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기자 songsang@busan.com | 2025-11-23 08:00:00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임직원들과 함께 한화이글스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한화그룹 제공
“한화만 돈 번다.”
올해 반도체, 자동차, 철강, 정유·화학 등 대한민국 주력 산업이 부침을 겪으면서 재계에선 이런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미국발 관세 전쟁과 중국발 공급과잉 여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독 돋보이는 실적을 내는 곳이 바로 한화그룹이다.
■에어로·오션 실적 고공행진…재계 순위 7위
방산 계열사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 2조 2816억 원을 벌어들여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1조 7319억 원)을 일찌감치 넘어섰다. 증권가는 올해 연간 영업이익을 3조 5000억 원 내외로 전망한다. 2023년(5943억 원)에 비해 6배 가까운 증가다.
조선 계열사 한화오션 역시 지난해 2379억 원의 영업이익으로 4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올해 3분기 누적 실적은 9201억 원으로 연간 1조 원 돌파가 무난하다는 평가다.
실적은 곧장 주가에 반영됐다. 2023년 9월 10만 원대였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는 불과 2년 만에 110만 원까지 치솟았고, 같은 시기 2만~3만 원대를 오가던 한화오션 역시 한때 15만 원을 돌파했다. 연초에는 ‘한화’ 이름만 붙으면 주가가 오르는 ‘한화 테마주’ 현상까지 벌어졌다. 한화그룹주 ETF는 올해 들어 최고 수익률이 180%를 넘기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재계 순위에서 2010년 한화그룹은 공정자산이 26조 3000억 원으로 16위에 머물렀지만, 2025년 기준으론 125조 7410억 원을 기록해 7위까지 뛰어올랐다. 불과 15년 사이 자산이 5배 가까이 불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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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하면 흑자”…M&A로 반전 드라마
삼성·현대차·LG 등 주요 그룹이 자체 연구개발(R&D)과 장기 투자 중심의 성장 전략을 펼친 것과 달리, 한화는 부실기업을 인수해 재탄생시키는 ‘반전 전략’으로 몸집을 키워왔다.
현재 한화의 핵심 축인 방산(한화에어로스페이스), 에너지·화학(한화솔루션), 조선(한화오션), 금융(한화생명) 모두 M&A로 편입된 회사들이다.
한화의 출발은 1952년 김종희 창업주의 한국화약이다. 1981년 김종희 회장 별세 이후 당시 29세였던 김승연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으며 본격적인 확장 전략에 나섰다. 취임 1년 만에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한 것이 첫 승부수였다. 제2차 오일쇼크 여파로 두 기업 모두 심각한 적자 상태였으나, 김 회장은 중화학 중심의 산업 재편을 예상하고 과감히 밀어붙였다. 이에 75억 원이었던 영업손실은 불과 1년 만에 동일 규모의 흑자로 반전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부실 금융기관으로 전락한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하며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무려 2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투입돼야 했고, 제조업 중심의 한화로서는 내외부 우려가 거셌다. 하지만 김 회장은 “제조와 금융이 결합하지 않으면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정부와 금융당국까지 직접 설득했다. 대한생명은 한화그룹에 인수된 지 1년 만에 또다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모두가 꺼릴 때 M&A에 나서는 한화그룹 특유의 ‘역공 전략’은 2022년 대우조선해양(한화오션) 인수전까지 생명력을 유지 중이다.
■M&A 성공 자신감, 삼성과의 ‘빅딜’로
연이은 M&A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화는 적자 회사가 아닌 재계의 맏형 격인 삼성그룹과 ‘빅딜’에 나선다.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을 방산·화학 계열사를 약 2조 원에 인수한 것이다.
당시 한화는 군용 화약, 탄약, 유도탄 추진체 등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했지만 ‘국방부 납품용 탄약 회사’라는 이미지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K9 자주포, 항공 엔진, 전투지휘 체계를 보유한 삼성 방산 계열을 흡수하면서 국내 최대 방산 그룹으로 올라섰다.
당시 국내 방산업은 걸핏하면 비리 논란의 중심에 섰고, 정부 조달 방식이다 보니 소폭의 마진만 낼 수 있는 ‘리스크는 큰데 돈은 못 버는 사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한화그룹의 진짜 사업 목표는 국내가 아닌 해외였다.
2001년 튀르키예에 처음 수출된 이후 실적이 없었던 K9 자주포는 한화그룹 인수 이후 핀란드, 인도, 에스토니아, 호주, 이집트, 폴란드 등으로 활발한 수출이 이어졌다. 김 회장의 해외 네트워크와 패키지 수출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록히드마틴’ 꿈, 조선으로 확장
‘한국의 록히드마틴’을 꿈꾼 김 회장의 야망은 군함을 만드는 조선업 인수로 이어진다. 산업은행 관리 아래 있던 대우조선해양을 2023년 인수하며 한화는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 방위산업체로 재탄생했다.
사실 김승연 회장은 2008년에도 한 차례 대우조선 인수에 나섰지만, 인수 대금 납부 방식을 놓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무산됐다. 15년 뒤 장남 김동관 부회장이 업황 반등 조짐을 포착해 인수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했고, 2조 원에 최종 인수하면서 부친의 숙원을 풀었다. 이는 한화가 2008년 제시했던 6조 원대 인수가보다 훨씬 낮은 금액이었다.
한화오션은 고부가가치 선박과 군함 중심의 ‘돈 되는 일감’, 즉 선별 수주에 집중하며 인수 첫해부터 흑자를 기록하는 등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미국 조선소 인수로 마스가 핵심 된 ‘한화오션’
한화오션은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미국 조선 시장 진출이라는 다음 목표를 세웠다. 미국의 조선 역량이 사실상 붕괴한 틈을 타, 지난해 12월 미국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1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후 김동관 부회장은 필리조선소를 직접 방문해 50억 달러(약 7조 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고,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핵심 역할을 맡으며 관세 협상 타결에도 기여했다.
필리조선소 인수는 한화오션이 우리나라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핵잠) 건조를 맡는 데로 이어진다. 지난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잠 건조를 승인하며 건조 장소를 한화오션의 필리조선소로 낙점한 것이다. 핵잠은 척당 수조 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사업으로, 향후 미 해군의 핵잠 선대 확충 밸류체인에 참여하는 가능성까지 열렸다는 평가다.
한화오션은 부산과의 연계도 강화 중이다. 지난 5월 '부산엔지니어링센터'를 개소해 설계 인력 150여 명이 업무를 시작했다. 2027년까지 350명 규모의 인력을 추가 채용한다는 계획도 잡았다. 한화그룹은 부산불꽃축제에도 매년 참여해 시민과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