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2026-10-20 14:11:12
피싱 조직들이 텔레그램에서 공유기 보관장소를 공유하는 대화내용. 부산경찰청 제공
부산의 한 원룸 건물 배수구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심 조각이 15억 원대 전화금융사기 조직을 적발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해외에서 걸려 온 전화의 발신번호를 국내 휴대전화 번호인 ‘010’으로 바꿔 검찰 사칭 피싱 범죄를 도운 조직원과 유심 제공자 등 101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경찰청 마약·국제범죄수사대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등 혐의로 러시아 국적의 20대 총괄 유통책 A 씨 등 16명을 구속하고 80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0일 밝혔다. 경찰은 해외에 있는 중국인 총책 등 5명도 추적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해외 인터넷 전화의 발신번호를 국내 번호로 바꾸는 중계기를 하드디스크 등으로 위장해 밀반입한 뒤 부산과 경남 지역 원룸 등에 설치·운영한 혐의를 받는다. 이를 이용한 해외 피싱 조직의 검찰 사칭 범행으로 피해자 19명이 약 15억 원을 잃은 것으로 파악됐다.
수사는 지난 2월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원룸에서 시작됐다. 막힌 배수관을 고압세척하던 중 잘게 부서진 유심 조각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경찰은 해당 유심이 피싱 범죄에 사용된 사실을 확인하고 주변 CCTV 등을 분석해 중계기 운영책을 검거했다. 조직원들은 사용이 정지된 유심을 부숴 변기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은 총괄 유통책과 모집책, 장비 전달책, 운영책 등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 외국인들이 주축으로, 텔레그램 러시아어 구인·구직 게시판을 통해 모집됐다. 이들 중에는 유학생과 관광비자·재외동포 가족 비자 소지자, 난민도 포함됐다. 특히 7명은 불법체류 상태였으며, 관광비자 소지자 4명 중 3명도 불법체류자로 확인됐다.
운영책들은 부산 연제구·수영구와 경남 창원 등 원룸 13곳에서 한 곳당 중계기 약 10대를 관리하며 매주 60만~70만 원을 받았다. 조직원들은 텔레그램으로 연락하고 장비를 특정 장소에 두고 가는 ‘던지기’ 방식으로 전달하며 서로의 신원을 숨겼다.
경찰은 장비 보관 창고 2곳과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해 중계기 400대와 대포폰 121대, 유심 5256개, 기타 장비 848대를 확보했다. 또 유심 1개당 6만~12만 원을 받거나 대출을 조건으로 자기 명의의 유심을 넘긴 제공자 84명도 적발했다.
경찰은 해외 총책과 추가 조직원을 추적하는 한편 장비 유통 경로와 범죄수익을 조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010 번호라도 정상적인 국내 전화로 단정해선 안 된다”며 “수사기관을 사칭해 금전을 요구하면 통화를 끊고 공식 연락처로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