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재편 중 들이닥친 전쟁… 봄은 오는가 [비즈앤피플]

흔들리는 석유화학업계

최대 고객 중국, 경쟁자로 성장
50여 기업 자리 잡은 대산산단
70% 수준 가동률에 활기 실종

정부 주도 체질개선 사업 진행
핵심 사업장 합병 등 최종 승인
업체 간 이견 울산은 합의 난항

중동 전쟁에 나프타 수급 차질
장기화 땐 관련 업계 전반 위기
“국가 안보 차원 대응을” 주장도

박동해 기자 eastsea@busan.com 2026-03-29 08:00:00

사업재편 중인 석유화학업계가 최근 이란 전쟁까지 겹치면서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가장 혹독한 계절을 맞고 있다. 사진은 전남 여수석유화학산업단지 전경. 클립아트코리아 사업재편 중인 석유화학업계가 최근 이란 전쟁까지 겹치면서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가장 혹독한 계절을 맞고 있다. 사진은 전남 여수석유화학산업단지 전경. 클립아트코리아

지난 25일 충남 서산 대산석유화학단지 앞 상가 거리. 점심시간임에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식당가엔 한 집 걸러 한 집꼴로 불이 꺼져 있었고, 굳게 닫힌 출입문에는 ‘식당 세 놓습니다’라는 빛바랜 방이 붙어 있었다. 산업단지 입구 바로 앞의 한 식당 건물은 권리금마저 포기한 채 새로운 세입자를 찾고 있었다. A4 용지에 매직펜으로 쓱쓱 써 내려간 안내문에는 처음 보증금을 2000만 원으로 적었다가 1000만 원으로 직직 긋고 고쳐 쓴 흔적(사진)이 선명했다. 대산읍 독곶리에서 도시락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60대 엄하정 씨는 “산단이 잘나갈 때는 하루에 도시락이 1000개씩도 들어갔다”라며 “이제는 그 10분의 1수준”이라고 말했다. 엄 씨는 해가 갈 수록 주변 경기가 악화되고 있다며 지역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구조적 문제로 시작된 ‘몰락의 길’… 공급 과잉의 늪

국내 3대 규모의 석유화학 거점인 대산 산단에는 LG화학, 한화토탈, HD현대오일뱅크, 롯데케미칼 등 국내 유수의 석유화학 기업을 포함해 50여 개 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견인하던 대산 단지는 현재 석유화학 업계의 업황 부진을 직격탄으로 맞은 상태다.

산단 내 주요 기업들의 가동률이 70% 수준까지 곤두박질치면서 공장들은 활기를 잃었다. 대기업인 원청은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감이 줄어들자 하청 단계부터 고용 충격이 이어졌다. 산단 주변에 붙어 있는 ‘서산 석화기업·건설·화물 근로자 지원금 지급’ 플래카드들은 석화기업들의 부진으로 지역 고용 위기가 가시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대산 산단을 비롯한 한국 석유화학업계는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가혹한 겨울을 맞고 있다. 이는 단순히 경기 사이클에 따른 반복되는 침체가 아니라 산업의 근간이 흔들리는 구조적 위기다.

그간 국내 업체들은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통해 에틸렌과 폴리에틸렌 같은 범용 제품을 대량 생산해 중국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중국이 자급률 제고를 목표로 대규모 증설에 나서면서 최대 시장이던 중국은 이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바뀌었다.

원가 경쟁력 약화도 위기를 키웠다. 최근 중국과 중동 업체들이 원유를 직접 원료로 투입하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정(COTC)을 도입하면서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은 더 약해졌다. 특히 산유국인 중동의 경우 원유 운송 부담도 없기 때문에 에틸렌 생산 손익분기점이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구조조정 속도 내는 업계… “과거의 영광은 없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는 지난해 8월 석유화학산업 구조개편 로드맵을 제시했다. 같은 해 11월 대산 산단 내 사업장을 운영하는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롯데케미칼의 첫 사업재편계획이 접수됐다. 이후 산업통상자원부 예비검토와 사업재편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난달 23일 ‘대산 1호 프로젝트’의 최종 승인이 이뤄졌다.

정부 로드맵 발표 후 6개월여 만에 나온 대산 1호 프로젝트는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 NCC 사업을 분할한 뒤 HD현대케미칼과 합병해 사업장을 통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핵심은 구조적 공급 과잉의 원인으로 지목된 NCC와 범용 다운스트림 설비를 줄이고 고부가·친환경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 3년의 사업재편 기간 동안 롯데케미칼의 연 110만t 규모 NCC 가동이 중단되고 양사의 중복·적자 설비 가동도 축소된다.

이 과정에서 HD현대케미칼 주주인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은 통합 신설법인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각각 6000억 원씩 총 1조 2000억 원을 출자한다. 정부도 설비 통합 및 고부가·친환경 전환을 위한 투자·운영자금 1조 원과 기존 대출의 영구채 전환 1조 원 등 2조 원이 넘는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물론 이 같은 대규모 지원과 구조조정으로도 석유화학업계가 과거 같은 방식으로 호황 누리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한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에틸렌이 1000만t을 상회하는 수준인 반면, 중국은 5000만t 안팎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여전히 증설을 이어가고 있다”며 “중국발 공급 과잉이 워낙 거세 국내 감축만으로는 해소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석유화학산업 산업 재편 목표치로 설정한 에틸렌 생산 감축치인 370만t을 달성하더라도 전 세계적인 공급망 과잉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결국 범용 제품 생산량 조정에는 한계가 있고, 이미 구조조정 작업을 거친 선진국들처럼 질적인 성장을 이루면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정부와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도 범용제품 생산을 줄이고 ‘스페셜티’라고 불리는 고부가가치 소재로의 전환하겠다는 전략을 구상 중이다.

다만, 정부의 계획대로 사업구조 재편이 이뤄질 수 있을지 미지수다. 대산에 이어 여수 산단의 경우에도 1호 사업재편계획서가 제출됐다. 하지만 울산 산단의 경우 업체 간의 구조조정 대상을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협상의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중동 전쟁에 엎친 데 덮친 격… ‘안보’ 차원 결단 필요

최근 중동 전쟁이라는 변수까지 덮치면서 석유화학업계의 그늘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최근 여수 산단에서는 나프타 수급 차질로 LG화학 여수공장이 NCC 2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여천NCC도 일부 공정 가동을 멈췄다.

구조개편이 실행 단계로 들어가는 시점에 원료 조달 불안까지 겹친 셈이다. 전쟁 장기화는 중동 원료와 해상 물류 흐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 업계 전반에 치명적인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공급 측 조정으로 단기 실적 개선을 점치기도 하지만, 원재료 조달 기반 자체가 흔들리면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서강대 이덕환 화학과 명예교수는 “지금은 비상상황”이라며 중국발 공급 과잉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슈퍼 태풍’이 덮쳐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수익성이 떨어진 범용제품의 생산자체를 포기하고 값싼 외국산 제품을 수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그러나 화학제품은 일상생활용품부터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제조업의 기초가 되기에 내수에 필요한 양은 국내에서 생산할 필요가 있다.

수익성만 따져 생산기반을 폐쇄했다가는 훗날 2021년 ‘요소수 사태’ 같은 국가적 공급망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이에 이덕환 교수는 “석유화학 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이자 국가 안보 사안”이라며 “정부가 산업 정책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까지 총동원해서 챙겨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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