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 2025-11-22 15:00:00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3층에 자리한 '침묵의방'. 침묵을 통해 힐링되는 공간이다. 정대현 기자 jhyun@
지난 19일 오전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2동' 1층에 자리한 '나무공방'에서 부산디지털고 학생들이 목공 체험 활동을 하고 있다. 나무를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공간이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4층 ‘모두의부엌’에서 요리 활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 ‘모두의부엌’은 집과 같은 요리 활동 공간이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홀, 빵굽는수녀님, 카페바뇌, 메이커스랩, 영상제작실, 상담치료실, 알로이시오 역사관, 뷰티 활동실, 요즘공방, 침묵의방, 도서관, 사랑방, 생활공방, 음악활동실, 모두의부엌, 수직농장, 달빛옥상, 옥상텃밭, 온실, 나무공방, 대청마루, 가족행복텃밭, 넝쿨정원, 체육관, 팜팜농장…. 이 모든 걸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폐교의 놀라운 변신으로 2021년 개관 당시부터 주목받은 부산 서구 암남동에 자리한 ‘알로이시오기지1968’(이하 기지1968)에서다. 4년 남짓 동안 10만 명이 넘는 부산의 초중고교 학생들이 다녀가면서 기지1968은 ‘복합 문화 체험 명소’로 거듭났다. 지난 19일 기지장 이에밀란 수녀 안내로 돌아봤다.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입구.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의 종합실습실로 쓰던 폐교 공간을 리모델링했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외부 전경. 눈앞의 건물이 ‘기지 1동’이다. 정대현 기자 jhyun@
■개관 5년 차…10만 명 이상 다녀가
기지1968이 어느새 개관 5년 차를 맞았다. 개관하던 해부터 몇 번인가 와 본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기지1968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좋은 자재를 사용했고, 색상 하나하나에도 엄청나게 고심했더니 늘 새것 같아요.” 기지장 수녀의 언급처럼 이제 막 준공한 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깔끔하다. 지난해부터는 (재)마리아수녀회 소속 수녀 5명이 오전 6시 아침 기도와 오전 7시 식사를 끝낸 뒤 ‘기지 1동’으로 출동해 층층이 청소까지 도맡고 있다니 더욱 성심이 느껴진다.
총 3개 동으로 구성된 기지1968은 마리아수녀회 소속 수녀 13명이 관리 중이다. △반반피자 만들기 △나무상상놀이 △가족반려식물 만들기 △디지털 캐리커처 △레고공학 자동차 등 20여 개로 구성된 단체 체험 프로그램은 전문 강사진 몫이다. 클래스마다 최대 18명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메인 강사 1명과 보조강사 2명이 배정된다. 요리·목공 프로그램 인기가 특히 높아서 체험 희망 학생 간에 가위바위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알로이시오기지1968 '나무공방' 수업 광경. 정대현 기자 jhyun@
지난 19일 오전 기지1968에서 만난 부산디지털고 1학년 학생(115명 참여)도 마찬가지였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목공 수업에 참여한 이희연 학생은 이날의 목공 주제 ‘선물’에 맞춰 친구와 서로 나눠 가질 2개의 ‘이니셜 키링’을 완성했고, 이만기 학생은 평소 멀리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시는 할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하트 장식품’을 만들었다. 2시간 만에 ‘뚝딱’ 완성한 ‘선물’을 들고 기지1968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은 기쁨 그 자체로 빛나 보였다.
목공 수업 메인 강사 박태홍 작가도 “학생들이 재밌게 체험하고, 기쁜 모습을 보일 때 가장 보람 있다”고 말했다. 기지장 수녀는 “이게 직업과 연관이 되려면 심화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정말 맛만 보고 가는 원데이 클래스 성격이라 그게 좀 고민”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옛 중앙복도 자리에 들어선 경사로. 1층부터 4층까지 연결된다. 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5층의 ‘옥상텃밭’. 다양한 허브·식용 꽃·식충식물·무초(舞草)들이 자라는 곳이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와 ‘1968’에 담긴 의미
기지장 수녀가 말한 고민이 앞으로 기지1968이 풀어가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고유한 이름이 있듯, 시설 명칭에도 그곳의 정체성과 역사가 집약된다. 알로이시오 중·고등학교가 문 닫은 자리에 리모델링을 통해 들어선 ‘알로이시오’와 ‘1968’이라는 시설 명칭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알로이시오’는 마리아수녀회·소년의집·그리스도회 설립자인 미국 출신의 소 알로이시오(본명 알로이시오 슈월츠, 1930~1992)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지1968이 알로이시오 신부의 삶의 철학, 즉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향한 헌신과 봉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가톨릭교회는 2015년 그를 ‘가경자’(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앙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이 죽었을 때 그에게 내리던 칭호)로 선포했을 정도이다.
‘1968’은 알로이시오 신부가 학교 사업을 시작한 해를 상징한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4년 마리아 수녀회의 전신인 ‘마리아보모회’를 창립한 이후, 수녀들과 함께 부모 없는 아이들을 거두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1968년 학교(아미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이 연도는 단순한 구호 활동을 넘어 ‘정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자립을 돕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이며, 시설의 근본적인 설립 정신을 대변한다.
“교육은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립의 중요한 기본 토대였습니다. 잠자리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한 아이는 누구라도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신부님 생각이었죠. 기지1968의 운영 모토가 ‘삶의 기본기’를 가르치고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 데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요.”
알로이시오기지1968 ‘모두의부엌’에서 피자를 만드는 요리 수업 광경.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1층 ‘메이커스랩’에선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메이킹을 통해 미래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이색 명소 ‘유니크베뉴’에도 선정
지난주엔 기지1968이 부산 유니크베뉴에 선정됐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부산시와 부산관광공사가 선정하는 유니크베뉴는 마이스 전문 시설은 아니지만 관련 행사 개최가 가능하면서도 지역 특색을 잘 반영한 장소다. 이번 유니크베뉴 신규 선정으로 기지1968은 단체 학생 진로 체험뿐 아니라 국내외 성인들의 소규모 그룹 방문도 점차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벌써 H투어 등에서 상담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
유니크베뉴 선정과 별도로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해외 6개국(필리핀 과테말라 브라질 온두라스 탄자니아 멕시코) 18개 학교 중 하나인 ‘필리핀 소년의 집’ 졸업생 한 명은 내년 필리핀 교사 연수를 기지1968에서 진행하고 싶다고 알려와 의논 중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이 생전에 청소년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셨기 때문에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일반 성인 그룹과 해외 방문자 워크숍 등으로도 시설을 점차 개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부님이 평소 생각하시던 소명 의식과 뜻을 널리 전파하는 것도 중요할 테니까요.”
알로이시오기지1968 내 ‘알로이시오홀’. 1층과 2층을 연결해 만든 계단식 다목적 공간이다. 공연 등이 가능하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3층에 위치한 ‘사랑방’. 테라스가 있는 온돌마루 활동 공간이다. 책은 사기도 하지만, 기증자들이 계속 보내주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사실 학생 단체 방문 수요가 많은 주중 평일에는 일반 성인 그룹이 이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름·겨울방학이 되면 학생 수요가 줄어들어 여유가 있다. 이런 때 성인 소규모 그룹이나 노인복지관 같은 단체 프로그램, 기업체 단체 탐방이 채워지면 좋을 듯싶다.
시설 자체는 성인들이 활용하기에도 너무나 훌륭하다. 방음 시설이 갖춰진 음악활동실, 지역 주민에게 개방된 도서관, 소규모 음악회나 출판기념회, 강연장으로 활용해도 좋을 법한 알로이시오홀, 소규모 명상 공간과 옥상도 탐났다. 지난해 연말 부산의 한 포럼에선 알로이시오홀에서 콘서트를 즐긴 뒤 생연어구이 코스 요리와 와인을 곁들인 모임을 개최했는데 참석자들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한 복지 단체 어르신들은 단체 목공 수업을 하면서 ‘약 상자’를 만들었는데 다들 만족도가 높았다.
아시아예술협회 사무실과 지역 작가 6인이 작가 스튜디오로 활용 중인 ‘기지 3동’은 조만간 석면 제거 공사가 끝나는 대로 전시 공간도 새로 만들 예정이어서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알로이시오기지1968 '기지 1동' 4층에 위치한 '달빛옥상' 전경. 옥상에 잔디를 깔아 도심에서 캠핑을 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알로이시오기지1968 내 ‘기지 3동’에 들어선 작가 스튜디오 내부. ‘기지 3동’은 옛 알로이시오중학교 건물이다. 이 건물 5층에 대형 체육관이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고 이태석 신부·최민식 사진가 인연도
이번 취재를 하면서 아프리카 남수단(당시 수단)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펼치다 선종한 고 이태석(1962~2010) 신부와 알로이시오 신부 인연도 다시 듣게 됐다. 이 신부는 알로이시오 신부가 천주교 부산교구 송도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그해에 태어났고, 엄마 등에 업혀 송도성당에 다니며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알로이시오 신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 사업을 펼쳐 나갈 때 아주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훗날 의사가 된 이 신부가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어릴 때부터 간직했던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대한민국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들의 삶을 기록한 고 최민식(1928~2013) 사진가는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인 1957년 알로이시오 신부가 운영하는 ‘소년의 집’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미국에 보내 원조금을 모금했고, 이를 통해 ‘소년의 집’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었다. 이런 공로 등으로 알로이시오 신부는 1983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고, 1984년과 1992년 두 번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마리아수녀회는 최민식 사진가와 알로이시오 신부가 동시에 찍은 1950년대 후반 사진 다수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사진전을 열어도 좋겠지만, 아직은 여유가 없어요. 기지1968도 수익성을 바라고 운영하는 공간은 아니지만, 어떤 한 분의 뜻이 현실을 바꿔놓았듯 이 공간이 과거에서 미래를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면 좋겠다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