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 | 2024-05-14 20:04:05
미국 정부가 중국산 전기차는 물론 반도체, 배터리 등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하면서 우리 정부와 관련 업계가 향후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완성차·반도체 업계가 단기적으로는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글로벌 공급망 구조와 맞물려 장기적으로는 피해를 볼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과 그에 따른 피해에 대응하기 위해 지시한 관세 인상의 핵심 표적은 중국산 미래 첨단산업 제품과 주요 광물에 집중돼 있다.
올해 중국산 전기차에 대해서는 25%의 관세를 100%로 인상하고, 리튬이온 전기차 배터리와 배터리 부품은 7.5%의 관세를 25%로 올리기로 했다. 천연 흑연, 영구 자석의 관세율은 0%에서 2026년 25%로, 그 외 핵심광물의 관세율은 0%에서 올해 25%로 상향 조정된다.
사실상 미래 산업의 완성품은 물론 핵심 원자재에 '관세 폭탄'이라는 전방위 규제에 나선 셈이다.
정부는 미국의 이번 조치가 중국에 한정된 것으로 보고 공식 반응을 자제하는 분위기이다.
전략 경쟁 맞상대인 중국을 향한 고율의 관세 부과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의 선거전략 차원에서 이뤄진 것 아니냐는 업계 일각의 인식과도 맞물려 있다.
실제 중국산 전기차는 미국 시장에서 승용차·상용차를 막론하고 거의 판매되지 않아 이 같은 시각에 힘이 실린다.
향후 중국산 저가 전기차, 나아가 중국에서 생산되는 테슬라 전기차의 미국 시장 진입에 대비한 예방적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테슬라는 상하이 기가팩토리에서 생산한 모델3, 모델Y를 유럽과 한국으로 수출하는 등 중국을 글로벌 생산기지로 전환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다.
다만, 이번 고율 관세 조치가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데다, 중국의 '보복 대응'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향후 국내에 미칠 파장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바이든 정부가 내놓은 관세 부과 대상에 구체적으로 어떤 품목이 해당할지 지켜봐야 한다"며 "당장은 영향이 제한적이겠지만, 중국이 분명 맞대응할 가능성이 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산업계에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에 향후 흐름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100% 관세 부과가 이번 조치의 핵심인 만큼 국내 완성차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당장 광범위하게 얽힌 글로벌 공급망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완성차업체를 포함한 국내 기업들이 일부 사용 중인 중국산 부품이 미국의 포괄적 관세 조치 대상이 될지 여부에도 주목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한국이 단기적으로 전기차와 반도체 수출 등에서 반사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저가 제품의 덤핑을 앞세운 중국의 불공정 교역에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이전보다 더 공정한 무역 환경이 조성돼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경쟁하고 있는 분야가 적지 않다"며 "(미국이 중국에 부과하는) 관세가 거의 3∼4배씩 높아지면 아무래도 우리 제품이 팔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했다.
반면, 장기적으로 한국산 제품 수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자동차에 들어가는 중국산 부품들이 매우 많아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한다고 해서 우리 차가 더 잘 팔릴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고 했다.
한편, 미국 정부는 2025년까지 중국산 레거시(범용) 반도체를 25%에서 50%로 인상하기로 했다.
다만, 미국이 중국산 범용 반도체 제품에 물리는 관세를 올려도 한국 반도체 산업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으로 업계에서는 예상한다. 한국은 첨단 반도체, 중국은 저가 구세대 범용 반도체 위주로 주력 분야가 달라 직접적인 경쟁 관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 등의 제재로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이탈하면서 저가 범용 반도체에 투자를 집중해 왔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미국이 중국산 배터리에 부과하는 관세가 더 높아지면 한국산 배터리가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다소 유리해질 수 있다고 예상한다. 중국의 CATL과 BYD 등은 자국산 저가 배터리를 앞세워 내수를 넘어 해외 시장에서도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으로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도 중국 업체들은 배터리 가격을 대폭 낮춰 공세를 펼쳐 왔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산 리튬이온 전기차 배터리에 부과하는 관세를 연내 7.5%에서 25%로 인상하면 가격경쟁력 저하가 불가피할 것으로 업계에서는 예상한다.
철강 분야에서는 미국의 대(對)중국 관세 인상으로 중국 기업들이 한국으로의 수출 물량을 더 밀어내면서 포스코, 현대제철 등 한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조치로 중국의 대(對)미국 철강 수출이 감소할 수 있지만, 한국은 미국 정부가 정한 쿼터 범위에서 철강 제품을 무관세로 수출하기 때문에 미국 시장에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없는 구조다. 현재 한국은 대미 철강 수출에서 '263만t 무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엔저 심화로 일본산 철강 제품의 국내 유입도 활발해지는 상황이다. 작년 한국의 전체 수입 철강재 중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철강이 차지하는 비율은 92%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관련 업계의 철저한 사전 대비를 주문했다.
오현석 계명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기존 범위 안에서 부품 공장과 공급망을 미국 위주로 재편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느냐"며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추세에 맞춰 사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