멓게 변하고 몸에 핀 꽃처럼 발진이 여기저기서 올라 왔다. 몸은 계속 말했다. 여기가 아프다고, 걷지 못하겠다고, 밥을 못 먹겠다고…. 나는 5차 항암 중이다.’

부산의 대표 소설가 중 한 명인 박향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희주>(도서출판 강)의 시작이다. 섬세한 묘사, 강렬한 여운에 내 몸의 일부분에 그 고통이 느껴질 정도이다. 순식간에 소설로 빠져 들어 주인공의 인생에 함께 마음을 졸이기 시작한다.


소설은 중년 여성 희주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건강했던 화자는 우연히 검사를 통해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이후 그녀의 세상은 삽시간에 달라진다. 첫 문장에 드러난 현실은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심장 가까운 곳에 주삿바늘이 들어갈 구멍을 항시 만들어두고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꽂을 때마다 극한의 공포를 느낀다. 미숙한 간호사는 여러 차례 바늘을 찌르지만 별거 아니라는 표정이다. 화자는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아서 프랑크의 저서 <몸의 증언>에 나오는 문장 ‘몸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인생 전체에 스며들었다’가 자꾸만 생각난다.


병을 진단받는 순간부터 치료하는 과정은 소설 전체에 생생하게 표현된다. 사실 박 작가가 정확히 5년전 희주처럼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1년간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까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 작가는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고, 결국 가혹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병실에서 계속 자신의 상태를 기록했다고 한다.

“사실 제가 기록한 노트는 소설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반복된 치료와 고통, 뒤따르는 과잉 감정과 동어 반복이 이어졌죠. 결국 유방암으로 투병하게 된 주인공이라는 설정 말고는 노트 속 내용을 하나도 활용하지 않았어요. 그걸 버려야 소설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박 작가의 말처럼 투병기가 아니라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기에, 단정하고 깔끔하며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구성했다. 너무나 담담하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독자는 외려 더 큰 감정의 파도를 만나는 것 같다.

3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 소설이기에 희주의 투병은 여러 줄기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 작품에는 3명의 희주가 등장한다. 암 치료를 위해 입원한 화자는 어느 밤 환청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두 살짜리 여자 아이의 목소리인데, 그 목소리의 주인도 화자와 같은 이름의 희주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데리러 온 귀신으로 오해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게 된다.

희주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다. 화자에겐 두 살 때 죽은 언니가 있었고, 자책감, 우울에 빠진 엄마는 언니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는다. 2년 후 태어난 화자는 죽은 언니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 평생 우울증을 않던 엄마는 화자에게 상처를 주었고, 중학생 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화자는 엄마를 필사적으로 밀어낸다. 직장 때문에 딸 유미를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맡겼고, 엄마는 갓 태어난 유미를 통해 또 다시 죽은 딸로 착각해 집착을 보인다. 유미는 자신을 희주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대하는 외할머니에게 상처를 받았다.

세 명의 희주가 서로에게 혹은 엄마(외할머니)과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하는지가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또 화자에게 27년 만에 연락을 한 친구 주선영의 놀라운 비밀도 작품의 또 다른 재미 요소로 등장한다.

박 작가는 사실 이 소설을 쓸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이 싫었다. 투병이 끝난 후 4년이 지나 소설이 나온 것은 이런 고민이 컸기 때문이다. 망각 기능 덕분에 고통에서 조금씩 무뎌질 수 있었고, 힘들지만 그래도 소설을 쓰는 것이 너무 좋은 박 작가는 결국 시작할 수 있었다.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로 등단한 박 작가는 2013년 <에머랄드 궁>이라는 장편 소설로 1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해 문단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 현진건 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았고, 부산소설협회를 비롯해 여러 문학관에서 소설 작법을 강의하는 등 지역을 대표하는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자리매김했다. <희주>에서 그 내공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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