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진료’ 만든 대한민국 의료 체계 안타까워

■의사란 무엇인가/양성관
현실과 이상 사이, 의사의 삶
진심 어린 치료에 대한 고민
생계형 의사로 분투 과정 담아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25-04-24 11:21:49

의정 갈등으로 의료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의사의 본질과 한국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의사란 무엇인가>가 출간됐다. 부산일보DB 의정 갈등으로 의료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의사의 본질과 한국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의사란 무엇인가>가 출간됐다. 부산일보DB

지역 공공의료 붕괴, 필수 의료과 기피 등 한국 의료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부터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확대로 시작된 ‘의료 대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의사에 대한 열망은 여전하다. 전교권 등수를 차지하는 학생 대다수가 의대를 지망하고, 심지어 초등생 의대반도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20여 년간 환자를 진료한 의사이자 8권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한 가정의학과 전문의 양성관. 글 쓰는 의사로 유명한 그가 <의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저자는 흙수저로 태어나 의사가 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년 “매출과 내년 계약을 걱정한다”라며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하루 백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며, 만에 하나 의료소송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진땀을 흘린다.

진료실에서 저자가 만난 환자의 사연은 우리 사회의 서글픈 풍경을 드러낸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병원을 찾은 환자가 늘고, 중증 환자를 기피하게 만든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불만도 토로한다.

의정 갈등으로 의료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의사의 본질과 한국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의사란 무엇인가>가 출간됐다. 연합뉴스 의정 갈등으로 의료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의사의 본질과 한국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하는 <의사란 무엇인가>가 출간됐다. 연합뉴스

책은 하루 다섯 시점으로 구성했다. ‘아침 7시: 떨림’ 은 환자를 만나는 떨림과 의사로서의 첫 경험을, ‘낮 12시: 번민’은 매출과 양심 사이, 검사와 진료 사이에 놓인 의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오후 4시: 고민’은 친절과 실력, 공감과 경계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녁 8시: 현실’에선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의료 시스템에 관한 생각을 밝혔다. 마지막 ‘새벽 2시: 진심’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의사의 진심을 전한다.

묵직한 고민과 안타까운 현실을 짚었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유쾌하다. 의사를 속이는 환자, 치료가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환자, 진료는 필요 없고 스스로 정한 처방을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환자도 있다.

의대 동기가 전공을 선택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생사를 헤매던 신생아가 건강해져 백신 접종을 받으러 왔을 때 감동 때문에 소아과를 택한 동기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인턴 시절, 흉부외과를 배정받았고 수술방에서 멈췄던 환자의 심장이 다시 뜀박질하는 순간, 자신의 심장까지 흔들렸다. 아이도 보고 싶고, 심장도 보고 싶어 결국 소아 심장 분야를 선택한다.

그러나 흉부외과의 현실은 힘들었다. 응급이 많고, 대학병원급 이상에서만 일할 수 있으니 개원하기도 어려웠다. 낮은 수가 때문에 중환자에게 시간을 쏟을수록 병원은 매출 손해를 보니, 간극을 메꾸기 위해 흉부외과는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소아 심장 수술은 난이도가 극상으로 매번 위험 상황이다. 동기들이 교수가 되고 개원의로 돈을 버는 동안 그는 자신을 대학병원에 갈아 넣었다. 결국 나이 마흔이 되며 그토록 사랑했던 소아와 흉부외과를 놓고, 다른 업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의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천사 같은 의사를 지옥 같은 한국의 의료 구조가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진료시스템은 ‘박리다매’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진찰 대신 검사를, 대화 대신 숫자를 선택하게 만든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증상을 듣기보다 검사로 먼저 확인하려고 한다. 뇌 CT 한 번 찍는 비용이 진찰료보다 8.6배 더 비싸니, 환자 8명을 진찰하는 것보다 CT 한 번 찍는 게 병원에 이득이라는 말이다. 검사는 많아지고 설명은 부족해진다. 의사의 짧고 퉁명스러운 말에 환자는 상처받는다. 짧은 진료 시간은 의사에 대한 환자의 의심이 생기게 했고, 믿음이 사라지니 소송이 늘었다. 소송이 늘면 방어 진료가 따라오고, 방어진료는 또다시 불필요한 검사를 낳는다. 한국의 의료 현장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과 부족, 지방 의료 기피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의사가 많아지면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지만, 바이탈 의사의 자부심마저 뺏는 결과라고 말한다. 필수과를 살리려면 그만한 보상을 마련하거나, 탄탄한 교육 시스템으로 훌륭한 의사를 키워내야 하는데, 정부는 책상 몇 개 더 놓고 의사를 많이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오랜 시간 환자와 부대끼며 살아온 의사의 진솔한 고백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진료실 너머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양성관 지음/히포크라테스/384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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