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개항 140주년, 역사적 순간들] 8. 개항장 '부산감리서'

외교 업무와 사법 경찰 맡아

2016-04-21 19:09:05

부산 영도구 현 봉래초등학교 위치에 자리잡았던 부산감리서(원내 깃발 건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

부산항 개항장에는 2개의 행정관서가 있었다. 개항이후 주권을 행사한 곳으로, 해관(海關)과 감리서(監理暑)였다. 지금의 세관인 해관은 주로 선박의 입출항과 화물에 대한 관리가 주 업무였다면 감리서는 수시로 해관을 드나들면서 내·외국인의 관리와 통상업무, 사법경찰 업무를 보았다.

부산감리서는 1883년 8월 19일 설치됐다. 감리서에는 감리의 최고위직인 감령(監令)과 서기(書記) 2명, 장부(掌簿) 1명이 근무했다. 초대 부산항감령은 이헌영이었다. 이헌영을 보좌해 서기관으로 근무한 이가 민건호인데, 1883년 취임부터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던 1914년까지 겪었던 일들을 일기로 남겨 놓은 책이 '해은일록(海隱日錄)'이다. 호가 해은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개항기 주권 및 조선인 보호
을사조약 2년 뒤 문 닫아

1887년 정월 초이레에 쓴 해은일록에 따르면 "오후에 서관의 욕실에 가서 목욕을 하였다. 일본여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옷을 벗고 함께 들어와 목욕하니 대단히 해괴한 풍속이다"고 적고 있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은 "일본 에도시대에 유명했다던 남녀혼탕의 외래문화가 비록 일본인의 거주지이지만 부산 땅에 존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혼탕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개항장 주변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사고도 기록돼 있다.1892년 1월 7일자 일기에는 "일본인의 칼부림에 조선인 7명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부산감리서는 개항장 질서 잡기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1885년 7월 16일에는 "통상과 관계없는 선박이 부두 돌담 밖에서 닻을 내려 다툼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체포하고 무거운 죄는 감리서에서 처단해 결코 용서를 하지 않겠다. 부두 돌담 안에서 아동이 목욕하는 것도 일체 금지한다"고 고시하기도 했다.

1895년 3월 외국인 해관원이 기르던 사냥개 2마리를 지역민들이 보신용을 잡아먹자 화가난 해관원이 부산감리서에 보상금 300달러와 곤장을 요구했으나 부산감리서가 이를 거부한 일화도 있다.

부산감리서는 1896년 5월 폐지되고 대신 동래감리서가 그해 8월 설치됐다. 동래감리서는 부산항재판소일까지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국인과의 소송의 각국의 영사들과 협의해 처리했다. 때문에 당시 감리서는 개항기 조선인을 보호하는 역할은 물론 외국인과의 소송에서 주권을 지키는 역할도 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동래감리서의 기능도 쇠퇴해졌으며 1907년 결국 문을 닫았다. 김 진 기자 jin92@

지면보기링크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 사회
  • 스포츠
  • 연예
  • 정치
  • 경제
  • 문화·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