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 2024-12-25 19:30:00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쌓이지만 납품하지 않으면 기업 유지마저 어려운 상황이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물건을 들여오고 있습니다.”
트럼프 리스크에 12·3 계엄사태, 고환율, 고금리, 고물가 등 대형 악재가 잇따라 겹치면서 지역 중소기업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철강 원자재를 수입해 선박 부품 등으로 가공, 국내 기업에 납품하고 수출하는 A 사는 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왔다. 국내 기업 입찰을 수주 받아 해외 발주 타이밍까지 최소 2~3일 시간이 소요되는데 환율 변동 폭이 너무 커 수천만 원에 가까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업체 대표는 “수입이 많을 경우 수백억 원에 달하기도 하는데 달러 변동 폭이 크면 2~3일 사이에 환차손만 수억 원에 이른다”며 “중소기업에서 환율 전담 부서나 전담 인원을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호소했다.
해외에 공장을 둔 수출기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B 사는 당장은 수출로 이익이 될 것 같지만 해외 공장에서도 일정 부분 원자재를 수입하는 만큼 전체 비용은 증가하는 실정이다. 수출로 수혜를 입어도 법인 차원에선 손해라는 것이다. 코로나19 때는 환율 오름 폭이 그리 크지 않아 고객사와 협력사들이 협의해서 원자재 반영 가격을 조정했지만 변동 폭이 지나치게 크면 이마저도 어려울 수 있다.
업체 관계자는 “100억 원 수출 시 드는 비용이 환율 증가로 커지면 원가 절감, 고통 분담 등의 방안을 짜서 협의에 나서는데 당장 다음 달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전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며 “환율과 관련한 지금껏 경험이 먹히지 않아 전략을 어떻게 짜야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경기 침체에 따른 내수 부진으로 인해 내수 기업 사정은 더욱 어렵다.
H빔 등 철강재를 종합 유통하는 C 사는 2022년 위기보다 더 큰 피해가 올 것으로 우려한다. 당시 세계적인 물가 폭등으로 환율이 13년 만에 최고치를 찍으면서 연간 입은 환차손이 7억 원에 이르렀는데, 올해와 내년은 손해 규모가 쉽사리 파악되지 않을 지경이다. 잠시 주춤하던 환율이 지난 9월부터 오르다가 12·3 계엄 사태 이후 폭등했면서 당초 세운 계획이 무용지물이 됐기 때문이다. 물건을 들여온 시점과 결제 시점이 대개 다르기 때문에 환율이 안정화되지 않으면 수입할수록 손해보는 구조도 한몫한다. 업체 대표는 “매출을 올려야 하니 물건을 들여올 수밖에 없는데 환율이 예측되지 않는 데다 기준금리가 높아 결제 시기를 무작정 연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대내외 정치 리스크까지 더해져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는 상황이고 2022년보다 환차손이 더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역 중소기업들의 경기 전망은 최악 수준이다. 중소기업중앙회 부산·울산본부가 지역 중소기업 326개를 대상으로 내년 1월 경기전망지수(SBHI)를 조사한 결과 67.6을 기록했는데, 이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9월(68.1)보다도 낮은 수치다.
이에 지역 기업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강달러 기조 전환 가능성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자국 제조업을 되살리고 무역 적자를 줄이는 차원에서 강달러 기조를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다. 하지만 미국 재정적자가 오히려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면서 환율이 1500원 선도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데 더 힘이 실리는 형편이다.
부산상공회의소는 내달 지역 기업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실시하는 한편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보다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부산상의는 “대내외 정치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았고 외교마저 올 스톱 되면서 예측 불가한 상황”이라며 “부산상의 역시 계획을 당장 내놓을 수 없지만 지역 기업들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애로 사항 수렴에 적극 앞장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