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 2025-05-13 09:00:00
인터넷, SNS 발달로 이젠 누구나 자신의 글을 올리는 매체를 가지는 시대이다. 출판사의 도움 없이 개인이 자신의 글을 모아 직접 책을 내는 독립 출판도 활발하다. 누구나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지만, 반대로 글의 홍수에서 정말 좋은 글에 대한 갈망은 더 커졌다. 문학 작품에 대한 독자의 기대는 높아졌고, 평가는 더 날카롭고 냉정하다. 소설가, 시인의 고민은 깊어지고, 한 문장을 남기기 위해 수많은 문장을 버리는 날은 이어진다.
창작의 고통도, 세월의 공격에도, 여전히 자신의 글쓰기에 몰두한 부산의 원로 작가들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70대, 80대에도 신간 소설집을 잇따라 출간하며 원로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신태범, 김문홍, 허택 작가가 그 주인공들이다.
“등단한 후 60여 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밥줄에 목이 묶여 겨우 문학판 언저리에 기웃거리며 글쓰기는 이어왔지만, 책을 낼 엄두는 하지 않았죠. 생애를 걸고 소설을 쓰는 동료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나이 80을 넘기며 내 손으로 내 유고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마침내 소설집이 탄생했습니다.”
<수탉이여 영원하라>라는 첫 소설집을 낸 80대 신태범 작가는 주목받을 만큼 재주가 뛰어나지 않다며 부끄러워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신 작가는 등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1963년 21살의 나이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1960년대 당시 <사상계> 신인문학상 출신을 살펴보면, 황석영, 이청준, 최인호 작가 등 한국 문단 거장들이다. 신 작가도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여건만 되었다면, 한국 대표 소설가 반열에 올라와 있을 수도 있다.
생계를 위해 30여 년 넘게 부산시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간간이 소설, 희곡 등을 썼지만 책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60여 년의 응축된 세월이 담긴 만큼 이번 소설집은 ‘진짜 소설가’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는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무수한 날줄과 씨줄로 엮이는 인연의 그물, 우리네 삶의 전모를 드러내는 밑그림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 편 한 편 소설 속에는 ‘삶-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신 작가는 많은 응원에 힘입어 새로 쓴 중·장편 소설도 이어서 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름에 달아준 ‘소설가’라는 과분한 호칭에 대한 작은 예의를 다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2008년 56세 늦깎이로 등단한 허택 작가는 5번째 소설집 <웃음과 울음의 원무>를 발표했다. 현직 치과의사면서 소설을 쓰지만, 늦은 등단에도 벌써 5번째 소설집을 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작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많은 작가들이 경의를 표할 정도이다.
그동안 몸과 욕망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변주하며 ‘몸의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온 작가는 이번 신간에서 좀 더 과감하게 소설적인 변형을 시도했다. 개성적인 대립 구도와 화법이 돋보이며 인간의 욕망을 과감하게 탐험하고 있다.
“어렸을 때 보수동 책방골목을 자주 지나다니며 많은 책을 부럽게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치과의사로만 살았다면,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을 것 같은데 소설가로서 다양한 세계를 만날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창작의 한계를 느끼며 글쓰기가 얼마나 역시 매번 깨닫게 됩니다.”
이번 신작에는 8편의 단편을 실었다. 표제작인 ‘웃음과 울음의 원무’는 권위적인 아버지로 살아온 주인공이 아내가 떠난 후 자신이 왕처럼 군림해 온 집이 공허와 적막뿐이라는 걸 느낀다. 아내의 추도식 날 처음 본 8개월 외손녀의 웃음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반성과 구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전성욱 문학평론가는 “허택의 소설은 점점 더 바람을 닮아가고 있다.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고, 공기처럼 가볍게 막힘없이 흐르는 것을 지향하는 듯 보인다. 형식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내용은 복잡함이 없이 담박하다”고 이번 작품에 대해 비평했다.
부산 연극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 김문홍 작가도 지난해 연말 6번째 소설집 <설야행>을 출간하며 80대 작가의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1976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에서 중편소설 <갯바람 쓰러지다>로, 같은 해 <소년중앙>에서 동화 ‘바닷가의 소년’으로, 역시 같은 해 <월간문학> 신인상에 동시가 당선돼 등단했다. 등단 첫 해 3관왕을 차지하며 다방면에 걸친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동안 소설집, 희곡집, 동화집, 연극평론집, 영화평론집, 연극 이론서 등 60여 권을 발간했다.
“다양한 장르의 글을 지어 오다 보니, 인생을 아주 다채롭게 살아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어 문학의 장르를 하나씩 버리기로 마음먹고 이별식을 하고 있습니다. 재작년 여섯 번째 창작희곡집을 낸 뒤 ‘희곡 고별 북 콘서트’를 했고, 이 소설집으로 소설 역시 이별하려 합니다. 손자를 위한 동화는 계속 쓰지 않을까 합니다.”
소설집에는 단편 7편과 새로 쓴 중편을 함께 실었다. 극작가이기도 한 작가의 특성에 맞게 극적 구성이 돋보인다. 인물들이 매우 격렬하고 역동적이어서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는 독자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소설가협회는 지난달 25일 ‘선배 작가와의 만남’ 이름으로 신간 북 토크를 열기도 했다. 박향 소설가가 사회를 맡아 세 소설가의 신작을 소개한 후 후배 작가가 책 속 문장을 낭독하고 질문을 하는 등 선후배 작가의 훈훈한 응원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