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두, 블루스와 발효 리듬… 유머와 염원으로 풀어내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서 7월 20일까지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부산은 남다른 에너지 느껴져 독특”
미국 박물관 전시도 17일부터 개최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2025-05-18 13:31:55

정연두 작가 프로필 이미지. 안천호(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 작가 프로필 이미지. 안천호(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해 독특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 정연두 작가는 전시를 열 때마다 적잖은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지난달 25일부터 부산 수영구 복합문화공간 F1963 내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고 있는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도 예외는 아니다. 전시장엔 블루스 음악이 흐르고, 뜬금없다 싶은데 묘하게 어울리는 바실러스균이 하얗게 핀 메줏덩이 사진이 줄줄이 걸려 있다. 아주 이질적인 두 존재가 한 공간에서 만나 느슨한 합주를 이어 간다. 우연과 운명, 삶의 희비극을 살아내는 마음의 리듬은 다성적 하모니로 펼쳐진다. 공교롭게도 17일부터 미국 박물관 개인전도 시작돼 두 개를 동시에 준비했다.

정연두의 '바실러스 초상 #5'.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바실러스 초상 #5'.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은하수'.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은하수'. 국제갤러리 제공

밀가루로 우주를 만들다니…

작가는 이번 부산 개인전에서 블루스 음악과 발효의 리듬을 교차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는 유머와 염원의 태도를 작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희한한 것은,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면 연주자만 보이는데 나중에는 연주자가 보이지 않는, 독특한 전시 구성이다.

콘트라베이스, 보컬, 색소폰, 오르간, 드럼 등 다섯 명의 연주자가 따로 또 같이 연주하는 ‘피치 못할 블루스’(2025)는 모두 사전 녹화된 영상이다. 연주자들은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레이 설처럼 전문 연주자가 있는가 하면, 불과 두세 달을 배워서 연주에 합류한 미술학도 드러머도 있다. 음악의 완성도가 중요한 건 아닌 듯싶다.

작가는 각기 다른 장소, 다른 배경의 연주자에게 67 bpm의 느린 속도와 간단한 코드만을 제공해 자유롭게 연주를 요청한 뒤, 개별 곡조의 가닥을 자르고 쌓아 이를 하나의 협연으로 조율했다. “어떤 분은 미국 보스턴에서 촬영하고, 어떤 분은 서울에서 촬영했는데 사실은 합주가 될지는 영상을 다 모을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김은영 기자 key66@
정연두의 '창조자의 손' 스틸 이미지.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창조자의 손' 스틸 이미지. 국제갤러리 제공
왼쪽 사진의 막걸리 기포 터지는 박자에 맞춰 오른쪽 사진 속 드러머는 드럼을 치고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왼쪽 사진의 막걸리 기포 터지는 박자에 맞춰 오른쪽 사진 속 드러머는 드럼을 치고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따로 또 같이’ 합주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레이 설의 콘트라베이스 영상 옆에 전시된 ‘아픈 손가락’(2025) 항아리 다섯 개는 콘트라베이스 줄 튕김에 맞춰 반짝반짝 빛이 난다. 색소포니스트 코이 시먼즈가 연주하는 음악은 발효가 진행되며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반죽의 움직임을 담은 ‘숨’과 함께, 오르가니스트 이효주는 음악에 맞춰 마치 지휘하듯 밀가루를 흩뿌리는 ‘창조자의 손’과 함께, 박서연의 드럼은 ‘버블 비트’라는 제목이 붙은 막걸리 기포 터지는 박자에 맞춰 연주되고 전시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압권은 ‘은하수’ ‘구상성단’ ‘안드로메다’ 등으로 명명된, 우주를 연상시키는 사진이다. 알고 보니 빵 반죽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밀가루를 검은 대리석 위에 털어내 만든 이미지란다. 그 밀가루는, 한국에서 타향 살이 하던 지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배양한 효모 ‘사무엘’을 작가가 직접 분양받아서 5개월 동안 키우면서 빵을 만드는 과정에 생각한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중에 우주가 있어요. 바실러스 균이 메주 안에 있는 것도 그렇고요.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썩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우주 또한 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크기라는 생각에 작업하게 됐습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국제갤러리 부산점 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나란히 전시되는 ‘바실러스 초상’ 사진 연작은 메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콩이 바실러스균과 만나 발효돼 피어오른 하얀 거품을 포착했다. 마치 도깨비처럼 삐뚤빼뚤한 모습인데, 작가는 발효의 흔적에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며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를 친근하고 익살스럽게 전환한다.

정연두의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의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푸근한 목소리의 보컬리스트 하헌진은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 사연을 노래로 들려준다. 작가는 안산에 사는 고려인 청년들 사연을 노래 가사로 만들었고, 하헌진은 이를 블루스 리듬에 맞춰 노래한다. 고려인 사연은 인도네시아 바틱(batik) 천에 러시아어로 적혀 벽에 걸렸다. 작가는 바틱 천 염색 기법을 배우기 위해 지난 2월 인도네시아 수라바야로 날아가서 배우기도 했다. 하나하나, 여간 품을 많이 들인 게 아니다. 이 전에도 작가는 작품을 위해 사탕수수를 300그루나 키웠는가 하면, 사교댄스를 배웠고, 효모를 키웠으며, 막걸리를 빚는 등으로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뭐든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인터뷰 중인 정연두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인터뷰 중인 정연두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미국선 ‘유길준 편지’ 작업 신작도

정 작가는 미국 보스턴에서 차로 40분가량 북쪽으로 가면 만나는 항구 도시 세일럼의 피바디에식스박물관이 한국실(유길준 갤러리) 재개장에 맞춰 마련한 전시에 17일부터 참여하고 있다. 이곳 한국관 명칭엔 특이하게도 개화기 지식인 유길준의 이름이 들어간다.

“19세기 말 유길준이 보빙사(미국 사절 파견단)로 미국에 가면서 일본에서 인연을 바탕으로 에드워드 모스라는 디렉터가 있는 세일럼으로 가게 됐어요. 유길준은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았고, 1년 동안 공부하면서 모스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박물관이 한국 미술을 컬렉션하는 데 큰 도움을 줬죠. 모스가 유길준과 지속적으로 주고받은 40여 통의 편지가 현지에 유물로 남아 있어요.”

당시 유길준은 조선으로 무척이나 돌아오기 싫었던 것 같다. “유길준의 유학 시절에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김옥균 등 친구들은 처형되었어요. 그러면서 고종이 유길준에게 귀국을 명령했고, 유길준은 태평양을 건너갈 때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기차를 탔는데, 얼마나 돌아오기 싫었으면 반대로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 파리로, 이집트로 빙빙 돌아서 3개월이 걸려서 천천히 돌아와요. 그때 배 위에서 쓴 편지가 이번 작업의 모티프가 되었어요.”

그는 이번 미국 전시에선 ‘상록타워’, ‘내 사랑 지니’ 외에도 제3회 2025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싱코페이션 5번’에서 발전시킨 새로운 영상 작품 ‘싱코페이션 #15’(유길준이 귀국길 돌아오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쓴 삐뚤빼뚤 펜글씨를 추가로 모필한 작업)를 선보이고 있다.

알고 보니 박물관과 이어진 사연도 재미있다. 정 작가가 2001년 만든 ‘상록타워’를 구성하는 32개의 슬라이드 필름을 생애 최초로 판매하는데, 그것을 구입한 JGS(Joy of Giving Something)라는 비영리재단에서 아시아의 젊은 작가 작품을 구입한 뒤 박물관에 기증했고, 이번에 새로운 수장품을 정리하던 중 필름을 찾게 돼 작가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기도 하다. 우연은 운명이 되었다.

정연두 작가 프로필 이미지. 안천호(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정연두 작가 프로필 이미지. 안천호(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2002년엔 부산비엔날레 참여 작가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부산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음을 알려줬다. “저한테도 부산은 특별한 곳입니다. 2002년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당시 전시감독이 저한테 전작 ‘보라매 댄스홀’(2001)처럼 부산의 카바레 문화와 춤 사랑에 대한 작업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부산에 4주간 머물면서 조방 앞, 동래 온천장, 자갈치 등의 카바레와 콜라텍을 돌아다니면서 사진 작업을 했는데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면 자갈치시장 콜라텍은 오전 11시가 되면요, 새벽 시장에서 일하시던 할머니들이 생선 냄새를 깨끗하게 지우고, 밍크 코트를 화려하게 차려 입고 춤을 추러 오세요. 금정 카바레도 그렇고, 부산은 뭔가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져 독특했어요.”

경남 진주 태생의 정 작가는 두 살까지 진주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 갔다가 일곱 살 때 다시 진주로 가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옮겼다. 아직도 친척은 진주 쪽에 많이 살고 있지만, 부산·경남 전시는 드물었다. 하긴, 전속 중인 국제갤러리 개인전도 2008년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사이 다른 화랑과 일을 했던 건 아니니까요. 미술관이나 비엔날레 참여 전시를 하는 동안 많이 기다려주셨어요.” 그래서 이번 부산에서 여는 개인전이 더욱 각별한지 모르겠다.

한편,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 미술 석사 과정을 마친 1969년생 정 작가는 2007년 최연소이자 사진·영상 부분에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2008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그의 첫 비디오 작품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를 구입해 화제가 됐다. MOMA가 한국인 작가의 미디어 작품을 구입한 것은 백남준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정 작가는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수차례 열었을 뿐 아니라 국내외 비엔날레 참여 작가로도 주목받았다. 부산 전시는 7월 20일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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