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 2025-05-10 09:00:00
롯데 자이언츠가 시즌 초반 상위권을 달리며 선전 중이다. 롯데의 활약과 함께 ‘야구 도시’ 부산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사직야구장에 다시 관중이 몰려들고 거리에는 롯데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활기를 더한다. 이와 함께 새로운 기대도 함께 피어나고 있다. 오랜 세월 논의만 무성했던 바다 야구장의 꿈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진심 어린 기대와 시민들의 공감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그 꿈에 최근 지역의 한 기업인이 불을 지폈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시설의 건설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아낼 중요한 기회로 여겨진다.
사직야구장, 그 40년의 여정
1985년에 개장한 사직야구장은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서 수많은 추억을 쌓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시설 노후화와 함께 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비가 내리면 피할 공간조차 부족했고, 찬바람이 불면 온기를 나눌 곳도 마땅치 않았다. 선수와 관중 사이엔 거리감이 생겼고 그 틈만큼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다. 많은 시민이 “이제는 새 야구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부산시는 마침내 사직야구장 재건축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복합 스포츠 문화시설로 거듭날 새 구장을 2031년에 열겠다는 구상이었다. 202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그 사이엔 리모델링을 마친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이 임시 홈구장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희망은 생각보다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의 중앙투자심사에서 국비 확보 등의 문제로 사업이 반려된 것이다. 다시금 부산은 갈림길에 섰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제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기가 절묘했다. 지역 상공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하나둘 한목소리를 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특별한 공간에 새로운 야구장을 짓자는 제안이었다.
부산 북항, 여러 꿈을 꾸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북항을 바라보며 고민해 왔다. 항만 재개발이란 거대한 지도 위에서 ‘이 도시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늘 숙제로 남았다. 도심과 바다의 경계에 위치한 땅 북항은 부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기대를 품었을 법한 공간이다. 특히 북항 재개발 1단지 내 랜드마크 부지는 오랫동안 부산 재도약의 상징 공간으로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뚜렷한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해 왔다. 초기에 세계적 랜드마크를 유치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했으나, 현실성 부족과 투자 유치 실패로 표류했다. 이후 글로벌 영상문화 콤플렉스,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지만 이 또한 구체화하지 못했다. 시민 의견 수렴 과정에서도 용도에 대한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부산항만공사와 부산시 사이의 권한 조율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민간 투자자들의 관심이 조금씩 식어가며 이 부지는 가능성만 품은 채 남아 있었다. 도시의 미래를 이끌 거점이 되어야 할 장소가 오히려 도시 계획의 공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바다 야구장 건립, 힘찬 꿈
새로운 활로가 절실한 시점에서 부산 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바다 야구장 건립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돌이켜보면 바다를 품은 야구장의 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수년 전, 누군가는 이미 이 꿈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낸 바 있다. 2011년 양덕복 건축가는 부산 북항과 경남 거제 앞바다에 야구장을 짓는 상상도를 세상에 내놓았고, 2018년 부산 시장에 도전했던 오거돈 후보는 북항에 개방형 야구장을 짓겠다는 공약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시간이 흘러 지난해 11월, 국회 국민 동의 청원 게시판에는 ‘사직동 야구장을 부산 북항 바다 전망 야구장으로 재건축 요청에 관한 청원’이 게시되기도 했다. 게시자는 “현재 사직야구장은 접근성과 관광 매력이 부족해 시대적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부산 북항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야구장을 건설해 부산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과거였다면 지금은 현재다. 바다 야구장 한마디에 도시가 들썩이고 있다. 정치권이 반응했고 언론이 움직였으며 시민들의 기대도 높다. 여기다 협성종합건업의 정철원 회장이 북항 야구장 건립을 위해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상상이 현실로 향하는 신호탄을 쏜 것이다.
어떤 파급 효과 있나
북항 활성화를 위한 전문가 싱크탱크인 북항미래포럼은 “북항 야구장 건립이 지역 사회 발전을 이끌 획기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그럴까? 이를 위해서는 전제가 따른다. 바다 야구장의 다목적 기능이다. 단순히 야구 경기를 위한 공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이벤트와 문화 행사,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설계된다면, 투자 유치와 경제적 타당성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실제로 해외 사례를 보면,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스포츠 시설이 지역 경제를 견인하고 관광산업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바다 야구장은 단순히 또 하나의 야구장을 짓는 것을 넘어, 침체된 북항 재개발의 돌파구가 되고 부산의 도시 브랜드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단 얘기다. 특히 북항 부지는 별도 대체 구장 없이도 신축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바다 조망이라는 압도적인 입지 경쟁력을 갖춘 곳이다. 부산역과의 접근성도 뛰어나 전국 야구팬과 관광객을 유인할 강력한 콘텐츠로 부상할 수 있다. 해양 수도이자 야구 도시인 부산에서 바다 야구장이 가지는 상징성과 경쟁력은 이처럼 명확하다.
성공 사례도 있다
바다와 야구의 만남. 언뜻 들으면 낭만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미 그 낭만을 현실로 만든 도시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오라클 파크다. 2000년 개장한 이 구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뷰’를 자랑하며 단숨에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풍경은 우측 담장 너머로 펼쳐진 맥코비 코브다. 홈런이 바다로 떨어지면 팬들이 카약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공을 건져 올리는 장면은 야구가 단지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이자 모험임을 보여준다. 일본 지바현의 조조 마린 스타디움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에 개장한 이 구장은 도쿄만을 배경으로 경기와 불꽃놀이가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들 구장은 단지 경기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풍경이 되고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는 부산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부산이기에 더 잘할 수 있다. 부산은 이미 바다가 있고 야구를 사랑하며, 열정을 품은 팬이 있다. 이보다 더 단단한 자산이 있을까. 이는 부산만이 만들 수 있는 도시 콘텐츠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묻히고 잊힌 줄 알았던 상상이 다시 부산 앞바다로 밀려오고 있다.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북항 논의에 도시가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지역 정치권, 언론, 상공계,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바다 야구장을 검토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반가운 공감이 또 있었던가. 하나의 제안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흔치 않다. 어쩌면 조기 대선 국면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대선 후보들이 부산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이 구상을 공약으로 채택할 수 있도록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꿈은 누군가 그것을 자기 일처럼 여길 때에만 현실이 된다. 지금은 반응의 순간일 뿐, 결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철원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언론을 제외하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결코 섭섭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권이든, 행정이든, 공적 기관이든, 바다 야구장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끌고 갈 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제는 공공의 의지가 응답할 차례다. 도시의 미래는 혼자 꾸는 꿈으로 완성되진 않는다. 누군가의 결단에 누군가의 실행이 더해져야 현실이 된다. 이젠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시간이다. 부산시가 “부지 이전은 검토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흐름을 헤아려야 한다. 바다 야구장이라는 ‘플랜 B’를 이제는 진지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할 때다.
사직야구장이 과거의 부산이었다면 북항의 바다 야구장은 미래의 부산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파도가 담장 너머로 부딪치고 응원의 함성이 그라운드를 가득 메우며 홈런볼이 물살을 가르며 날아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우리가 만든 꿈의 구장”이라고. 이젠 이 도시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