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한 연출에 개성 강한 명연기…조용하게 스며드는 ‘리얼 페인’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2025-01-17 07:00:00

제시 아이젠버그는 믿고 보는 배우입니다. ‘나우 유 씨미’ 시리즈, ‘좀비랜드’ 시리즈, ‘배트맨 대 슈퍼맨’(2016), ‘카페 소사이어티’(2016), ‘라우더 댄 밤즈’(2016)…. 블록버스터, B급 코미디, 로맨스, 드라마 등 장르를 넘나드는 필모그래피를 자랑합니다.

연기력을 충분히 증명한 아이젠버그는 이제 연출의 영역도 넘보고 있습니다. 지난 15일 개봉한 ‘리얼 페인’은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2022)를 잇는 ‘감독’ 아이젠버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제40회 선댄스영화제 각본상을 거머쥔 ‘리얼 페인’을 감상한 후기를 남깁니다.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리얼 페인’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촌 형제인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런 컬킨)가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떠난 폴란드 여행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로드 무비입니다.

둘은 어렸을 때는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교류가 뜸해졌습니다. 데이비드는 번듯한 직장과 단란한 가정을 가진 뉴요커가 됐고, 벤지는 이렇다 할 직장 없이 싱글 라이프를 이어 가는 중입니다.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 여행을 위해 재회한 둘은 서로를 격하게 반깁니다. 문제는 극히 다른 성격입니다. 데이비드는 MBTI로 따지면 전형적인 ‘I’와 ‘J’입니다. 즉 내향적이고 계획적입니다. 반면 벤지는 외향적인 ‘E’와 즉흥적인 ‘P’ 성향 그 자체입니다. 괄괄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성향까지 있는 벤지 때문에 데이비드는 수시로 불편함을 느끼지만, 소심한 탓에 벤지의 무례한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합니다.

벤지라고 데이비드가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타인에게 관심이 많고 감성적인 ‘F’ 성향이기도 한 벤지는 실리와 이성을 추구하는 ‘T’ 성향의 데이비드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 배려심이 없다고 느끼는 포인트가 다른 탓에 수시로 삐걱대는 둘 사이를 보고 있으니, 애증의 관계에 있는 지인 몇몇이 떠올라 절로 공감이 갑니다.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데이비드와 벤지의 애증은 폴란드 홀로코스트 투어를 통해 심화됩니다. 유대인인 두 사람은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겪은 아픔을 다루는 역사 투어에 함께 합니다.

언뜻 배려심이 없어 보이던 벤지는 세심하고 사교적인 면이 있습니다. 타인에 관심이 많고 공감 능력이 좋은 그는 역사 투어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즐겁게 하는 재주를 마음껏 발휘합니다.

반면 내향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데이비드는 홀로 일행을 겉돕니다. 웃음 포인트, 눈물 포인트, 심지어 입맛도 다른 두 사람은 투어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재확인합니다.

물론 즐거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소심한 데이비드는 충동적인 벤지와 함께 일탈을 경험하며 작은 해방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벤지의 충동적 행동은 결국 갈등을 고조시킵니다. 감정 기복이 심한 벤지는 생각나는 말들을 가감 없이 내뱉으며 투어 일행 모두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데이비드는 일행들에게 대신 사과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는 중반부까지는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동행을 그립니다. 큰 틀로 보면 어울리지 않던 두 주인공이 화합해 가는 버디 영화인데, 두 배우의 연기 합이 워낙 좋아 흡입력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리얼 페인’은 평범한 버디 영화보다는 좀 더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벤지와 데이비드의 깊은 아픔을 드러내는 대목은 역사적 비극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보여 줍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리얼 페인’은 반대로 ‘현재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한강 작가가 던진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영화 말미에 조심스레 녹여 낸 치유와 희망이라는 키워드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픔과 극복을 노래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리얼 페인’.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다만 장르 특성상 이 영화가 대중성을 충분히 갖췄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듭니다. 잔잔한 로드 무비에 익숙지 않은 관객이라면 지루하거나 메시지가 모호하다고 느낄 수 있고, 인물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나 ‘애프터썬’(2023)을 흥미롭게 감상한 관객이라면 추천할 만합니다.

‘리얼 페인’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키런 컬킨의 열연입니다. ‘나 홀로 집에’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맥컬리 컬킨의 동생인 키런은 드라마 ‘석세션’으로 2023년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으면서도 감정이 널뛰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 냈습니다.

비법은 즉흥 연기였다고 합니다. 사전에 대본만 숙지하고 자세한 대사는 촬영이 들어가기 직전에 외운 뒤 연기를 펼쳤다고 합니다. 키런 컬킨은 이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리얼 페인’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는데, 이 정도 연기면 오스카 수상도 기대됩니다.

제시 아이젠버그는 여느 때처럼 호연을 펼쳤고, 감독으로서 능력도 수준급입니다. 큰 사건 사고 없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자연스레 따라갈 수 있게 한 각본과 연출이 대단합니다. 때로는 감상적으로, 때로는 절제하는 완급 조절이 일품입니다. 의미심장한 대사들도 인상적이고, 폴란드 태생인 쇼팽의 음악을 활용한 점 역시 영화와 잘 어울렸습니다. 아이젠버그는 이 영화로 제40회 선댄스영화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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